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로열 로드’의 끝과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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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은행 천하’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아산 우리은행은 지난 3월 18일 충남 아산 이순신체육관에서 열린 2018~2019 여자프로농구 플레이오프(3전2선승) 3차전에서 용인 삼성생명에 68-75로 패하며 시리즈 전적 1승2패로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했다. 2012~2013시즌부터 내리 6시즌 연속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우승에 성공하며 ‘통합 6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우리은행이었기에 이번 플레이오프 탈락은 그 충격이 크다.

여자농구 우리은행 박혜진(가운데)이 2018년 11월 3일 충남 아산 이순신체육관에서 열린 신한은행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승리한 뒤 박수를 치며 팀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 WKBL 제공

여자농구 우리은행 박혜진(가운데)이 2018년 11월 3일 충남 아산 이순신체육관에서 열린 신한은행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승리한 뒤 박수를 치며 팀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 WKBL 제공

하지만 우리은행은 지난 6년간 역대 여자프로농구 그 어떤 팀도 해내지 못할 만큼 엄청나고 화려한 업적을 쌓았다. 6년 동안 우리은행이 걸어온 ‘로열 로드’를 다시 짚어본다.

프롤로그: 위기의 제국

통합 6연패 이전에도 우리은행은 ‘명가’에 속하는 팀이었다. 여자프로농구(WKBL)가 출범한 1998년 이후, 우리은행은 4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위용을 떨쳤다.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그 시기, 우리은행은 ‘특급 외국인 선수’ 타미카 캐칭에 김은혜, 이종애, 홍현희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호흡을 맞추면서 2000년대 중반을 호령했다.

잘나가던 우리은행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2007년. 당시 우리은행의 사령탑이었던 박명수 감독의 성추행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은행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2011년 김광은 감독의 선수 폭행 사건까지 불거지면서 우리은행은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의 터널로 추락했다. 통합 시즌 시대가 시작된 2007~2008시즌부터 2011~2012시즌까지 우리은행은 5-6-6-6-6이라는 최악의 순위를 찍었다.

#1 어둠 속에 비치는 서광

2012~2013시즌을 앞두고 우리은행은 큰 결단을 내렸다. 당시 ‘레알 신한’이라 불리며 WKBL의 무적함대로 군림했던 안산 신한은행(현 인천 신한은행)의 위성우 코치를 신임 감독으로 임명한 것이다. 위 감독과 함께 역시 신한은행 코치였던 전주원마저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임달식 신한은행 감독 밑에서 코치 수업을 했던 위 감독이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초보자였다. 그런 그에게 4시즌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고 일련의 사건으로 분위기마저 최악이었던 우리은행 감독직은 분명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위 감독은 비시즌에 친분도 없던 전창진 전 부산 KT 감독까지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등 여러모로 공부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답, ‘독한 훈련’을 찾았다. “선수들의 패배의식을 지워버리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강한 훈련뿐이었다”는 게 당시 위 감독이 내린 결론이었다.

2012년 7월 전님 여수 전지훈련은 그 서막이었다. 계속 반복되는 러닝과 체력 훈련에 선수들은 파김치가 됐다. 전지훈련을 마치고 서울 장위동 숙소로 돌아와서도 강훈련은 계속됐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위 감독은 오후 9시 넘어서까지 훈련을 하며 선수들을 몰아붙였다. 선수들이 훈련 후 숙소에 들어가 위 감독 뒷담화를 한다든가, 퇴근시간이 늦어진 식당 아주머니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는 등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위 감독은 훈련에서만큼은 한 치의 타협도 허락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으로 쌓인 선수들의 불만은 전 코치가 어루만지고 달랬다.

강훈련은 선수들을 독하게 만들었다. 이를 악물고 훈련을 하면서 선수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던 패배의식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 대신 ‘성실한 훈련과 땀은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철도 두들기면 강해지듯 그렇게 우리은행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2 왕조의 시작

2012~2013시즌을 맞는 우리은행을 바라보는 다른 팀들의 시선은 이전에 그랬듯 ‘승점 자판기’였다. 겉으로 드러난 스타 선수들도 없고, 심지어 감독은 코치 경험만 있는 초짜였다. 당시 우리은행의 연고지는 강원도 춘천이었는데, “춘천 가면 닭갈비나 먹자”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로 우리은행을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다.

2012년 10월 12일 우리은행과 구리 KDB생명(현 OK저축은행)의 개막전. 이경은, 신정자, 한채진 등이 버티고 있는 KDB생명은 당시만 하더라도 신한은행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팀으로 꼽힐 만큼 전력이 탄탄했다. 하지만 우리은행은 그런 KDB생명에 65-56으로 승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첫 8경기에서 거둔 성적은 6승2패.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초반에 잠깐이겠지’라는 생각을 거두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확실하게 바뀐 것은 11월 10일 신한은행전이었다. 첫 대결에서 18점 차 완패(48-66)를 당했던 우리은행이었기에 신한은행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우리은행은 그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경기에서 74-52, 22점 차 대승을 거두면서 신한은행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미풍은 돌풍이 됐고, 결국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챔피언결정전에서 신한은행을 꺾고 올라온 삼성생명을 3경기 만에 돌려세우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이야기는 우리가 본 그대로다. 우리은행은 2017~2018시즌까지 통합 6연패를 달성하며 왕조를 구축했다. 2016~2017시즌에는 경쟁 팀들의 전력 약화와 맞물려 33승2패, 승률 0.943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위 감독이 부임할 때만 하더라도 별 볼일 없었던 박혜진과 임영희는 국가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원으로 성장했다. 챔피언결정전 우승 후 펼치는 ‘감독 밟기 세리머니’는 우리은행 고유의 문화가 됐다.

#3왕조 구축 어떻게 했나

기자는 우리은행의 5~6번째 통합우승 현장을 함께했다. 당시 뒤풀이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우리은행이라는 팀이 왜 강한지 스스로 생각해봤다.

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우리은행도 그저 때를 잘 만나서 왕조를 구축한 것이 아니다. 위 감독도 좋은 지도자이고, 박혜진과 임영희 같은 선수들도 기본 기량이 있었던 선수들이었기에 지금의 위치까지 성장할 수 있었지만 단순히 평가하기엔 그들이 흘려왔던 땀과 눈물은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우리은행이 왕조를 구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팀 구성원들 사이에 굳건한 ‘신뢰’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을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위 감독과 전 코치가 부임한 뒤 우리은행은 ‘하드웨어’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극한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그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한 뛰어난 선수들은 우리은행 왕조를 만든 핵심 ‘부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하드웨어가 뛰어나도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특히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를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백신’은 현대 컴퓨터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소프트웨어다.

스포츠 구단의 바이러스란 선수들이 가질 수 있는 불만, 시기, 그리고 동기부여 같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은행은 이를 슬기롭게 잘 헤쳐왔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해왔던 선수들은 물론 새로 가세한 선수들까지 심리적으로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최고참 임영희가 중심이 된 선수들은 ‘신뢰’라는 단어 아래 똘똘 뭉쳐 온갖 위기를 헤쳐나갔다. 그 과정에서 신뢰는 더욱 단단해졌고 그 어떤 위기도 우리은행을 흔들지 못했다.

이적 첫 시즌(2017~2018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고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던 김정은이 “선수로 가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다른 팀에서 우승을 했다면 이렇게 감격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정말 좋은 팀을 만나서 더 값진 것 같다”고 말한 것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다.

에필로그: 우리은행 시대, 끝이 아니다

역사 속의 그 어떤 왕조도 영원하지 못했다.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다. 뉴욕 양키스 같은 명문 구단도 암흑기가 있었고, 시카고 불스 또한 마이클 조던 시대의 영광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

통합 6연패에서 여정을 마친 우리은행의 시대도 끝난 것일까. 냉정하게 따져보면, 우리은행이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은 당분간 희박하다. 13년 만의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창단 첫 통합 우승에 도전하는 청주 KB는 박지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만들 준비를 마쳤다. 임영희까지 은퇴를 선언한 지금, 우리은행의 전력으로 KB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우승은 어렵더라도 정상권 전력은 충분히 가능하다. 박혜진, 김정은이 건재하며 최은실이 중심이 되는 식스맨의 전력도 나쁘지 않다. 여기에 올해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뽑은 박지현은 잘 가다듬으면 미래 우리은행의 새 구심점이 될 선수다. 어차피 해는 뜨면 지고, 또 뜨기를 반복한다. 이번에는 챔피언결정전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우리은행의 미래는 절대 비관적이지 않다.

<윤은용 스포츠부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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