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자본주의,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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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소비자·협력업체·사회 등 모두의 이익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부상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지 400년이 넘었다. 이 회사가 했던 동방 해상교역은 지금으로 치면 우주탐사와 같아 막대한 자본이 들고 위험이 컸다. 중세시대처럼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동원해 투자금을 모아 사업을 벌이고 성공과 실패를 모두 나누는 방식은 불가능했다.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한 한 시민이 2012년 5월 1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월가 경영진이 의회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부를 독식하고 있음을 묘사한 대형 그림판을 세우고 있다. / Justin Sullivan / 게티이미지코리아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한 한 시민이 2012년 5월 1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월가 경영진이 의회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부를 독식하고 있음을 묘사한 대형 그림판을 세우고 있다. / Justin Sullivan / 게티이미지코리아

주식회사는 대규모의 자본이 필요한 위험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주주들은 사업이 성공해 이윤이 나면 배당을 챙기고, 사업이 망해도 딱 투자한 만큼의 손실만 입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자한 만큼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주식을 증권거래소에서 팔아 언제든 돈을 회수할 수 있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주주들이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배당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는 등 초기에 주식회사에 적대적인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를 거쳐 철도와 운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성장의 엔진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주주 자본주의가 주주의 이익 극대화를 기업의 최우선 목표로 보는 ‘주주 지상주의’로 변질되면서 불평등과 저성장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그 비판 속에서 주주뿐 아니라 노동자와 소비자, 협력업체, 기업이 속한 사회 모두가 기업의 성장에 관여하는 이해관계자로서 이들이 모두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부상했다.

주주 자본주의의 부작용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이 지난 1월 21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6명이 소유한 자산은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38억명의 것과 같다. 이들 부호의 자산은 대부분 주식과 같은 금융자산인데, 법인세 등 감세혜택을 이들이 주로 가져가면서 불평등을 키웠다는 것이 옥스팜의 분석이다. 법인세가 낮아져 기업에 남는 돈이 늘면 기업은 이를 자사주 매입에 써 주가를 올려 주주들에게 이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도 지난해 12월 3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5%였던 법인세율을 21%로 낮추면서 미국 기업들이 2000억 달러에 이르는 법인세를 절약했는데 그 과실을 자사주 매입과 배당으로 기업과 주주들이 거의 모두 챙겼다’고 평가했다.

경영자 보수를 주가와 연동시켜 놓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장기적 투자보다 단기적 경영성과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주주가치의 극대화는 최고경영자 소득의 극대화로 변질됐다. 최고경영자들은 주가를 올리기 위해 회사 자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할 동기가 커졌다. 주식의 다수를 보유한 경영진과 일반 직원들 간의 보수 격차는 커졌고, 이는 불평등 심화의 한 원인이 됐다.

주주가치 극대화가 기업의 장기적 성과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주들의 대부분이 단기 투기적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 루스벨트연구소에 따르면 1940년 평균적인 주식 보유기간은 약 7년이었다. 이것이 1987년에는 2년으로 줄었고, 2007년에 이르면 평균 7개월로 짧아졌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주식 보유기간이 평균 3~5개월 정도다. 손성규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국내 투자자들은 지극히 단기투자 성향을 보인다”며 “이들은 기업의 장기적 성과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경영자들이 주주를 위한 의사결정을 할 때 이것이 기업의 장기적 가치로 이어질지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주주들이 위험을 부담하기 때문에 잉여이익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주들이 단기적 이익만 추구하면서 3~5개월 있다가 떠난다면 이들의 이익이 장기 재직하는 종업원들의 가치보다 우선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절충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주주보다 오너의 이익을 중시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권오인 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한국의 경우, 재벌체제로 그간 주주들의 목소리보다 지배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흘러갔다”며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를 견제할 수 있도록 지배구조를 개선한 후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는 형태로 판을 짜는 게 맞다”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면서 광고 수익과 수수료 수익을 올리는 ‘플랫폼 경제’가 급성장하는 것도 주주 자본주의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올리고, 다른 사람이 올린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공유하는 행위는 페이스북 성장에 도움을 준다. 우버나 에어비앤비, 유튜브도 비슷하다.

이해관계자와의 이익공유 더 중요해

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플랫폼 경제의 특성상 이용자들의 참여는 주주들의 투자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참여에 대한 대가는 전혀 없었다. 주주 자본주의로는 이를 개선하기엔 한계가 있다. 주식시장에 상장되기 전까지는 일반인이 주식을 소유할 수 없어 대개 창업자와 상장 전 투자한 ‘큰손’들만이 기업공개의 이익을 대부분 가져갔다. 상장 이후에도 이익을 공유하는 인센티브 제도는 보기 어렵다. 플랫폼 기업들은 기존 산업을 혁신하면서 얻은 이익을 독식했다.

그러나 변화의 시도들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카풀업체 풀러스의 ‘풀포인트’ 제도다. 풀러스는 지난해 12월부터 카풀 운전자에게 여정 횟수와 거리에 따라 풀포인트를 제공하는데, 이를 향후 풀러스의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다. 풀러스는 우선 총 10억포인트에 도달하면 주식 1%를 분배하는 안건을 이사회에 상정할 계획이다. 풀러스는 향후 주식의 10%까지 이용자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서영우 풀러스 대표는 “서비스가 성장하고 공유경제가 활성화돼 실제 이익이 발생하려면 초기에 이용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며 “이해관계자들은 자본을 직접 투자하진 않았지만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기 때문에 풀포인트로 주식을 지급해 성과를 나누는 게 합리적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이용자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카풀 운전자로 활동하는 라마루씨(29)는 “주식 배분이 돈으로만 따지면 크게 매력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우리 사업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달라’는 의미로 보인다”며 “이용자들이 주식을 공유하면서 자본에 편향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참여자들이 이익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블록체인’도 주목받는다. 그간 해결하기 어려웠던 디지털 자산의 복제 문제를 해결해 보상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글을 올리거나 게시물에 대한 평가를 하고 질문에 답을 하는 행위들을 토큰으로 보상하는 서비스들이 나오고 있다. 블록체인 기반 블로그 서비스인 ‘스팀잇’과 같은 성공사례도 생겼다.

소프트뱅크 출신의 투자전문가인 이강준 두나무앤파트너스 대표는 최근 간담회에서 “지금의 주주 자본주의가 소위 디지털 경제에서 FAANG(페이스북·애플·아마존·넷플릭스·구글)이라고 불리는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가치를 분배할 때 택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인가”라면서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주는 게 좋다고 수십 년 전 인정했던 것과 같이 플랫폼 경제에서는 더 넓은 이해관계자에게 우리가 창출하는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적극 채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이해관계자 경제의 관점에서 블록체인이 잘 어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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