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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카르텔에서 자유로운 판사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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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출신 박판규 변호사, 그들이 아닌 누군가가 있었어도 마찬가지

이번 사법농단 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판사는 8명(정직 3명, 감봉 4명, 견책 1명)이다. 대법원장이 징계에 회부한 13명 중 5명(불문 2명, 무혐의 3명)은 징계대상에서 아예 제외됐다. 임종헌 전 차장에 대한 공소장에는 50명이 넘는 판사들의 이름이 관여자로서 등장하지만, 이 8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2019년이 된 지금 사법농단사건에 관여한 나머지 판사들에 대한 징계는 사실상 어렵다. 법관징계법상 징계시효는 3년이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재임기간인 2011년 9월부터 2017년 9월까지의 일 가운데 2011년부터 2015년까지의 행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징계를 청구할 수 없다. 2016년 이후의 행위에 대해서 지금도 매일매일 징계시효가 완성되어 가고 있다.

/ @rawpix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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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침묵했기에 평온했던 사법부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많은 판사들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무척 안타깝다. 아끼는 후배들도 있고, 존경하는 선배들도 있다. 만약 그들이 아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했을 것 같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으면서도 나 역시 윗선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을 것 같다. 물론 비슷한 지시가 또다시 내려왔다면 조금 더 저항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법원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조용히 사표를 쓰지 않았을까 예측한다. 어쨌든 나는 침묵했을 것이다.

또 다른 가정을 해보자. 나에게 내려온 지시가 아닌, 내 옆에서 함께 일하는 판사에게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거의 99% 모른 척했을 것이다. 못본 척, 모르는 척, 못들은 척하고 말았을 것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부 판사는 대법원장, 법원행정처 처장이나 차장의 눈에 더 들려 노력했을 것이다. 여러 판사들이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고위법관이 특정 판사에게 칭찬의 말을 건넬 때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 판사들이 느꼈을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했을 것이다. ‘저렇게까지 해야 인정을 받는구나. 나도 저렇게 해야 되나. 왜 나는 저렇게는 못할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들로부터 인정받는 수석부장이나 판사들을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볼 뿐, 그저 침묵한다.

그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누군가는 반항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탄희 판사처럼 사직서를 내지는 않더라도 그 일을 거부하거나 일부러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처장이나 차장, 실장으로부터 무능하다고 욕을 먹거나, 적당히 타협하지 못하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치부되었던 판사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불이익은 그 당시에 이미 현실화되었을 것이다. 일부는 조용히 사직하거나 남은 법관생활 동안 재판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이들도 여전히 침묵한다.

모두들 각자의 이유로 침묵하였기에 모두가 이상하다고 느꼈음에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사법부는 평온했다. 그리고 앞으로 징계도, 형사처벌도, 탄핵도 되지 않는 판사들은 자신들이 했던 일에 대해서 침묵할 것이고, 법원 내 다른 판사들도 모두 이 일에 대해 침묵하게 될 것이다.

있었던 일이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모두가 침묵하게 된다면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과거는 들여다볼 수 있다.

신영철 대법관은 2009년 2월 대법관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신영철 대법관이 2008년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재직 시절 촛불집회 관련 형사사건들에 관해 특정 재판부에 해당 사건들을 몰아서 배당했고, 형사단독판사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후에는 개별 판사들에게 촛불집회 관련사건을 조속히 처리할 것, 관련 구속피고인들에 대한 보석신청을 불허할 것을 전화와 메일로 집요하게 요구한 행위가 드러났다.

우리는 계속 침묵할 것인가

2009년 5월 신영철 대법관은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 또는 주의촉구의 조치권고를 받았다. 언론은 당시 신영철 대법관이 사퇴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신영철 대법관은 사퇴하지 않은 채 6년 임기를 모두 마쳤다. 그 6년 동안 이 문제의 부당함을 제기했던 판사들은 무력감으로 침묵했고, 일부 판사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침묵했고, 나머지 판사들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제히 침묵했다.

반전은 6년 뒤에 일어났다. 신영철 대법관은 2015년 2월 한 언론사와의 퇴임 인터뷰에서 “2008년 당시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활자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는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그 같은 재판 관여행위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의 결정 자체를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2009년 당시 각급법원의 판사회의에서 그 부당함을 지적했던 수많은 판사들을 조롱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2011년 9월에 취임했고, 신영철 대법관은 양승태 대법원장과 3년 남짓 대법원에서 함께 근무했다. 아마도 이번 사법농단사건을 옆에서 지켜보고, 동료 대법관과 후배 판사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자신의 행위를 더욱더 정당화해 왔을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침묵하던 그 6년을 거치면서 신영철 대법관은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다는 상상을 점점 현실로 믿어버렸다.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로 바뀌어 가던 바로 그 시기에 그 후배 고위법관들은 신영철 대법관보다 더 열심히, 조직적으로 재판개입 등의 위법한 일들을 했다.

잘못이 드러났으나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지 않았을 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이렇다.

“위법한 지시에 저항하거나 밝혀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며, 지시를 하거나 지시에 따른 사람들은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너만 억울해하고 외로워져서 이상해질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마치 선량한 피해자로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혹시 이런 일이 있거나 보더라도 그냥 침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신영철 대법관 사건 이후 법원 내 침묵의 카르텔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 결과가 이번 사법농단사건들이다.

이번 사법농단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르겠다. 침묵의 카르텔을 무너뜨릴 것인지, 더 강화시킬 것인지. 더 강화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저런 일이 있었다. 현재 진행 중인 사법농단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그 미래는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계속 침묵해야 하는가.

<박판규 변호사(법무법인 현진·전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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