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신청자의 딸은 대학을 마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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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입학했지만 난민지위 인정 못받으면 강제출국 당해

라디아의 아버지는 파키스탄 ‘무타히다 카우미 운동(MQM)’ 당원이었다. 라디아가 14살이 되던 2012년 어느 날, 아버지가 사라졌다. 라디아를 비롯한 여자들은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실종된 지 일주일 만에 발견됐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은 처참했다. 당시 파키스탄 정부는 MQM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라디아는 “당시 정부가 MQM 당원들을 없애라고 명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살아 돌아왔지만 또 다른 형제들이 납치 또는 살해될 수 있었다.

라디아가 2월 1일 부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사무실에서 박상기 법무부 장관에게 쓴 편지글을 보이고 있다. / 류인하 기자

라디아가 2월 1일 부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사무실에서 박상기 법무부 장관에게 쓴 편지글을 보이고 있다. / 류인하 기자

난민 불인정 취소소송 대법원 판결 남아

이들은 살기 위해 망명을 택했다. 풍요로웠던 삶도, 친구도 모두 포기했다. 라디아의 아버지와 어머니, 다섯 명의 아이들은 그렇게 태국 등지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이어갔다. 라디아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 3년간 모든 것을 포기했다. 언제 들켜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삶을 이어갔다. 공부는 꿈도 꾸지 못했다. 부모님이 마련한 숙소에 갇혀 3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라디아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는 “방 안에 있으면서 ‘지금쯤 내 친구들은 이런 공부를 하고 있겠지’, ‘지금 시험기간이겠지’라는 생각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라디아 가족이 태국을 떠나 한국에 들어온 것은 2015년 2월. 출입국관리소 측은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가족은 출입국관리사무소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처분 취소소송을 이어갔다. 라디아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곧장 다문화학생을 위한 위탁형 대안학교에 진학했다. 통상 1년이 걸리는 한국어 수업을 6개월 만에 끝냈다. 당초 입학하기로 한 학년보다도 한 단계 높은 학년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온 지 4년 만인 2019년 1월 부산의 한 국립대 영어영문학과 합격통지서를 받아냈다. 그 사이 1·2심 법원은 이들이 낸 처분 취소소송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가족들은 대법원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합격통지를 받고 어떤 기분이었느냐’는 질문에 라디아는 “○○대는 부산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좋은 국립대학인데 내가 ○○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정말 열심히 각종 서류도 제출하고, 간절하게 기다렸는데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선생님께 제일 먼저 알렸다”고 말했다.

학교는 그러나 비자 변경을 해야 입학이 가능하다며 등록을 거부했다. 입학허가서를 받기 위해 학교를 찾은 그에게 입학 담당자가 “외국인 학생이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유학생 비자(D-2)를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난민신청자 체류자격(G-1-5)으로는 등록할 수 없다고 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역시 난민신청 비자를 가진 국내 체류자는 유학생 비자로 변경할 수 없다고 했다. 출입국관리소가 제시한 유일한 방법은 파키스탄으로 돌아가 한국대사관에서 유학생 비자를 받아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납치 및 살해 위협을 피해 망명한 라디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키스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 또는 강제결혼을 의미한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조혼 및 사촌 간 결혼을 장려한다. 올해 만 21살이 된 라디아는 파키스탄 공항에 입국하는 순간 강제압송돼 죽임을 당하거나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결국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가 원하던 공부는 영원히 할 수 없게 된다.

법무부는 지난해 3월 인도적 체류허가자(G-1-6)의 경우 유학생 비자가 없더라도 별도의 변경 없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외국인 유학생 사증 발급 지침’을 변경했다. 그러나 난민신청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라디아와 같이 부모의 의지로 박해를 피해 한국에 망명한 어린 미성년 자녀들은 대부분 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들어와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초·중·고등교육을 받은 난민신청자의 자녀들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도 현실의 벽 앞에 마주서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한국에 들어와 정체성마저도 한국인이 돼버린 아이들이다. 부모의 언어보다 한국말이 편하고, 한국문화가 익숙해져버린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 살 수 없다. 한 살 때 파키스탄을 떠나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라디아의 막냇동생 역시 사실상 ‘한국인’에 가깝다.

장래희망은 통역사, 난민들 돕고 싶어

부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와 ‘이주와 인권연구소(MIHU)’가 나섰다. 그의 사정을 외부에 알렸다. 파키스탄에 돌아가지 않고, 현재 비자로 학업만은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출입국관리소와 학교 측에 요청했다.

<주간경향>은 지난 2월 1일 부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라디아를 만났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는 ‘파란 눈의 한국인’이었다. 노래방에서 BTS 멤버 ‘뷔’의 싱글곡을 부르길 좋아하고, 친구 때문에 공포영화를 즐겨보는, 어디에서나 봤을 법한 흔한 고 3학생의 모습이었다.

부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이주와 인권연구소의 노력으로 대학 측은 지난 1일 라디아의 입학등록을 허가했다. 그러나 라디아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하다. 대법원이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라디아는 가족들과 함께 강제출국을 당해야 한다. 자칫 등록금만 납부하고 학교는 한 학기도 다니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외국인이 대학에 입학했을 경우, 본국에 돌아가지 않더라도 유학생 비자로 변경해주는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라디아는 불안 속에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다.

라디아의 장래희망은 통역사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면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파키스탄에서의 꿈은 의사였다. 부모님도 원했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라디아는 공부를 잘했다. 반에서 2~3등을 놓치지 않았다. 한 반 전체 인원은 58명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학원까지 다녔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망명생활을 하며 그의 꿈은 바뀌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자주 드나들었잖아요. 그런데 간단한 질문인데도 통역사가 없어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봤어요. 그 사람들을 돕고 싶었어요.”

1·2심 법원 법정에서의 통역 역시 라디아와 라디아의 세 살 아래 남동생이 했다. 라디아의 부모님은 한국말을 모른다.

라디아는 모국어인 우르두어와 힌디어, 영어, 아랍어,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한국어 역시 유창했다. 그는 난민 구호활동도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의지로 파키스탄을 떠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는 무사히 대학 4년을 마치고 통역사가 될 수 있을까. 대법원 판결과 관계없이 그가 마음놓고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을 마칠 방법은 없을까. 라디아는 이날 법무부 장관에게 쓴 두 장의 손편지를 열어 보였다. 쫓겨날 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다는 21살 라디아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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