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역교과서 제때에 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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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용 교재 공급 부족… 검·인정 교과서는 학기 시작 후에 겨우 받아

해마다 새학기가 되면 손이 바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시각장애인의 부모들이다. 이들은 자녀의 학년이 높아질 때마다 각종 교과서와 문제집 교재를 사들고 타자를 친다. 시각장애인용 점역교재가 턱없이 부족해 부모들이 나서 점역(點譯·글이나 그림 등을 점자로 고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 이외에 중복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비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학습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교재만 있으면 충분히 교과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한 시각장애인이 음악이론 수업시간에 점자로 된 음악책을 읽고 있다./김영민 기자

한 시각장애인이 음악이론 수업시간에 점자로 된 음악책을 읽고 있다./김영민 기자

참고서는 엄마들이 직접 점역작업

중학교 2학년 아이를 두고 있는 엄마 최선희씨(47) 역시 매년 아이의 문제집을 직접 한글 텍스트파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파일로 변환된 교재는 점역 프로그램을 거쳐 점자본으로 만들어진다. 시각장애인용 교과서는 대부분 신학기에 제때 받아볼 수 있어 별도의 점역이 필요없지만 시판 문제집은 시각장애인용이 따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 최씨의 아이는 전맹(全盲·사물을 전혀 볼 수 없는 단계)이다. 그러나 성적은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최씨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동화책이나 소설책은 읽어주거나 음성파일을 틀어주면 되지만 학습지는 다른 문제였다. 아이는 다양한 시판 문제집을 풀고 싶어했다. 공부 욕심이 있는 아이를 부모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 최씨는 “알음알음 출판사에 파일을 요청해 점역을 맡기는 경우도 있고, 파일을 받지 못할 때는 내가 직접 손으로 쳐서 점역문제집을 만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일부 시각장애아 부모들은 주요 교과목 문제집을 각자 한 권씩 맡아 한글파일로 나눠 쳐서 갖기도 한다고 했다.

부모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각장애인용 각종 교재는 부족한 실정이다. 제때 공급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국정교과서는 교과과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기존의 것을 이용하거나 개정됐더라도 점역작업을 하는 데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문제는 검·인정 교과서다. 학교마다 채택하는 교과서가 제각각이고, 시각장애인들도 각자 재학 중인 학교가 채택한 교과서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점역교과서가 마련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고교 1학년 국어 교과 검·인정 교과서만 11권에 달한다. 통상 교과서 한 권을 파일로 만들어 점역을 하고 교정 및 감수까지 하는 데 20일 이상 소요된다. 활자만 점역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그림이나 도형, 사진 이미지도 시각장애인들이 손으로 읽을 수 있도록 변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띄어쓰기부터 각 그림이 활자 교과서와 비교했을 때 제대로 묘사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질적 교정작업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분량도 당연히 활자 교과서의 몇 배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수학 교과서 한 권을 시각장애인용 점역교과서로 변환하면 5권 분량의 점자책이 된다.

김상민 기자

김상민 기자

교육부 관계자는 “시각장애인이 재학 중인 학교별로 어떤 교과서를 채택했는지를 조금이라도 빨리 알려주면 점역작업을 좀 더 서두를 수 있다”면서 “그러나 개학 직전까지 교과서 채택을 늦추거나 채택한 교과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점역 교과서를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은 교과서 앞단락 일부만 점역된 교과서를 받아 수업을 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각 출판사가 저작권 문제를 들어 파일 제공을 꺼리거나 교재가 출간된 이후에 파일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학기용 각종 교재가 시중에 유통되기 전에 파일을 외부에 제공할 경우 악용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김재왕 변호사는 그러나 “출판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시각장애인들이 필요로 하는 파일은 시중에 유통되는 형태의 한글파일이 아니라 점역이 가능한 형태의 암호화된 파일이기 때문에 출판사의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글파일을 BRL(점자파일)로 변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결국 변환만 해서 제공하면 될 일인데 할 수 있어도 안 준다고 보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시각장애인 1호 변호사인 김 변호사 역시 같은 문제로 변호사시험 대비 각종 수험서를 보지 못하고 점역이 가능한 법전과 대학교재만으로 공부한 경우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각장애인용 EBS 교재의 공급 부족이다. EBS 교재는 초등~고교 1·2학년까지는 점자본이 나오지 않는다. 고교 3학년용 수능연계 문제집만 점역 교재로 제공된다. 많은 학생들이 EBS 교재로 공부하고 있지만 시각장애인들은 그마저도 진입장벽이 있는 셈이다. 그나마 제때 제공되지도 않고 있다.

시각장애인용 EBS교재의 장벽

지난해 2019학년도 수능시험을 치른 김하선씨(19) 역시 수능공부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EBS 문제집을 구하는 것을 꼽기도 했다. EBS 교재는 수능시험 문제와 70% 연계되기 때문에 수능을 보는 시각장애인들에게 EBS 점역교재는 필수다. 하지만 지난해 2월 수험생들에게 지급된 EBS 교재를 김씨를 비롯한 시각장애인들은 8월이 돼서야 점역본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점역 EBS 교재를 구입할 수 없었던 김씨는 2017학년도 EBS 점역교재를 구해 공부했다. 한 시각장애인 부모는 “EBS 교재와 수능 연계율이 높지 않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연계율이 70%나 되는 교재를 시각장애인들은 제때 볼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차별”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많은 후보자들이 명함에 점자를 새겼는데 많은 점역소들이 이 명함 점역작업을 우선적으로 하는 바람에 EBS 교재 점역 시점이 늦춰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결국 돈 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문제는 끊이지 않는다. 대학생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 송모씨(51)는 “대학 전공교재까지 점역작업을 하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학마다 장애인 지원센터를 통해 시각장애인용 대학교재 점역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강의교재가 개강 직전에야 정해지는 경우도 많아 시각장애인들은 교재 없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기도 한다. 송씨는 “급한대로 아이의 교재 일부분만 점역을 해서 줄 때도 있다”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가 강의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 소속 국립특수교육원 관계자는 “현재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대학교재 점역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1인당 4권, 1000페이지까지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제한을 뒀지만 지금은 대학에서 학습진행을 위해 필요하다는 증명만 있으면 7권, 3000페이지까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부분 시각장애인이 이 같은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신청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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