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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활력, 기업들 지갑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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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신년회서 재계 역할 강조… 경제위기 돌파에 기업 투자 절실

“1년 전만 해도 청와대에선 그 누구도 경제가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지난해 청와대의 경제분야 참모들과 두루 교류했던 한 노동계 인사가 꺼낸 말이다. 신기하리만큼 청와대에서는 경제상황을 낙관했고, 한편으로는 경제문제에 대해 순진했다는 것이다. 1년 만에 상황은 급반전돼 ‘경제위기’는 일상용어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경제 살리기’를 신년사 맨 앞에 써놓고 2019년을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지하1층 그랜드홀에서 열린 신년회에서 신년인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월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지하1층 그랜드홀에서 열린 신년회에서 신년인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현 상황이 정말 경제위기인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1월 2일 JTBC가 주최한 토론회인 ‘2019 한국 어디로 가나’에 나와 “경제위기론은 심하게 표현하면 우리나라 보수 기득권층의 이념동맹, 이해동맹, 이익동맹”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론이 정치공세라는 주장이다.

경제위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문재인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점만은 분명하다. 지난해 4월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70%가 넘던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꺾이기 시작한 지점도 각종 고용·소득지표가 악화되기 시작한 6월 이후부터다. 경제분야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현 정권에 조기 레임덕이 찾아올 수 있다는 전망도 재계 일각에서는 제기된다.

경제문제에 ‘올인’한 문 대통령

문 대통령의 신년회는 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지하1층 그랜드홀에서 열렸다. 대통령이 경제단체를 찾아 신년회를 여는 건 처음이다. 2018년 신년회의 경우 청와대 영빈관 2층에서 개최됐다. 올해 신년회 면면을 살펴보면 문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드러난다.

신년회 ‘간판’부터 변했다. 지난해 신년회 제목은 ‘나라답게 정의롭게’였다. 문 대통령 부부가 앉은 헤드테이블에는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등 정부 주요 인사와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오희옥 애국지사, 이희아 피아니스트 등이 합석했다. 박승 전 총재는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 캠프의 싱크탱크인 ‘국민성장’의 자문위원장이었으며, 소득주도 성장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다. ‘정의’라는 문구에 맞게 경제분야에 대한 문 대통령의 신년사 역시 양극화 해소, 노사관계 개선 등 소득주도 성장과 공정경제 실현이 주를 이뤘다.

올해 신년회 제목은 ‘더! 함께 잘사는 안전한 평화로운 대한민국’이다. 헤드테이블에는 지난해 보이지 않던 경제단체장들이 등장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장이 두 자리를 차지했다. 재계에선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제 시행 등으로 기업들의 반발을 샀던 문 대통령이 재계를 달래고자 헤드테이블에 경제단체장을 2명이나 초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해 신년회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도 신년회에 초대됐다. 문 대통령은 올해도 “‘정의’가 언제나 중심”이라고 언급하긴 했지만 혁신성장, 기업의 투자활성화 등 기업 친화적인 발언에 신년사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리얼미터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지난해 말 긍정보다 부정이 많은 ‘데드 크로스’를 지났다. 리얼미터의 올해 첫 여론조사에서는 긍정이 47.9%로 부정(46.8%)을 다시 앞지르긴 했지만 언제 다시 데드 크로스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간 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러시의 원인으로 경제위기 문제가 꼽혀온 만큼 여론이 더 악화되기 전에 문 대통령은 경제분야에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작년 말 문 대통령의 데드 크로스를 보고 “조만간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통상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로 내려오면 레임덕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며 “신년회와 신년사에서 경제 비중을 높게 둔 건 문 대통령이 재계에 SOS를 보낸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경제 활력이 관건, 기업들 지갑 열까

문 대통령이 경제위기론에서 벗어나려면 눈에 보이는 각종 경제지표가 개선되는 길밖에 없다. 정부가 앞서 내다본 올해 대내외 각종 경제지표가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17일 발표한 ‘2019년 경제정책 방향’ 자료를 보면 대부분의 지표가 2018년보다 악화되거나 답보상태를 지속할 것으로 전망됐다. 각종 기관들이 예상하는 올해 경제성장률은 2.5~2.7% 수준으로 지난해보다 대체적으로 낮게 나오고 있고, 정부 출범 첫해인 3.1%와도 큰 차이를 보인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대표이사 회장이 1월 2일 청와대 주최 신년회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대표이사 회장이 1월 2일 청와대 주최 신년회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취업자 증가도 연간 15만명 수준으로 ‘고용참사’로 불린 지난해의 10만명보다는 높지만 2017년(32만명)에 비하면 여전히 크게 낮다. 반도체 활황이 꺼지면서 연간 경상수지도 올해 640억 달러 수준으로 지난해의 740억 달러보다 100억 달러(11조2600억원)나 낮을 것으로 전망됐다.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연간 1.6% 정도로 낮게 전망됐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물가가 예상했던 것보다 낮다”며 걱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저성장과 저물가가 지속되면 장기 경기침체가 올 가능성이 있다.

경제여건에 특별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정부가 예측한 각종 지표가 눈에 띄게 개선될 가능성은 작다. 이 때문에 정부가 지난해 말부터 강조해온 것이 바로 ‘경제부문의 활력’이다. 문 대통령이 신년회에서 재계에 적극적인 ‘구애’에 나선 이유도 경제활력 문제에 있어 기업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성안 영산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30대 기업이 갖고 있는 사내 유보금이 883조원에 달한다는 집계 결과가 있다”며 “소득주도 성장에서 핵심 성장동력은 소비자의 ‘소비수요’와 기업의 ‘투자수요’인데 기업이 이렇게 돈을 쥐고 투자하지 않으면 일자리 증가도, 경제성장도 일어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기업들이 투자에 나서지 않으면 경제분야의 활력을 되찾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정부의 올해 경제정책 방향의 최우선순위가 ‘투자활력 제고’이고, 투자활력 제고의 최우선순위가 바로 ‘기업 투자 활성화’다. 정부는 경제정책 방향 자료에 SK하이닉스의 1조6000억원 규모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투자사업, 현대자동차그룹의 3조7000억원 규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개발사업 등을 열거하며 이례적으로 “신속히 투자에 나서 달라. 정부도 각종 제도 지원을 통해 돕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바람대로 기업들이 지갑을 열지는 미지수다. 올해 주요 기업들의 투자계획의 경우 아직 확정되지 않은 곳이 대다수다. 과거에는 보통 3월 초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주요 기업 총수들이 간담회를 가진 뒤 기업들의 한 해 투자규모가 공개되곤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간담회에 앞서 회원사인 주요 기업에 투자계획 등을 물어 집계해 자료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주요 대기업이 전경련을 이탈한 뒤인 2017년부터는 장관과 총수 간 간담회도 열리지 않았을뿐더러 전경련도 더 이상 투자정보를 집계하지 않고 있다. 가장 최근 자료인 2016년의 경우 전경련이 집계한 30대 기업의 투자규모는 122조7000억원이었다.

기로에 선 소득주도 성장

정부가 경제활력 문제로 재계와 적극적인 스킨십에 나서면서 위태롭게 된 건 소득주도 성장이다. 기업들은 그간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 정착 등으로 대표되는 소득주도 성장론에 강한 반감을 내비쳐 왔다. 최근 불거진 주휴수당 논란 역시 최저임금 인상으로 쌓인 기업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례다. 지난해부터 “경제위기의 주범은 소득주도 성장”이라고 주장해온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의 공세도 높아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을 주요 경제정책 기조로 유지하면서 한편으론 기업들의 투자를 독려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문 대통령의 신년회를 지켜본 뒤 “소득주도 성장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비판하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1년여 전만 해도 대통령의 해외순방길에도 재벌 총수들이 동행하는 걸 구경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젠 신년회 등에서 대통령과 아무 문제없이 만난다”며 “청와대 경제분야 라인도 대부분 기획재정부 출신들이 장악하는 등 더 이상 소득주도 성장이 유지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소득주도 성장이 새해 들어 진보와 보수 양측에서 모두 공격받는 형국이지만 신년사만 놓고보면 문 대통령이 소득주도 성장을 버린 건 아직 아니다.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은 직접적으로 소득주도 성장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우리 경제를 바꾸는 길은 시간이 걸리고 논란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며 여전히 소득주도 성장에 의지가 있음을 내비쳤다.

문제는 소득주도 성장의 효과가 좀처럼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표정책인 최저임금 인상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가구소득도 늘게 되고, 가구소득 증가로 인해 소비가 늘면서 경제가 발전하는 선순환 구조가 구현돼야 한다. 하지만 한 국책 연구기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최저임금은 2017년에 16.4%, 2018년에 10.9% 각각 인상됐음에도 인상에 따른 노동자들의 수입 증가나 가구소득 증가 현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온갖 비판과 논란에 시달려온 정부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결과다. 소득주도 성장의 효과를 뒷받침할 자료가 없는 이상 정책기조를 계속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연구를 진행한 한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최저임금이 인상된 만큼 기업이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하는 등의 방법으로 임금총액을 인상 전과 비슷하게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인상효과는 없다고 봐야 한다”면서도 “다만 최저임금이 그나마 최근 2년간 이렇게 오르지 않았다면 노동자의 수입이나 가구소득이 감소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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