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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시민사회 이어 기업도 ­‘장기 386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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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서강대 교수 논문서 지적 “한국 기업 상층 권력 구성 초유의 일”

“확실히 우리 세대가 운 좋은 세대인 것은 맞다.”

지난 3월 19일, 여의도에서 만난 386 학생운동권 출신의 고참 국회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대학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한 그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정치권으로 ‘존재 이전’을 했다.

한 대기업 신입사원 채용 직무적성검사를 치른 취업준비생들이 고사장을 나서고 있다. / 정지윤 기자

한 대기업 신입사원 채용 직무적성검사를 치른 취업준비생들이 고사장을 나서고 있다. / 정지윤 기자

“학교 다닐 때는 (운동을) 열심히 했거나 적게 했거나,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다 동의했다. 사회참여에 앞장선 세대로서 자부심은 지금도 가지고 있다. 빵(감옥)에 다녀오거나 데모를 하다보면 머리에 든 것이 없으니 정상적인 취업이 어려워야 하는데 1980년대 후반 우리 경제가 호황이었다. 사람이 부족해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다 취업할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경우 서너 개 회사 중 자기가 골라 들어갈 수도 있었던 행운의 세대다. 그렇게 어영부영 일도 배우고, IMF 환란을 겪으면서 위가 날아갔다.”

<주간경향>은 수차례에 걸쳐 ‘장기 386세대’의 도래에 대한 기획을 했다. 여러 세대담론이 나왔지만 진짜 세대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승자독식으로 변한 사회구조의 과실을 독식한 86세대가 한국 사회 의사결정구조의 정점에 올라서게 되면 쉽게 내려오지 않는 장기 지배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에 바탕한 전망이었다. 두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과거 유신세력의 회귀로 대표되는 ‘노인 지배 현상’이 우려되기는 했지만, 진정한 ‘제론토크라시(고령자 지배체제)’는 86세대가 50대를 넘어서 의사결정의 정점에 올라선 시점부터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정권교체. 86세대 정치인이 주축을 이루는 진보정권의 출발과 함께 86세대의 전면 등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되었다.

100대 기업 임원 86세대 ‘과점’ 뚜렷

시민사회 조직과 국회, 정당만 86세대가 과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 3월 초 <한국사회학>에 실은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 논문을 보면 ‘기업 내 386’이 시장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386세대가 유교적 관료제와 결합한 권위주의에 ‘반체제 운동’으로 저항하며 ‘재야’에서부터 대항권력을 구축한 반면, 기업 내 386세대는 1997년 금융위기로 인해 저절로 권력을 강화했다. 금융위기의 ‘폭탄’은 기업 내 86세대를 비켜갔다. ‘의도하지 않은 86세대의 권력 강화’는 86세대의 아래에서도 발생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동안 정규직 사원을 들이지 않았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장기호황기에 대규모로 입사한 86세대에 비해, 그 아래 세대는 대폭 줄어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돼 입사하게 된다. 이제 86세대는 위와 아래가 잘려나간 조직에 ‘거대한 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으로 남게 됐다.

논문에서 이 교수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이 ‘기업 내 86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을 추적했다. 1998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 100대 기업의 임원(상무이사 이상 대표이사까지) 9만3000여명의 세대별 분포와 시기별 변화를 살펴보면 2000년대 초반 임원의 8.9%에 불과했던 이들 세대는 다음 10년엔 60.3%까지 치솟는다. 여기까지는 이전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바로 전 세대(1950년대생)나 1990년대 후반 1945~55년생의 비율도 각각 60%, 62%로 엇비슷했다.

그런데 2017년 자료를 살펴보면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자리를 물려주는 연공제 순환 패턴’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이전 세대들이 보통 50대 초·중반에 정점을 찍고 50대 후반부터 급속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데 비해, 1960~64년생들은 2010년대 초·중반에 40%를 돌파한 후, 후반이 되어도 37%를 차지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임원진에 진입한 386 후반부 세대 역시 35%를 차지하며 이들의 임원진 장악률은 70%를 훌쩍 넘긴다. 50대와 60대의 임원진 비율은 정치권에서 동일 세대의 국회 장악률(83%)보다 많은 86%에 달한다. 이를 두고 “한국 기업 상층 권력 구성의 역사에서 초유의 일”이라고 이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세대연대 민주화 과실 독점한 86세대

이 ‘자리 독점’의 직접적인 희생자는 바로 아랫세대인 40대다. 2010년 후반 이들의 임원 비율은 9.4%로, 86세대가 ‘40대’일 때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여기에 정치권 데이터를 더하면 “86세대는 근 20년에 걸쳐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 자리를 장기 독점하고 있고 아랫세대의 성장은 그만큼 지체되고 있다”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임원만이 아니다. 노동시장 근속연수도 마찬가지다. 경제활동 부가조사에 포함된 근속연수를 다시 세대별로 나눠 평균값을 내보면 86세대와 여타 세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실제 IMF 외환위기 때문에 노동시장 진입의 문이 좁아진 아랫세대의 근속연수는 짧을 수밖에 없다. 이 교수에 따르면 86세대는 “안정적인 연공시스템의 유지를 통해 ‘조직에 붙어 있기만 하면’ 퇴직 직전까지 평균 근속연수가 25년에 육박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소득상승률과 점유율 역시 86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운’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 교수의 결론이다.(인터뷰 참조)

다수의 전문가들은 1997년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DJ) 정권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연대로 규정했다. 이른바 ‘DJT연대’라는 개념이다.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김종필·박태준을 산업화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봤다. ‘코호트’로 치환하면 산업화 세력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 초반 출생자로 구성된 세대연대다. 86세대는 이후 세대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세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대안적 세대연대를 구축했고, 2002년 2030 투표전략은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 시기 2050 투표 블록으로 확대됐다. 86세대가 이들 세대 네트워크의 ‘핵심 내부자그룹’이 됐다. 세대연대의 과실이 특정 세대, 특정 네트워크 집단에 의해 독점되기 시작한 것이다.

[포커스]정치권·시민사회 이어 기업도 ­‘장기 386시대’?

이런 특정 세대의 점유가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졌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특정 세대의 ‘점유’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 사회의 독특한 내부 논리인 유교연공사회의 대전제인 세대 간 ‘세대교체’의 룰을 무너뜨렸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86세대의 아랫세대의 몫으로 돌아갔다. 실제 이 교수가 분석대상으로 삼았던 100대 기업에서 일하는 ‘포스트 86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서울 광화문에 있는 대기업 팀장인 ㄱ씨(49)는 18년차 부장이다. 6개월 방위로 군복무를 마쳐 취업이 입사 동기들보다 3~4년 빨라 부장 직함도 일찍 달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아들과 초등학생인 딸이 있다. 약 10년 뒤면 정년이다. 아직 자녀 교육에 상당한 비용이 나갈 때여서 고민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부장까지는 연차에 따른 진급이지만 임원, 그러니까 상무 내지는 전무 단계부터는 네트워크다. 실력만 가지고는 진급이 쉽지 않다. 이런저런 연고나 인연을 바탕으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줄이 없는 사람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1967~68년생 동기들과 1년에 한 번씩 모임을 하는데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다 뒤에서는 그런 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썩은 동아줄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봐야 알 수 있지만…. 일만 잘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네트워크를 안 만들어 왔다. 돌이켜보면 조금 후회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서울 역삼동에서 만난 또 다른 대기업 팀장 ㄴ씨(50)는 “진짜 ‘세대문제’는 윗세대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회사에 들어오는 젊은 세대가 과거의 자신 세대와 너무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새로 들어온 애들을 보면 상당수가 이곳(역삼동)에서 반경 5㎞ 내에서 태어나 강남을 생활공간으로 해왔다. 내가 이 회사를 들어올 때만 해도 안 그랬다. 나만 해도 16평 다세대주택에서 시작했는데 요즘 애들은 30평대 아파트가 기반이다. 회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다는 친구들을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면 우리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이유들이다. 그만두고 한다는 일? 태반이 공무원시험 준비다.”

<주간경향>이 만난 100대 기업 근무 인사들은 “자신이 입사할 때에 비해 조직의 상층이 비대해지는 역삼각형 구조가 된 것은 사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86세대 장기 독점 깨질 가능성은

광화문에 있는 다른 대기업 팀장 ㄷ씨(51)는 외환위기로 인한 고용구조의 변화와 함께 ‘강성노조’의 등장을 그 이유로 들었다. “노동조합은 사회적 약자라는 시선이 일반적이고, 진보정부이다보니 노동정책 기조도 기본적으로 조합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장에서 겪다보면 진짜 갑은 그 사람들(노조)이다. 회사는 이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하고, 또 동년배로 임금인상의 성과는 사무직도 나누는 것이다보니 임금인상을 두고는 싸우는 척하면서도 속마음은 엇비슷하다. 임금이 높다보니 자연스럽게 뽑는 사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역삼각형 조직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 위에 지시하는 사람만 켜켜이 있는 구조다. 이런 구조가 계속되면 ‘한국 경제에 내일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치영역뿐 아니라 기업, 경제영역에서도 뚜렷한 추세가 된 ‘86세대의 장기 독점’이 깨질 계기는 있을까. 이 교수는 “외환위기에 필적하는 거대한 변환이 오기 전에 이 구조가 변하기를 기대하긴 힘들다”고 말한다. “유일한 길은 86세대 안에서 ‘이런 식으로 사회를 끌고 가선 안 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만들어져 그것의 해소를 위한 정치력과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것인데 역시 쉽지 않다. 재벌기업의 경우, 재벌 소유주가 3세에서 4세로 넘어가면서 임원진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경우가 있지만 전근대적이다. 핵심은 세대에 의한 순환구조가 아닌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조직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료화’된 조직구조에서 탈피해 다양한 조직구조 실험이 가능해야 한다.”

전효관 전 서울시 혁신기획관은 “모든 원인을 세대 변수로 볼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86세대가 자원을 많이 가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분배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습자본주의나 기득권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는 공감대에 기반한 움직임은 당분간 386 중심의 정당, 조직문화와 충돌하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계기가 주어지면 사회 전환의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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