새 일왕 즉위, 천황제 이데올로기 꿈틀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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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의 존재 자체는 일본 국수주의와 친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새 일왕의 즉위는 우익들에겐 ‘기회’일 수 있다. 즉위 관련 행사는 우익들이 바라는 대로 일왕의 권위와 신성을 높이는 장치로 작용할 것이다.

일본에서 ‘개원(改元·연호가 바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1989년부터 재임해 온 아키히토(明仁) 일왕(86)이 오는 4월 30일 퇴위하고, 5월 1일 나루히토(德仁) 왕세자(59)가 새 일왕으로 즉위하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일왕(오른쪽)과 나루히토 왕세자가 지난 1월 2일 도쿄 왕궁에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도쿄|AFP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오른쪽)과 나루히토 왕세자가 지난 1월 2일 도쿄 왕궁에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도쿄|AFP연합뉴스

지난 1일 ‘헤이세이(平成)’를 잇는 새 연호(年號) ‘레이와(令和)’가 발표됐고, 2024년 유통할 새 지폐의 도안도 지난 9일 공개됐다. 오는 4월 27일에는 최장 10일간의 연휴인 ‘골든 위크’가 시작된다. 정권 부양을 위해 개원을 활용하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의도도 엿보이지만, 새 일왕 즉위를 계기로 ‘새 시대’ 분위기가 일본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덴노(天皇·천황)’로 불리는 일왕은 1889년 공포된 대일본제국 헌법(메이지 헌법) 하에선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는 ‘절대군주’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가까스로 전범재판을 피한 히로히토(裕仁) 일왕(재위 1926~1989년)은 1946년 1월 1일 ‘인간 선언’을 통해 신성(神聖)을 부정했다. 그해 11월 공포된 ‘평화헌법’은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1조)으로 ‘국정에 관한 권능을 지니지 않는다’(4조)고 규정했다. 일왕이 정치적 실권이 없이 ‘권위’만을 가지는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정치적 실권 없는 상직적 존재

하지만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80년 가까이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인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 군림했던 일왕의 잔영은 일본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일왕의 ‘신민(臣民)’임을 자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난 4월 10일 도쿄에서 열린 아키히토 일왕 즉위 30주년 기념행사에서 개그맨이자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北野武·72)는 축사를 통해 60년 전 어머니에게 이끌려 당시 아키히토 왕세자 부부를 처음 봤던 경험을 얘기했다. 그는 “어머니는 내 머리를 누르면서 ‘머리 숙여. 절대 드는 게 아니야. 천벌 받을 거야’라고 했다”고 밝혔다. 하라 다케시(原武史) 일본방송대 교수는 최근 출판한 <헤이세이의 종언>에서 “천황제에 관한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 자체가 없다. 일왕에 대한 ‘황공하다’라는 감정이 지금도 국민 안에 뿌리 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연호를 쓰는 것도 천황제와 밀접하다. 연호가 일왕을 권력의 정점에 두는 과거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메이지유신 이후 ‘일세일원(一世一元 ·1대에 하나의 연호)’ 원칙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왕실(황실) 전범에서 연호 규정을 빼버렸다. 한때 폐지 위기에 몰렸던 연호를 1979년 원호법 제정으로 부활시킨 것이 현재 일본 최대 우익단체인 ‘일본회의’로 이어지는 우익 세력이다.

실제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일왕에게 권위와 신성을 부여해 전전(戰前) 천황제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이 이어져 왔다. 1969년 제정된 건국기념일(2월 11일)은 전전의 기원절을 부활시킨 것이다. 기원절은 신화상 인물인 초대 덴노인 진무가 즉위한 날이다. 1999년에는 ‘히노마루’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國歌)로 하는 법률이 제정됐다. 우익 세력은 또 일왕 부부의 방문지에 등불을 들고 맞이하는 행사를 반복함으로써 일왕의 권위화를 꾀해 왔다.

이런 우익의 기도를 좌절시킨 동시에 ‘상징 천황제’를 일본 국민 속에 자리잡게 한 이가 아키히토 일왕이다. 그는 ‘국가의 상징’으로 일왕을 규정한 현행 헌법에 충실하되 낮은 자세로 국민들에게 다가가 새 일왕상을 구현했다. 재해지나 복지시설 등 소외된 이들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는 왕세자 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 전국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광역자치단체)을 모두 세 차례나 순회했다. 14년간 왕실담당 기자를 했던 이노우에 마코토(井上亮) <니혼게이자이신문> 편집위원은 지난 4월 9일 외신기자센터(FPCJ) 브리핑에서 “일왕은 신과 같은 위치라고 생각하는 우익들에겐 인간적인 일왕의 모습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일본 시민들이 지난 1일 도쿄 번화가에서 새 연호가 발표되는 것을 대형전광판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 / 도쿄|AFP연합뉴스

일본 시민들이 지난 1일 도쿄 번화가에서 새 연호가 발표되는 것을 대형전광판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 / 도쿄|AFP연합뉴스

천황제로 돌아가려는 우익들의 시도

아키히토 일왕은 ‘평화 일왕’의 모습으로 일관했다. 침략전쟁의 책임자였던 아버지 히로히토가 전후 한 번도 찾지 않은 오키나와를 11차례나 방문했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지상전투가 벌어지면서 주민 9만4000명을 포함, 총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5년에는 태평양전쟁 격전지 사이판을 찾아 일본군 위령비를 참배했다. 이때 한국인 희생자 추념 평화탑도 찾았다. 그는 지난 4년간 패전일(종전일)인 8월 15일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반복해 말해왔다. 재임 기간 동안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靖國)신사도 찾지 않았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를 간접적으로 견제해온 것이다.

하지만 일왕의 존재 자체는 일본 국수주의와 친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개원 열기’가 이를 증명한다. 새 일왕의 즉위는 우익들에겐 ‘기회’일 수 있다. 즉위 관련 행사는 우익들이 바라는 대로 일왕의 권위와 신성을 높이는 장치로 작용할 것이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2015년 “겸허히 과거를 돌아보고, 전쟁을 체험한 세대가 이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 비참한 체험이나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가 앞으로 어떤 일왕상을 보여줄지는 미지수다. 하라 교수는 “일왕과 자위대의 거리가 한층 줄어들고, 일왕이 전전처럼 군사적 상징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했다.

일본은 패전 후 ‘상징 천황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일왕의 전쟁 책임을 비롯한 천황제의 문제를 애매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국 ‘무책임의 구조’를 만들었다고 지적된다. 우쓰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 전 일본변호사협회 회장은 최근 <슈칸긴요비(週刊金曜日)>에서 “천황제는 헌법에 정해진 법 아래 평등과 모순되는 ‘차별’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면서“ 우리 국민의 주권자 의식이 희박한 것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진우 도쿄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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