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

문동환 박사님에 대한 소소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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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과분한 복을 받으며 살았다. 그 가운데서도 문동환 박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한 것은 내 일생에 가장 빛나는 행운이다. 그 이는 늘 공의를 앞세우고, 사사로운 것은 비웠다. 언제나 굵고 맑고 곧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했지만, 불의 앞에서는 서릿발처럼 단호했다. 개인사와 공적인 삶이 일치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왜 사랑이 우선이고, 지혜롭고 착하며 바른 것보다 어진 것이 으뜸인지, 나는 이 분에게서 보고 배웠다. 그의 빛나는 학문적 업적과 사회기여를 이 지면에 담기에는 턱없다.

[김형완의 눈]문동환 박사님에 대한 소소한 기억

문 박사님은 어느 날 내게 “김 선생, 이거 해직기간 동안 교수 월급 정산된 건데, 어디 좋은 데 쓸 일 있을지 알아봐요” 하며 두툼한 봉투를 툭 건네셨다. 그 모습이 하도 무심해서 나는 무슨 서류봉투쯤이나 되는 줄 알았다. 들여다보니 수표로 수백만 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수천만 원쯤 될 것이다. 이 돈은 당시 어려움을 겪던 ‘민중교회연합’에 전달됐는데, 그리 되기까지 어떻게, 누구에게, 왜, 언제 따위의 물음이나 확인이 일절 없었다. 아마 내가 슬쩍 가로챘어도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이리 했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는 잘했다, 딱 한마디 하셨을 뿐이다. 내가 다 허전할 정도였다.

어쩌다 자택을 방문하면 당신이 손수 밥상을 차리고, 차를 끓이고는 하셨다. 1989년 장남 결혼식 참석차 출국할 때의 일이다. 평소 권위주의를 극도로 싫어하신 탓에 짐을 둘러멘 채 직접 출국수속을 밟다가, 일간신문에 흡사 ‘야반도주’하는 것처럼 사진이 찍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국회의원이면 당연히 공항 귀빈실을 이용하고, 출국수속도 비서가 대신할 텐데 일반게이트에서 직접 수속을 밟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이유로 공안당국이 기획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공안정국과 권위주의 시대였다.

그 이듬해 3당 합당에 반대해 의원직 총사퇴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보좌진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느 날 식사라도 한 번 하자고 연락을 해오셨다. 식사를 마치자 “우리 한강 가서 보트 탈까?”라고 하셨다. 세상에, 한강에서 보트라니! 아마도 고심 끝에 짜낸 당신 나름의 위로였으리라. 그해 봄 우린 한강의 물살을 가르는 모터보트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지난해 가을, 가깝게 지내는 몇 사람과 병석에 계신 문 박사님을 찾았을 때 ”여전히 생각은 많은데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당신들과 이렇게 얘기라도 나눠서 좋다”는 말씀에 그만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영원히 곁에 계실 줄로만 여겼던 어른을 보내드려야 할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 봄의 문턱에서 마침내 내 삶의 큰 별은 하늘에 자릴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권력을 향해, 제 사사로움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여겨 아귀처럼 들고 뛰는 이가 천지인 세상에 이런 분을 가까이 모시고 일했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오늘 밤 하늘의 빛나는 별을 다시금 우러러 봐야겠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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