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추념식에 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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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형무소에서 고초 겪고 90대 ‘할망’이 되어 재회한 수형인 피해자들

1949년 1월, 제주도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24살 송순희, 23살 오계춘, 21살 변연옥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배에 태워졌다. 이들은 직전까지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주정공장에 갇혀 있었다. 변연옥은 송순희를 ‘언니’라고 불렀다. 육지로 보내질지, 아니면 이미 제주에서 숨진 다른 사람들처럼 수장될지 모르는 신세였다.

제주 4·3 71주기를 하루 앞둔 2일 오후, 전주형무소에 함께 수감됐던 송순희 할머니(95, 오른쪽)와 변연옥 할머니(92, 왼쪽)가 70년 만에 다시 만나 제주도의회 의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제주 4·3 71주기를 하루 앞둔 2일 오후, 전주형무소에 함께 수감됐던 송순희 할머니(95, 오른쪽)와 변연옥 할머니(92, 왼쪽)가 70년 만에 다시 만나 제주도의회 의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오계춘과 송순희는 각각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송순희는 세 살 난 아이를 등에 업었고, 오계춘은 열 달 된 아이를 품에 안았다. 갑자기 오계춘이 옆에 앉은 송순희를 툭툭 쳤다. “나 아기 죽었수다.” 아기는 젖을 빨 힘이 없었다. 사실 나올 젖도 없었다. 엄마도 아기도 이미 며칠을 굶은 상태였다.

배가 목포에 도착했다. 오계춘은 죽은 아기를 등에 싸매고 배에서 내렸다. 하지만 금방 들켰다. 경찰은 “죽은 아이는 내려놓고 가라”고 말했다. 오계춘이 경찰에게 아기를 건넸다. 아이를 묻어주지도 못했다. 경찰은 하얗게 눈이 쌓인 경찰서 입구 옆에 죽은 아기를 내려놓았다. 송순희와 변연옥이 우는 오계춘을 달랬다.

71년 만에 공식 초청된 생존 수형인들

이들은 전주형무소로 보내졌다. 바로 제주 4·3 수형인들이다. 전주형무소에서는 송순희의 아이가 죽었다. 간수에게 죽은 아이를 건넸다. 아이는 전주형무소 앞 언덕에 묻혔다. 다른 방에서 다시 만난 송순희는 오계춘을 보자마자 오열했다. 오계춘은 “울지 말라. 나도 살암지 않으냐(살지 않느냐)”고 말하며 송순희를 달랬다.

올해 초 제주도의회는 생존 수형인 28명을 71주기 4·3 추념식에 초청했다. 71년 만의 공식 초청이었다. 송순희와 변연옥, 오계춘은 모두 추념식에 참석한 적이 없다. 참석할 생각도 못했다. 자신의 수감 사실 자체를 가족들에게도 70년 가까이 숨기고 살았다. 이 중 오계춘만 2017년 재심을 신청해 2019년 1월 무죄를 받았다.

추념식을 하루 앞둔 4월 2일, 인천에 사는 송순희 할머니(95)와 안양에 사는 변연옥 할머니(92)가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20대에 잠깐 만났다 헤어져 70년 만에 ‘할망’이 되어 만난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향이 무슨 마을이냐” “나이가 어떻게 되나” “어느 형무소에 끌려갔나” 등의 이야기가 오간 뒤 서로가 주정공장에서부터 목포, 그리고 전주형무소에 갔던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송 할머니는 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때는 처녀였는데 이렇게 늙어버렸다”며 “그래도 죽지 않으니까 만났다”고 말했다. 이들은 제주공항에서 제주도의회로 이동하는 내내 잡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동안 아픈 기억을 꺼내기조차 꺼려하던 할머니들은 버스 안에서 ‘아이들을 잃은 이야기’(송순희),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으로 끌려간 이야기’(변연옥) 등을 털어놓았다. 김영란 4·3 도민연대 연구원이 “삼춘, 제주 오기 잘핸?”이라고 묻자 할머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저녁 제주시 한 특급호텔에서 생존 수형인들을 위한 만찬이 열렸다. 적게는 88세, 많게는 97세 이르는 ‘할망’, ‘하르방’이 지팡이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호텔을 찾았다. 이들을 부축한 2세들도 이미 60~70대에 들어섰다. 변 할머니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데 이렇게 고향에 오니 너무 감격스럽다”며 도의장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송 할머니와 변 할머니, 부산에서 온 김정추 할머니(90), 그리고 평생 제주도에 살면서도 올해 1월까지 수감 사실을 숨겨온 김묘생 할머니(92)는 이날 처음으로 다른 피해자들을 만났다. 올해 초까지도 “형무소라니 무슨 소리냐. 나 빨갱이 아니다”라며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던 김묘생 할머니는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을 보자 마음이 놓이는지 처음 만난 기자에게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국무총리와 함께 맨 앞줄에 앉아

만찬이 끝나자 양동윤 4·3 도민연대 공동대표가 71주기 4·3 추념식 일정을 알렸다. “내일 주인공은 우리 할망, 하르방이다. 내일 추념식에서 아나운서가 우리 이름을 부를 거다. 그러면 놀라지 말고 ‘내가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이것들이 이제서야 인정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박수를 치며 “네”라고 대답했고 자식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송 할머니는 4·3 추념식 전날부터 오계춘 할머니를 만날 생각에 잠을 설쳤다. 이들은 만나기 전부터 서로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먼저 재심을 신청한 오 할머니의 사연이 알려지자 송 할머니는 “그 여자 살아있었나? 보고 싶다”고 수차례 가족에게 말했다. 송 할머니가 “제주 가서 송장 치울 일 있느냐”고 하면서도 제주를 찾은 데는 오 할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양 공동대표의 예고처럼 71주기 추념식은 생존 수형인의 고통과 4·3 영령의 억압을 형상화한 퍼포먼스 ‘벽을 넘어서’로 시작됐다. 이어 사회자가 생존 수형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사실상 71년 만에 국가가 이들을 피해자라고 호명한 것이다. 생존 수형인들의 자리는 추념식 제일 앞줄, 이낙연 국무총리의 자리와 함께 마련됐다. 가족들은 그 뒷줄에 앉았다.

추념식이 끝나고 오 할머니와 송 할머니가 만났다. 사람들이 “이 분이 오계춘 할머니”라고 소개하자 송 할머니와 가족들은 울음부터 터뜨렸다. 송 할머니가 “배에서 나하고 같이 앉았잖아. 아기 업고 가다가 (당신 아기는) 배에서 죽고 내 아기는 전주형무소 들어가서 죽고”라고 운을 떼자 오 할머니도 송 할머니를 알아봤다. 각각 휠체어에 앉은 두 할머니는 70년 전처럼 서로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눈물을 훔쳤다. 송 할머니의 둘째 딸 강영숙씨는 “엄마가 오계춘 할머니를 만났을 때 가장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당시의 서러움이 막 북받쳐오르는 것처럼 보였다”며 “하루빨리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받고 싶다. 엄마의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송 할머니, 변 할머니 등을 포함한 생존 수형인 10여명은 올해 상반기 중에 재심을 신청할 예정이다.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4·3 당시 군사재판으로 수감된 사람은 총 2530명이다. 이 중 18명은 2017년 재심을 신청해 2019년 1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재 생존자는 무죄를 선고받은 이들을 포함해 총 28명뿐이고 이들의 평균연령은 90세가 넘는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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