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새로운 잔디 실험 뿌리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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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설관리공단이 궁리 끝에 찾아낸 묘수가 히팅&쿨링시스템이다. 여름에는 겨울철과는 반대로 차가운 냉수를 순환시켜 뿌리가 단단히 자리잡도록 돕는 것이다.

“페인트라도 뿌린 걸까요?”

프로축구 K리그1 FC서울과 포항 스틸러스가 개막전을 치른 지난 3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 경기장 한쪽의 잔디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히팅&쿨링시스템이 설치된 서울 월드컵경기장. 남측 골대의 잔디만 한 겨울에도 눈이 녹아 있다. / 서울시설관리공단 제공

히팅&쿨링시스템이 설치된 서울 월드컵경기장. 남측 골대의 잔디만 한 겨울에도 눈이 녹아 있다. / 서울시설관리공단 제공

봄바람이 살랑일 이 무렵이면 매서운 한겨울을 힘겹게 견뎌내느라 노랗게 물든 잔디를 보는 것이 익숙하건만, 남측 골대 부근 잔디만 푸른빛이 도드라졌다. 오랜만에 홈구장을 찾은 서울 팬들도 이색적인 풍경에 쉽게 눈을 떼지 못했을 정도다. FC서울의 한 관계자는 “한국 축구의 새로운 잔디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이라며 “잘하면 매년 여름철 골머리를 앓게 만들던 논두렁 잔디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고 귀띔했다.

국내 처음 시도된 ‘히팅&쿨링시스템’

‘나홀로 푸른’ 잔디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관리하는 서울시설관리공단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은 지난해 11월 경기장 일부(20×10m)에 배관을 깔아 온수와 냉수를 순환시키는 ‘히팅&쿨링시스템’을 시험 도입했다. 가정용 난방에 쓰이는 플라스틱 재질의 엑셀파이프를 깊이 25㎝, 폭 25㎝ 간격으로 설치해 잔디 생육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열 온도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겨울에도 경기를 치르는 유럽에선 흔하지만, 국내에선 처음 시도됐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은 한국지역난방공사에서 공급되는 중온수를 열교환기를 통해 잔디에 가장 알맞은 온도로 낮췄다. 한겨울에는 섭씨 약 50도의 온수를 순환시켜 잔디를 추위에서 지켰고, 요즘은 18도로 낮추면서 잔디가 활발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은 지난해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가 끝난 직후 이 시스템을 시험적으로 들여와 잔디의 생육 변화를 꼼꼼히 지켜보고 있다.

첫 단계인 겨울나기는 일단 합격점을 받았다. 색깔만 다른 게 아니라 촘촘하게 들어선 힘찬 잔디가 같은 경기장에서 서로 다른 계절을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FC서울 골키퍼 유상훈은 경기가 끝난 뒤 “반대편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른 것은 못느꼈지만 색깔만 봐도 잘 관리된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심성호 서울시설공단 월드컵경기장 시설팀 차장은 “유럽의 잔디 관리를 벤치마킹하면서 온수의 효과는 어느 정도 예측이 됐고, 그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이 자신들의 실험에 아직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진짜배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아서다. 바로 잔디 관리의 고비라고 할 수 있는 여름나기다.

국내 기후가 점점 아열대처럼 변해가면서 여름철 폭염과 폭우에 노출된 잔디가 엉망이 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됐다. 선수들의 기량이 ‘예술’, 감독의 전술이 ‘연출’이라면 녹빛 그라운드는 ‘무대’에 견줄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축구에선 무대에 불만이 그치지 않는다.

2017년 8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이란과의 2018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에선 처참하게 망가진 그라운드 상태가 공개돼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신태용 전 축구대표팀 감독은 이란전 직후 “잔디가 우리를 너무 힘들게 만들었다. 앞으로 조금 더 잔디가 좋은 곳에서 경기를 하면 훨씬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거센 비판을 받았던 서울시설관리공단이 궁리 끝에 찾아낸 묘수가 히팅&쿨링시스템이다. 여름에는 겨울철과는 반대로 차가운 냉수를 순환시켜 뿌리가 단단히 자리잡도록 돕는 것이다. 심 차장은 “원래 한지형 잔디(켄터키블루그래스 종)의 생육 최적 환경(15~24도)이 사계절인 한국에 맞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사방이 막힌 곳이라 통풍도 되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며 “지난해에는 한여름 땅속 온도가 35도에 달했다. 한국잔디학회에 따르면 30도를 넘으면 잔디 뿌리가 녹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쿨링시스템으로 여름철에도 생육 최적 환경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맞추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다만 서울시설관리공단은 이번 실험이 실패할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

한여름 땅속 온도 낮출 수 있느냐가 관건

유럽에서도 히팅시스템은 흔하지만 쿨링시스템은 찾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온수와 달리 냉수는 전도가 잘 안돼 잔디에 직접적인 영향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쿨링시스템의 연구용역을 꾀했으나 발주가 가능한 전문업체도 전무해 직접 실험에 나서게 됐다. 실험이 성공한다면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서울월드컵경기장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심 차장은 “우리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르면 2021년까지 경기장 전체(115×76m)에 설치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의 실험이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은 예상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잔디 관리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당장 이번 실험에 쓰인 비용이 자재와 인건비를 포함해 400만원 남짓이 전부다. 심 차장은 “서울월드컵경기장 전체에 전면 도입해도 설치비용이 20억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히팅&쿨링시스템에 꼭 필요한 대형 보일러 장비와 열교환기가 이미 설치돼 비용을 줄인 것이지만 대부분 다른 월드컵경기장이나 전용구장도 비슷한 장비가 구비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실험 성공이 향후 다른 경기장의 도입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여름철이면 수도권보다 혹독한 무더위에 잔디 관리에 애를 먹는 남부지방 구단들은 이 실험에 관심이 높다. 프로축구연맹의 한 관계자는 “해마다 잔디가 죽으면 힘겹게 잔디를 다시 구해 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큰 비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히팅&쿨링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비용이 아닌 시간일 수 있다. 이 시스템을 통으로 설치하려면 잔디를 걷어내고, 그 땅까지 파내는 대공사가 필요하다. 공사를 마친 뒤에도 새롭게 파종한 잔디가 뿌리를 내리려면 3개월은 걸린다. 그 시간을 절반에 가까운 1개월에서 50일로 줄일 수 있는 롤잔디 공사(잔디판을 사다가 맞춰서 까는 공법)를 진행하더라도 그 시기를 맞추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프로축구 일정이 끝나는 것에 맞춰 공사를 진행한다면 날씨가 엇박자를 내게 된다. 결국,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는 공사를 각오해야 한다. 잔디 교체를 결정한 팀들이 한동안 홈구장을 옮기거나 원정만 다니는 이유다. 승격 팀인 성남FC도 올해 탄천종합운동장의 잔디공사로 성남종합운동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이용한다.

또 다른 대안은 하이브리드 잔디

잔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은 하이브리드 잔디다. 기존의 천연잔디에 일종의 골조처럼 인조잔디를 활용하는 복합형 잔디로 내구성이 높다. 선수들이 경기를 뛸 때마다 파이고 망가지는 천연잔디와 비교해 회복과 보수도 상대적으로 쉽다. 지난해 러시아월드컵에선 국제축구연맹(FIFA)의 허락을 받아 활용될 정도로 기술이 발전한 상태다.

국내에서는 대한축구협회가 하이브리드 잔디를 처음 도입해 유용성을 점검하고 있다.

협회는 지난해 9월 대표팀 전용 훈련시설인 파주트레이닝센터 백호구장의 천연잔디를 걷어내고 하이브리드 잔디를 설치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백호구장에 설치되는 하이브리드 잔디는 스페인의 팔라우 터프사의 제품으로, 인조잔디를 설치하고 그 위에 천연잔디를 다시 파종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인조잔디 설치가 끝난 가운데 곧 천연잔디 파종이 진행돼 여름철이면 본격적인 사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협회 관계자는 “국내에서 가장 잔디가 잘 관리된다는 파주트레이닝센터도 잔디 관리는 언제나 숙제”라며 “하이브리드 잔디가 효과적이라면 대표팀 훈련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훈련장은 일반 경기장보다 사용빈도가 더 높다. 따라서 하이브리드 잔디가 더 강한 내구성이 요구되는 훈련장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관심사다. 당장 서울시설관리공단도 자신들의 실험과 함께 하이브리드 잔디를 병행하는 보완책을 고려하고 있다. 심 차장은 “서울월드컵경기장 잔디 관리에 도움만 된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며 “우리가 직접 구한 하이브리드 잔디를 심은 채 관찰하고 있다. 히팅&쿨링시스템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최상의 결과일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국 스포츠경향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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