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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줄면 경쟁력 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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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0시간 시행 이후 10인 이상 제조업체 1인당 연간 실질 부가가치 산출 1.5% 향상

지난 3월 10일 시가총액 1조원의 연예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 박진영 대표의 일과표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공개됐다. 30분 단위로 시간 활용 계획를 짠 박 대표는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지퍼와 단추, 허리끈을 채우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고무줄 바지를 입고 배변시간까지 정해둔다. 분초를 다투는 박 대표의 일과는 시간 투자가 성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짜여진 결과물이다.

/ 일러스트 김상민

/ 일러스트 김상민

박 대표의 시간 관리법을 노동자에게 적용한다면 어떨까. 낭비되는 시간을 절약해 노동시간을 늘리면 경쟁력이 생길까. 그렇다면 반대로 노동시간을 줄이면 경쟁력은 떨어질까.

패러다임의 전환 주5일 근무

1960~70년대 공단 노동자들은 밥 먹을 시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터로 내몰렸다. 1953년 도입된 근로기준법은 노동시간을 ‘1일 8시간, 1주 48시간’으로 규정했지만 현장은 무법천지였다. 노동자들은 ‘번개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작업장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선관 시인은 1979년 발표한 <번개식당을 아시나요>에서 당시 노동자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누구는 공순이라 부르는데 /그 지역 정문 아닌 후문에 /정오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동식 포장마차 대열 /거기에 차려놓은 /번개식당의 다양한 메뉴 /1분 막국수 2분 짜장면 3분 김밥.’

이후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노동시간을 줄여왔다. 근로기준법이 생긴 지 36년 만인 1989년, 주 44시간제로 법이 개정됐다.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할 때마다 재계와 경영진은 생산성 악화로 경쟁력을 잃게 된다며 반발했다. 양측이 가장 격렬하게 맞붙었던 시기는 ‘주5일 근무제’ 도입을 추진한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2000년 국내 노동자들의 1년 평균 노동시간은 2474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1000시간 더 길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은 산업 선진화가 된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인 반면 산업재해율은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생산성 저하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노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주5일 근무제 도입으로 비정상적인 노동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경련과 경총 등 경제단체는 이번에도 경쟁력 약화를 이유로 주5일 근무제 도입에 반대했다.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려면 월차·생리휴가 폐지와 주휴 무급화와 같은 사용자를 위한 ‘당근’을 달라며 맞섰다. 보수언론과 경제매체도 ‘주5일 근무제 도입은 시기상조’라며 재계 주장에 힘을 실었다.

주5일 근무제를 둘러싼 지난한 갈등과 공방전이 이어졌다. 노·사·정 합의 결렬 등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2004년 7월 현행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생산비용 부담 증가로 인한 생산물 가격 인상이 국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재계의 예측은 빗나갔다. 2017년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근로시간 단축이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근로시간 단축정책(주 40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10인 이상 제조업체의 노동생산성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자 1인당 연간 실질 부가가치 산출이 1.5% 향상된 것이다.

그럼에도 국내 노동환경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7년 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연평균 근로시간은 2024시간으로, OECD 평균(2016년 기준)인 1763시간보다 261시간이 길다. 2000년 연평균 노동시간 2474시간보다는 450시간 줄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7월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도 연간 노동시간 감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월에 발표한 ‘2019년 1월 사업체 노동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노동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1967시간으로 조사됐다. 1967시간은 전년(1996시간)보다 29시간(1.4%) 감소한 수치. 주 52시간제가 노동시간 단축에 큰 효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계는 지난 2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기로 합의하면서 노동시간 단축이 더욱 요원해졌다고 본다.

/ 경향DB

/ 경향DB

돈 대신 저녁을 택할 수 있을까

단위기간이 6개월로 확대되면서 6개월 연속으로 주 64시간(법정근로시간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노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가 회사에서 합법적으로 야근을 시킬 수 있는 우회로를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경사노위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 공익위원으로 참여한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지난 3월 7일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관련 토론회에서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안은 예외조항이 불명료하고 내용의 애매함이 있다”며 “장시간 노동체계가 정착된 가운데 사용자들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무한정 쓰려 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노동계에서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하 금융노조)을 중심으로 주 4일 근무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금융노조는 지난 1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주 4일 근무제 도입을 장기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노조가 2017년 7월 국내 14개 은행에서 일하는 조합원 3만4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노동환경 조사에 따르면 은행원의 연간 노동시간은 2350시간으로 OECD 기준 2017년 한국 평균 노동시간(2024시간)보다 300시간 이상 길다. 금융노조가 주 4일제 연구용역과 여론 확산작업을 벌이는 이유다.

하지만 금융노조의 주 4일 근무제는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 가장 큰 벽은 ‘임금’이다. 현재의 임금체계는 시간이 돈이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장시간 노동을 해야 더 많은 소득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다. 예전처럼 사용자가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기보다는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일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노동자가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가 된 셈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저서 <피로사회>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노동시간이 줄면 임금도 줄어드는 구조”라며 “조합원들이 돈과 시간을 바꿀 준비가 됐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0년 5월 종묘공원에서 민주노총이 주5일 근무 시위를 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2000년 5월 종묘공원에서 민주노총이 주5일 근무 시위를 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이 때문에 노동계에서는 법정 노동시간 단축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기존의 운동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노동-자본의 권력관계가 변함에 따라 법과 제도에 기댄 일괄적인 노동시간 단축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최민 노동시간센터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제도를 통해 노동시간의 양을 줄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다양한 고용형태가 있는 상황에서 일률적인 시간 단축은 한계가 있다”며 “노동시간을 노동자 스스로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시간 단축운동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노동시간 단축, 사회보장제도와 묶어 장기 플랜 세워야”

‘시간빈곤’은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가난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생활과 충분한 휴식, 여가시간을 갖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배분하고 사용할지에 대한 통제권과 자기결정권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시간빈곤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노동연구원 김승택 선임연구위원에게 노동시간 단축과 시간빈곤 해결을 위한 방안을 들어봤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시간빈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시간빈곤은 회사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일 수 있고, 한편으로 회사 일 외에 가사나 육아 같은 다른 일도 많아 여가에 투입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생긴다. 개인이 ‘워커홀릭(일 중독)’이라서가 아니라, 회사가 일을 많이 시켜서 일이 많은 경우라면 법정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해소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가사와 돌봄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사회 공공서비스도 확충해야 한다.”

-기업에서 초과근로가 만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간에 대한 선호, 즉 여가에 대한 선호보다 돈을 벌겠다는 욕구가 크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경우 임금이 높은 사람들이 오히려 초과근무를 더 원한다. 기업 입장에서도 신규채용으로 고용보험과 4대보험 등의 비용을 지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초과근로를 원한다. 직장 내 장시간 노동은 집단주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점점 사라지고 있으나 같이 회의하고, 밥먹고, 일을 해야 하는 문화, 상습적으로 초과근로를 하는 문화가 없어지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여가시간을 더 중시하는 직원들의 비중이 커질수록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방안은?

“4차 산업혁명으로 미래에 일자리가 줄어들면 높은 임금을 받는 ‘고생산 전문직’과 ‘저생산 저임금’ 일자리로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사회보장이 확실히 갖춰지지 않는 한 장시간 일해야 소득을 유지할 수 있다. 저임금 상태에서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하면 그 정도로 일해선 먹고살 수 없는 사람들의 노동수요를 오히려 외면하게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해 사회보장제도 확충을 위한 재정정책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구조조정을 포함한 산업·경제정책을 포괄적으로 논의해야 전체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할 첫 번째 일도 바로 이런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와 사회보장제도, 실업보조 등을 묶어 장기 플랜을 마련하지 않고 닥치는 일만 하나씩 해결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생기는 부작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시 임금은 어떻게 조정해야 하나?

“포괄임금제를 시행하던 사업체의 경우라면 초과근로 여부와 상관없이 임금을 주기 때문에 노동시간을 단축한다고 이(임금)를 줄일 수는 없다. 한편, 초과근로를 일이 생겼을 때만 하고 그때마다 수당을 주는 곳이라면 노동시간 단축으로 초과근로가 줄면 당연히 그 수당이 줄어든다. 근로자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 두 가지 경우를 섞어서 몽땅 임금을 줄여야 한다거나 줄일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노사가 각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꼴이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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