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회계 감독, 법은 멀고 시행규칙은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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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국회 통과 앞서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 개정으로 에듀 파인 도입 의무화

법이 셀까? 시행규칙이 셀까?

우리나라 법 체계는 헌법-법률-시행령(대통령령)-시행규칙(총리령·부령)-조례 순으로 돼 있다. 시행규칙은 법률보다 두 단계나 아래다. 법률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사립유치원 개학 연기 사태에서는 시행규칙만으로도 정부·여당이 사실상 기선을 잡았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 관계자들이 2월 25일 국회 앞에서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과 정부의 유아교육법 시행령 개정안 반대 총궐기대회를 열고 손팻말을 흔들고 있다./이준헌 기자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 관계자들이 2월 25일 국회 앞에서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과 정부의 유아교육법 시행령 개정안 반대 총궐기대회를 열고 손팻말을 흔들고 있다./이준헌 기자

지난해 국회에서는 유아교육법 개정안을 통해 사립유치원에서의 국가관리회계시스템(에듀 파인) 도입을 의무화하려고 했으나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지난해 말 이 법은 국회 신속처리안건지정(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돼 본회의 통과까지는 330일이라는 기간을 아직도 기다려야 한다.

이런 가운데 교육부는 시행규칙으로 에듀 파인 도입을 의무화했다. 그리고 사립유치원의 개학 연기 사태가 벌어졌다. 유아교육법 개정안 통과에 반대했던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는 법이 아닌 시행규칙에 ‘백기 투항’으로 손을 들었다. 이로써 사립유치원의 개학 연기 사태가 종료됐다.

학부모들의 집단 행동에 한유총 백기

시행규칙의 정확한 명칭은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 일부 개정안이다. 지난 2월 25일 공포됐으며, 3월 1일부터 시행됐다. 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은 제53조 3항을 개정한 것이다. 교육부 장관이 지정하는 정보 처리장치로 회계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예외조항을 손질했다.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인건비 및 학교운영비에 한정한다)을 받지 아니하는 학교와 유치원’이라는 기존 시행규칙의 예외조항에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인건비 및 학교운영비에 한정한다)을 받지 않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각종 학교 또는 외국인 유치원’으로 바꿨다. 사립유치원이 예외에 포함돼 있었지만 의무적으로 에듀 파인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 개정안을 바탕으로 교육부는 3월 1일부터 200명 이상 규모의 사립유치원에는 에듀 파인 도입을 의무화했다. 내년 3월에는 모든 유치원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시행규칙 외에도 시행령이 대기하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해 12월 17일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과 함께 유아교육법 시행령을 입법 예고했다. 유아 학습권 보호를 위해 폐쇄일자를 ‘매 학년도 말일’로 명시한 시행령은 현재 정부 국무조정실의 규제 심사를 받고 있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시행령은 4월 중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은 사립학교법에 따른 회계 관련 업무에 속하기 때문에 교육부령으로 개정됐다”고 말했다. 시행령이 아닌 시행규칙이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유총의 백기 투항은 유치원 학부모들의 항의가 결정적이었다. 여론은 한유총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갔다. 지난해 사립유치원에 대한 시·도교육청의 감사결과가 공개되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샀기 때문이다. 한국당의 한 의원 측은 “그동안 지원금과 보조금을 사립유치원에 주면서 제대로 된 체계를 잡지 못한 교육부가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면서도 “한유총 역시 억울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 정서에 눈높이를 맞춰 현장에 대한 이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강경투쟁만 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참에 지난해 말 국회에서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된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을 해당 상임위인 교육위를 통해 빠르게 통과시킬 계획이다. 지난해 말 민주당은 교육위에서 바른미래당과 손을 잡고 ‘유치원 3법’을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했다. 상임위에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된다. 해당 상임위에서 180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90일, 본회의에서 60일이 각각 지나면 자동 상정돼 법안 처리에는 최장 330일이 소요된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패스트 트랙의 330일을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앞당겨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말했다.

3월 4일 유치원 문을 열지 않은 서울 도봉구의 한 유치원 출입구에 강북교육청 장학사가 시정명령서를 붙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3월 4일 유치원 문을 열지 않은 서울 도봉구의 한 유치원 출입구에 강북교육청 장학사가 시정명령서를 붙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유치원 3법’은 ‘박용진 3법’으로도 불린다. 이 법을 발의한 박용진 민주당 의원(교육위)은 “패스트 트랙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3월 임시국회부터 시작해 빨리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며 “패스트 트랙으로 하면 11월 22일인데 지금 빨리 당기더라도 8월에야 국회를 통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패스트 트랙으로 처리해도 330일 걸려

패스트 트랙에 지정된 ‘유치원 3법’ 개정안은 박 의원이 낸 원안에서 수정된 바른미래당 임재훈 의원(교육위)의 수정안이다. 수정안에는 형사처벌 유예기간이 1년으로 돼 있다. 박 의원은 “패스트 트랙으로 본회의에 상정되면 재수정안을 내 유예기간 1년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패스트 트랙 1호 법안인 사회적 참사법 역시 본회의에서 새로운 수정안이 통과된 전례가 있다는 것이다.

시행규칙에는 에듀 파인 도입을 이행하지 않을 때 처벌조항이 없고, 행정처분이 있다. 200명 이상의 사립유치원에서 에듀 파인을 도입하지 않으면 유아교육법 제30조에 의해 교육관계법령 위반으로 시정명령 및 행정처분(시정명령 불이행) 대상이 된다.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대통령령에 따라 유치원의 정원 감축, 학급 감축, 유아모집 정지, 차등적인 재정지원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다.

다만 한유총의 개학 연기 방침에 따라 여러 유치원이 교육을 하지 않을 경우 다른 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시민단체인 ‘정치하는엄마들’ 회원들은 3월 5일 한유총에 대해 ▲공정거래법 ▲유아교육법 ▲아동복지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된 ‘유치원 3법’의 개정안에서도 에듀 파인 의무화는 있지만 처벌조항은 없다. 교비를 교육 목적 외 사용 시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형사처벌한다고 규정돼 있다. 한국당은 처음부터 형사처벌을 반대해왔다.

법에 앞서 시행규칙에 에듀 파인 의무화가 명시된 데에는 교육부의 초강수 대처가 있었다. 박용진 의원이 발의한 ‘유치원 3법’ 개정안이 교육위 법안소위에서 논란 끝에 계속 유예되자, 교육부는 지난해 10월 ‘유치원 공공성 강화방안’을 발표했다. 에듀 파인 도입 의무화를 위해 시행규칙 개정과 법안 개정을 병행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를 두고 역시 교육위 법안소위에서는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지난해 12월 20일 교육위 법안소위에서 한국당은 법 개정이 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면 왜 국회에서 에듀 파인 의무화 개정안을 놓고 입씨름을 해야 하느냐며 교육부를 질책했다. 박백범 교육부 차관은 답변을 통해 “행정적인 조치로 시행령을 개정해서 하지만 국민의 의무와 관련되므로 법에 확실하게 의무조항을 두는 게 좋다고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과 시행규칙의 차이에 대해 박 의원은 “이미 보수정부를 거쳐오면서 민주당 정부에서 만들었던 것들이 바뀌는 현실을 보아왔다”며 “결국 법으로 명시해야 다음 정부에서도 임의로 바꿀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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