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유골 봉환사업 일본인 곤노 유리 이사장 “어머니 입장으로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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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만나자마자 기자에게 명함을 세 개나 준다. 명함에는 다이얼서비스 주식회사 대표취체역사장, 사단법인 일본개호사업연합회 부회장, 재단법인 21세기일본위원회 이사장, 주식회사 생활과학연구소 CEO, 도쿄상공회의소 특별고문 등의 직책이 새겨져 있다. 명함에 적힌 직함 말고도 그가 맡고 있는 일은 훨씬 많다. 나이 83세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기자가 ‘인물탐구’로 인터뷰가 좀 길어질 수 있다고 하니 그는 “탐구할 대상에 부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체력은 좋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편의상 그를 이사장으로 통일한다.

[원희복의 인물탐구]강제징용 유골 봉환사업 일본인 곤노 유리 이사장 “어머니 입장으로 돕는 것이다”

사실 곤노 유리(今野由梨) 이사장은 여러 개 직책에서 보듯이 일본 경제계, 특히 벤처업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흔히 ‘일본 여성벤처 1호’로 꼽힌다. <여성이 사회를 이끌 때>, <벤처에 목숨을 건다>, <여성의 선택>, <괜찮아요?>라는 책도 썼다.

‘일본 여성벤처 1호’로 꼽히는 유명인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가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든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는 9월 26일 도쿄에서 나의 50년 벤처생활을 회고·축하하는 ‘기적의 50년’ 행사를 한다”면서 “아베 총리도 오고 손정의 회장은 반드시 참석하는데 그때 기자도 와서 손정의 회장을 인터뷰하라, 내가 주선해 주겠다”고 말했다. 곤노 이사장은 손 회장이 벤처기업으로 스타트업하고, 성장하도록 조언하고, 지원한 사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자가 곤노 이사장을 만난 이유는 일본 벤처 이야기를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숨진 조선인 유골 봉환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일 과거사 문제는 매우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특히 일본 재계 인사가 한국은 물론 북·일 간 과거사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일본 사회에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한국인 강제징용과 유골 봉환사업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인가.

“한국과 관계는 오래됐지만 사실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을 만났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고 신뢰하는 한국 사람이 고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 상임의장은 부친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남북문제와 한·일문제 중에서 생전에 풀지 못한 유업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얘기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벤처기업인 심경이 아닌 한 어머니의 심경으로 ‘적극 돕겠다’고 말했다.”

-최근 한·일관계가 과거사 문제로 우호적이지 않다.

“지금 한·일관계가 어떠니 저쩌니 따질 시간이 없다고 본다. 나는 ‘국경 없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싶다. 김 상임의장은 일본에 있는 강제징용자 유골 봉환작업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런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갈등은 어떻게 마무리되는 것이 좋을까.

“한·일 과거사 문제는 단편적으로 얘기할 수 없는 문제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다. 나는 정치인도, 평론가도 아니다. 국가나 정치보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국경이 없는 어머니라는 기본철학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국경을 뛰어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유골을 고향에 돌려보내주고 싶은 것이다.”

현재 14만구가량의 한인 강제징용자 유골이 일본 전역에 산재돼 있다. 그들은 일본 군인, 군속, 노동자 등으로 왔다가 먼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다 숨졌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나 기업이 이들의 죽음을 유족에게 통보하고 시신을 돌려주지 않아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와 함께 과거사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지난해 8월 6일 일본 도쿄에서 곤노 유리 이사장, 김홍걸 남측 민화협 상임의장, 북측 조선오 조선총련 중앙본부 국제통일국 부국장, 하수광 조선인강제연행조사단 사무국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난해 8월 6일 일본 도쿄에서 곤노 유리 이사장, 김홍걸 남측 민화협 상임의장, 북측 조선오 조선총련 중앙본부 국제통일국 부국장, 하수광 조선인강제연행조사단 사무국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일본에 강제징용자 한인 유골 14만구

역사·법률·보상 문제를 떠나 유골을 사실상 방치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도 옳지 않은 일이다. 이는 정부가 해야 할 국가적 의무이기도 하다. 자국인을 지구 끝이라도 찾아 유골을 수습해 오는 미국이나 일본 등의 사례를 감안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이를 민간단체인 남북 민화협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일본의 양심 있는 인사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민화협 김 상임의장은 “유골이라도 모셔가는 것이 강제로 끌려와 조국과 부모형제를 그리다 숨진 분의 한을 씻어드리는 후손들의 당연한 책무이며 사명”이라고 말했다.

남측 민화협은 이들 유골을 봉환받아 제주의 한 사찰에 임시로 안치한 후 나중에 평화공원과 같은 영구 안식처를 마련할 예정이다. 북측 민화협도 이 입장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민화협 김 상임의장은 지난해 7월 평양을 방문해 북측 민화협 관계자와 일본에 묻힌 강제징용 희생 조선인들의 유골 송환을 위한 남북공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강제동원 피해자 공동 토론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일본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지난해 8월 6일 일본 도쿄 KRR호텔에서 남·북·일 세 나라가 참여하는 공동기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당시 곤노 회장이 일본 측 인사로 참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도쿄 메구로구 사찰에 안장되어 있는 징용자 유골에 대한 추도식을 열고 해당 유골의 북한 봉환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야마구치현 우베시 바닷가에 있던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로 숨진 조선인 발굴사업을 일본 시민단체들과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이 조세이 탄광에서는 1911년부터 48년까지 크고 작은 사고로 모두 528명이 숨졌다. 1942년 갱도 수몰사고로 숨진 136명의 유골은 바닷속에 그대로 있다. 이밖에 민화협은 지난해 10월 일본 국내 방송사와 함께 오사카 통국사에 있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을 취재하기로 했다.

이런 활발한 움직임에 비해 일본의 입장은 소극적이다. 실제 이 문제는 흘러간 과거 역사가 아닌 보상문제가 걸린 현실적 경제문제이고, 정치 현안이다. 최근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영장에 따르면, 2015년 6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와 사사키 미키오 일한경제협회 회장 등 한·일 현인회 소속 일본 정·관·재계 원로들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들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판결을 방치해선 안된다”면서 “판결하면 일·한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압박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망신당하지 않도록 처리하라”는 취지로 지시했음이 드러났다.

곤노 유리 이사장이 강제징용 한인 유골 봉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곤노 유리 이사장이 강제징용 한인 유골 봉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현재 일본상공회의소 부회장 활동

곤노 이사장 역시 이 문제가 자꾸 한·일 과거사 문제, 특히 요즘 현안이 되는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꺼렸다. 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도 답변을 꺼렸다. 곤노 이사장은 “일·한 간 과거사 문제는 일본인끼리도 잘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면서 “유골 봉환문제는 전쟁으로 아픈 경험을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돕자는 것이지, 정치적 입장은 단 하나도 개입돼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곤노 이사장은 “내가 참여함으로써 일본 사회주도층이 유골 봉환작업을 비난하지 못한다, ‘왜 남북이 하는 일에 일본이 끼어서 그러냐’는 소리를 못한다”고 말했다.

사실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에도 일본과 한국에서 계속 소송이 진행된 사안이다. 당연히 일본 사법부 판결과 국내 사법부 판결이 달랐다. 이는 일본 전 총리가 달려와 한국 현직 대통령에게 국내 대법원 판결에 압력을 넣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다. 그런 예민한 사안에 일본인이 그 정도 역할을 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곤노 이사장은 1936년 도쿄와 오사카 중간쯤 지역인 미에(三重)현 구와나(桑名)에서 출생했다. 그 역시 대부분 또래처럼 태평양전쟁을 겪고 패전국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체험했다. 그는 지금도 전쟁의 고통과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 힘들어 했던 당시를 기억하곤 한다. 아마 그가 강제징용자 유골 봉환사업에 참여한 것은 전쟁 상처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도쿄 쯔다주쿠(律田塾)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브래태니커 출판사에 입사해 세일즈를 배웠다. 그리고 1969년 당시로선 벤처였던 전화를 통한 텔레마케팅과 쌍방향 통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다이얼서비스㈜를 설립했다. 그는 “당시 전화는 비즈니스 수단이 아닌 단지 소식만 전하는 도구였다”면서 “관련 법이 없다는 이유로 뉴미디어 사업을 막는 정부와 많이 싸웠다”고 말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들의 전화가 폭주했고, 결국 그는 법률적 문제를 극복했다. 그는 “남이 하지 않는 분야에 도전하면서 다음 세대의 초석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싸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에게 ‘일본 여성벤처 1호’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일본 벤처기업 모임인 뉴비즈니스협의회연합회 부회장, 일본벤처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벤처를 넘어 1992년에는 세계여성리더 포럼을 주최했고, 1993년 맡은 21세기일본위원회 이사장직을 지금까지 맡아오고 있다. 또 세계 우수 여성기업가상을 받았고 현재 일본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각 부처(금융청·총무성·우정성·경제산업성·문부과학성·국토교통성 등) 자문위원도 지냈거나 지내는 등 관계에서도 ‘마당발’로 통하고 있다.

그의 도전정신은 비단 벤처·여성·재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아 마라톤, 스키, 스쿠버다이빙, 골프 실력도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는 1992년 하루 153개 홀을 도는 골프 기록을 작성,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보기 플레이어(90타) 수준의 골프 실력”이라고 말했다.

곤노 이사장은 미혼이다. 그는 “지난 50년은 벤처를 했지만 앞으로 50년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나를 완전 연소할 것”이라며 “세계 어린이가 죽어가는 것을 막고, 속박당하는 여성을 살리고, 국경을 넘는 어머니 활동을 하는 등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이 산만큼 많다”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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