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천 책방 골목-발길 끊긴 지 오래, 인접 생선골목만 ‘북적’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대학천 책방골목과 생선구이 골목, 군용물품 시장골목, 백년시장 골목은 우리 현대사의 압축판이다. 세월은 흐르고 길은 변해간다. 어제 마주쳤던 골목의 모습을 내일 또 보리라는 약속은 없을 것이다.

[골목 내시경]대학천 책방 골목-발길 끊긴 지 오래, 인접 생선골목만 ‘북적’

북악에서 흘러내린 실개천이 성균관 앞을 지나 대학로를 거쳐 청계천과 합류한다. 그 개천의 옛 이름은 흥덕동천, 주변의 대학들을 거쳐 흐른다 하여 대학천으로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대학천은 개천보다 주변 책방 상가를 부르는 이름이 됐다. 종로6가와 청계천 사이 대학천 상가 골목에는 100여개 이상의 도서총판 도·소매상이 몰려 있어 국내에서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책은 이 골목을 거쳐 전국의 크고 작은 서점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종로6가 일대와 대학천 주변의 덕성상가 사이에 난 좁은 골목이 그 많던 책방이 번성하던 대학천 골목이다.

대학천 골목의 서점들은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겨우 예닐곱 남은 서점이 오랜 습관처럼 문을 열고 닫을 뿐 책을 사러 오는 지방 총판업자의 발길도, 싼 값에 동화책 전집을 구하러 오는 부모들도 찾아볼 수 없다. 영광은 사라졌고 흔적은 폐지더미처럼 볼품없었다.

한때 100여개 이상의 도서총판 도매상들이 몰려 있던 대학천 책방골목. 한국 출판유통의 메카로 불렸다.

한때 100여개 이상의 도서총판 도매상들이 몰려 있던 대학천 책방골목. 한국 출판유통의 메카로 불렸다.

[골목 내시경]대학천 책방 골목-발길 끊긴 지 오래, 인접 생선골목만 ‘북적’

4~5년 전에 서점 거의 사라져

책방 문을 연 지 40년이 넘었다는 주인은 “솔직히 책 읽어서 뭐해요?”라는 반문을 노여움과 한탄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한때 좋은 시절이 있었지만 쇠락은 너무나 급하게 닥쳐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팔지 못할 책더미만 끌어안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어지간히 질린듯 자식이 서점하겠다면 말릴 것이라고 했다. 쌓여 있는 책을 다 팔고 문을 닫겠다고 했으나, 스스로도 그런 날이 올까 의심하고 있었다. 엊그제 풍물시장에서 헌책이라도 팔아보려고 들렀다는 지인은 “공부한 게 후회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어찌 책을 파는 일과 책 읽는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 그 서점엔 여전히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표어가 붙어 있다.

그 옆집 서점 젊은 주인은 컴퓨터로 바쁘게 책을 검색하고 있었다. 여러 권의 책들이 더미로 묶여 있고 주문표가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장사가 어떠냐는 질문에 주인은 “오랜 단골들 덕에 그럭저럭 버틴다. 돈은 크게 벌지 못하고 가게를 열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천에서 살아남은 비결을 묻자 “지자체 공공도서관 납품으로 유지한다. 종로구에 서점이 한 열 군데 정도 있는데, 돌아가면서 납품을 하니까 버틸 수는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지역 서점에서 학교와 도서관에 납품하도록 바뀐 뒤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이제 대학천은 끝났다. 20년 전부터 서점이 조금씩 줄어들다가 거의 사라진 지는 한 4~5년 됐다”며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점원으로 일한 지 20년, 가게를 맡은 지 10년 정도 됐다는 또 다른 서점 주인은 대학천 서점 골목의 몰락에 대한 또 다른 사정 얘기를 들러줬다.

1990년대부터 대형 자본이 출판 유통과 도매업에 진출하면서 조금씩 쏠림현상이 일었고, 그나마 버티던 도매상들도 IMF 외환위기 시절 이후 하나둘 부도를 내면서 급격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에서도 대학천 도매상들에게 더 이상 외상으로 책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다 사제어음인 문방구 어음 주고 몇 달씩 밀려 책을 받아다 지방에 풀고 그랬다. 그러던 것이 은행어음으로 바뀌고 지금은 현금 줘야만 책을 받아올 수 있다. 책을 쌓아둘 창고도 필요 없고 큰 매장도 소용없다. 이 서점도 3년 전부터 5분의 1로 매장을 줄였다”는 것이다. 도서정가제 영향은 어떠냐는 질문엔 “큰 영향 없다”며 이제는 대형서점들도 책 매대를 줄이고 돈 되는 다른 상품을 파는 매장으로 전환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대학천을 중심으로 청계천 일대는 서점이 줄을 이은 거리였다. 대학천은 새 책을 팔았고, 청계천 넘어 평화시장 1층 상가 일대의 헌책방은 청계천7가까지 이어졌었다. 대학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변엔 서울대학교 문리대, 의과대, 사범대와 음대, 그리고 성균관대, 동국대와 한양대가 있어 책을 찾는 이들이 일대의 거리에 북적였다. 새 학기면 학부모와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싼값에 전과나 사전, 각종 참고서를 사러 나왔다. 청계천7가 쪽 헌책방들은 유신시대 금서가 은밀히 팔리던 불온한 사상의 암시장이었다. 책방 주인과 손님이 낯을 익혀야 숨겨둔 책들을 내밀었고, 숨죽이며 책장을 넘겨볼 수 있었던 시대의 두근거림은 이제 더 이상 이 거리와 골목에 흔적이 없다.

연탄불로 구운 생선구이로 유명한 동대문 생선구이 골목.

연탄불로 구운 생선구이로 유명한 동대문 생선구이 골목.

서점 나간 자리, 다른 업종으로 채워져

수십 년 동안 손길에 닳고 닳아 길이 난 미닫이문을 열고 손님이 원하는 책을 묻자 “그 책은 주문해야 구할 수 있다”는 답을 들려주던 서점 주인은 이제 더 이상 구색으로 재고를 갖춘 서점들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대형서점들도 나갈 만한 책들 빼고 재고를 갖고 있지 않으며, 작은 서점일수록 사정은 더 심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갈 만한 책은 뻔하다며 서가에 꼽힌 일본 작가들의 소설책을 가리켰다. “잘 팔리는 일본 작가들 소설책과 추리소설은 확실히 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독서층이 줄어든 이유를 ‘한국문학의 자멸’ 때문이라고 평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현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그랬다. 대학천이 명성을 잃게 된 시기가 1990년대부터였고 공교롭게도 그 시절부터 국내 대형 소설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골목 내시경]대학천 책방 골목-발길 끊긴 지 오래, 인접 생선골목만 ‘북적’

대학천 골목의 점포들은 다른 업종의 가게들로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임대 표지가 붙은 곳이 많았다. 지역의 특성상 봉제 관련 부자재 점포가 대학천 골목의 새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군데군데 지하철 택배 인력사무실이 자리잡고 있고, 물건을 받아 배달처로 가는 노인들이 골목을 부지런히 걷고 있다.

대학천 골목이 끝나는 즈음에서 청계천과 평행한 긴 골목길은 이미 서점골목보다 더 유명해진 생선구이 골목, 닭한마리집 골목이다. 좁고 긴 골목에 생선구이 식당이 10여 곳, 닭한마리 전문 식당이 또 그 절반 정도 밀집해 있다. 길가 화로에서 굽는 생선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고 집집마다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사연들을 내어 붙여 두었다. 골목을 걷기가 무섭게 식당 주인들은 “제일 맛있는 집”이라는 외침으로 호객을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을지 몰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때문에 책은 팔리지 않아도 잘 구운 굴비며 삼치, 갈치와 꽁치구이, 기름기 흐르는 고등어자반은 불티나게 팔린다. 된장국을 곁들인 자반구이 한 상에 8000원. 된장찌개는 6000원이면 먹을 수 있다. 입맛에 맞으면 식당에서 먹은 굴비도 한 두름 살 수 있다. 이 골목은 이미 해외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져 한낮에도 이국의 식객들이 넘쳐난다. 서넛이 닭한마리를 먹기 위해 지도를 보며 골목을 탐색하는 모습은 이 길의 일상이다.

[골목 내시경]대학천 책방 골목-발길 끊긴 지 오래, 인접 생선골목만 ‘북적’

대낮부터 생태찌개와 갈치구이를 시켜 술을 마시던 중늙은이들은 “여기가 진짜 맛있는 비결은 연탄불이다. 다른 데는 가스불로 구워서 제맛이 안 난다”고 주장했다. 평화시장 일대에서 청춘을 보내고 일을 모두 놓은 후에 친구들을 만날 때면 꼭 생선구이 골목에서 만난다고 했다. 골목도, 맛도 그대로라서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친구 안부를 묻는 질문에 소주를 따르던 이는 잠시 멈췄다가 “안 보이면 죽은 거야. 그 친구 안 보인 지 오래됐다”고 답하자 일행이 공감했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속에서도 사라지는 것이다. 책들도, 서점 골목도 이제 눈에 띄지 않으니 우리 시대의 흔적 속에서 사라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외국인도 찾는 생선골목은 관광명소로

생선구이 골목과 청계천 사이에는 보다 좁은 골목길이 미로를 이룬다. 한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좁은 골목에는 가파른 계단과 구부러진 길이 흐트러져 있어 한가한 행인은 결코 들어설 일이 없는 구역이다. 골목길에 어지러이 ‘시야게’ ‘단춧구멍’ ‘지퍼’ ‘치마주름’ 등 업종을 짐작할 만한 작은 간판들이 붙어 있고 지나치는 귓가로 재봉틀이며 기계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옷짐을 꾸리던 이는 “여기가 염색집들이 많았는데, 환경규제 때문에 거의 다른 곳으로 옮겼다. 평화시장이 길 건너라 후가공 업체들이 구석구석 박혀 있다”고 했다. 인근 공장에서 급하게 일감을 던져주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어 유용하다는 이야기다. 골목을 따라 걸으면 어쩌면 식당골목이 나오고, 어쩔 때는 청계천가로 나오게 된다. 근래 보기 드문 골목의 미궁이 이곳에 있다.

생선구이 골목 끝에는 군용물품을 파는 골목이 잇닿아 있다. 모포며 작업복까지 국방색 천지의 물건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이 80이 넘었다는 수선가게 노인은 “시장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사서 옆 골목에서 검게 염색하고 여기서 줄여 입으면 그야말로 멋쟁이 패션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쟁 직후 서민과 노동자의 옷이라고는 물들인 질긴 군복이 유행을 달리던 시절의 이야기니 못해도 시간의 수레바퀴가 한 갑자는 지난 시절의 일일 것이다. 70년대만 해도 동대문 군용시장 골목을 털면 1개 사단의 장병은 입힐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런 시절의 반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어떤 곳에서는 시간은 이렇게 느리게도 흐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옆에 난 철물골목은 소위 ‘종로 100년 시장’이다. 가마솥에 목공 공구와 붕어빵 틀까지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물건들이 아직도 건재한 골목이다. 이 시장에 골목이 열린 지 100년 됐다는 상가 번영회의 자부심은 점점 위축됐다. 목수들이 수공구를 사기 위해 찾던 가게는 진작 문을 닫았고, 아직도 톱을 갈아주고 조각도를 맞춰주는 업체 몇몇이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대학천의 서점과 함께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고 고마운 집들이다.

그밖에도 이 길목과 연결된 골목들은 사연이 많다. 해가 지면 붉은 등이 켜지고 요즘 시절에도 가야금과 장구 소리가 들리는 야시시한 대폿집 골목도 있고, 시장과 가게에 필요한 생필품과 문구류 가게 골목도 있다. 천을 자르던 천막집 주인은 “여기가 예전에 경기도 신장과 의정부 쪽에서 오는 버스 종점이었다. 때문에 군용물품도 많이 들어오고 등산용품이나 천막 도매상들도 많았다. 조금씩 변해가지만 많이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천 책방골목과 생선구이 골목, 군용물품 시장골목, 백년시장 골목은 우리 현대사의 압축판이다. 세월은 흐르고 길은 변해간다. 어제 마주쳤던 골목의 모습을 내일 또 보리라는 약속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그 길을 걸어가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골목 내시경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