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는 살인’ 기업처벌법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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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날 때마다 “책임 묻겠다”던 정부와 정치권 여태 뭐 하고 있나?

2007년 4월 현대중공업 건설장비사업부 성능테스트장에서 후진하던 굴착기가 사내 하청노동자 주모씨를 치었다. 주씨는 울산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당시 주씨의 나이는 24살, 지난 11일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노동자 고 김용균씨와 같은 나이다. 주씨의 사고 후에도 현대중공업 내 노동자 사망사고는 이어졌다. 2014년 현대중공업은 안전관리부서를 대표이사 직속으로 개편하고 대대적인 인명사고 방지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고는 반복됐다. 2016년에는 하청노동자 7명을 포함, 모두 11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다. 노동계는 2017년 최악의 노동자 산재 기업으로 현대중공업을 꼽았다.

지난 13일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씨를 추모하고 사고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추모제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 이준헌 기자

지난 13일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씨를 추모하고 사고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추모제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 이준헌 기자

김용균씨가 사고를 당한 태안화력발전소 작업장은 불과 두 달 전 안전점검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 사측은 김용균씨를 비롯한 태안화력 노동자들을 상대로 작업 투입 전 안전교육을 했다고 밝혔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안전한’ 일터였다. 하지만 태안화력의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은 열악했다. 지난 10년간 태안화력에서 사고로 숨진 하청노동자는 12명에 달한다.

안전하지 못한 작업장에서 일하다 숨지거나 다친 노동자들은 한 해 1900명이 넘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대한민국은 산재사망률 1위다. 노동계는 2003년부터 지금껏 ‘산재는 살인’이라며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에 책임을 묻고 있지만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대형사고가 날 때마다 앞다퉈 “살인 기업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던 정부와 정치권은 여태 뭘 했을까.

정치인들 말잔치로 끝난 기업살인 처벌

2014년 6·4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자 TV토론 현장. 후보자들 사이에서 ‘기업살인처벌법’이 화제에 올랐다. 세월호 참사의 실질적 책임자는 세모그룹 유병언 회장이라는 여론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당시 통합진보당 정태흥 후보는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에게 “현대중공업에서 산업재해사고로 8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다”며 “영국처럼 산업재해 1건당 6억9000만원 정도 벌금을 부과하는 ‘기업살인처벌법’을 추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인 정몽준 후보를 겨냥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정몽준 후보는 “기업살인처벌이라는 제목이 무서운데 그런 이름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기왕 기업살인처벌법이면 인명사고 한 번에 6억 가지고 되겠나. 한 몇십 억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보수여당 중진이자 그룹 오너의 답변은 언론에 크게 회자됐다.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도 힘을 보탰다. 새누리당의 중진이었던 서청원 의원은 “안전조치 소홀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할 경우 관련 기업과 책임자에게 민·형사 책임을 묻는 ‘기업살인죄’와 ‘대규모 살인죄’를 신설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의 실세로 불렸던 서 의원이 언급한 ‘기업살인’은 파급력이 컸다. 서 의원은 여론의 주목을 받았고 기업 처벌에 대한 시민사회의 기대감도 커졌다.

그렇다면 인명사고를 낸 기업에 ‘몇십억쯤 되는 벌금을 물리는 법’은 마련됐을까. 그렇지 않다.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정몽준 전 의원은 2016년 20대 총선에 불출마했다. 이후 기업살인처벌법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서청원 의원은 법안 발의 자체를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서청원 의원실 관계자는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2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5월 27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역 승강장 앞에서 시민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2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5월 27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역 승강장 앞에서 시민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도 ‘보여주기식’ 입법 추진

발의된 법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옛 통합진보당 김선동 전 의원이 발의한 기업살인법은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앞장서 법안을 저지한 건 새누리당이었다. 2014년 2월 열린 322회 국회(임시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당시 새누리당 주영순 의원은 기업살인법에 대해 “현행 형법체계와도 맞지 않고 무리한 규정이 적지 않다”며 “산업계에서 기업살인죄 자체를 아주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맞장구를 쳤다. 주 의원의 발언에 방하남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은 “사업주 책임범위를 너무 과도하게 확대하고 있고 처벌수준도 형법상 형량보다 높다”며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18대·19대 국회 임기 동안 발의된 산업안전보건법 등 57건이 넘는 법안은 대부분 폐기됐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주에게 처벌을 강화하는 취지의 법안이다.

두 달 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이에 박근혜 정부는 11월 “대형 인명사고를 유발한 기업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는 이른바 ‘기업책임법’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업 경영진의 책임 여부와 관계 없이 기업 자체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대검찰청이 입법을 준비했던 기업책임법에는 사고 책임이 있는 기업이 1년 매출의 일정 비율을 벌금으로 내도록 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2014년 당시 김진태 검찰총장은 국회 국정감사 자리에서도 기업에 책임을 지우는 법령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책임법 역시 논의단계에 그쳤다. 법령 검토 이후 사라진 것이다. 시민사회와 학계에서는 정부가 애초부터 법안 마련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김재윤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6년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정부)입법활동이 대형재난 예방을 위한 근본적 대책이 무엇인지 깊이 있는 성찰을 하지 않고 진행됐다”며 “국민들에게 단지 정부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밝혔다.

20대 국회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업주의 책임범위를 넓히고 처벌수준을 강화하는 ‘범기업살인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가 법안 발의의 기점이 됐다. 홀로 승강장 안전문을 고치다 숨진 하청업체 비정규직 직원 19살 김모군의 비극은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2016년 6월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산재 사망사고에 대한 처벌을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도록 한 ‘산업안전보건범죄의 단속 및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냈다. 산업안전의 일차적인 책임을 지는 기업에 법적 책임을 분명히 묻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발의 이후 지금껏 계류 중이다.

지난 4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18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에서 참가자들이 살인기업 명단을 발표한 뒤 희생자들을 위해 헌화하고 있다. / 이상훈 기자

지난 4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18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에서 참가자들이 살인기업 명단을 발표한 뒤 희생자들을 위해 헌화하고 있다. / 이상훈 기자

구의역 사고 불과 일주일 만인 2016년 6월 1일 경기 남양주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하청노동자 4명이 숨졌다. ‘기업살인법’ 여론이 더 거세졌다. 사고 발생 당일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업의 탐욕과 안전불감증으로 무수한 인명이 손상되었다”며 “기업살인법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인명피해를 입힌 기업 등 법인에 ‘형사책임’을 부과하는 이른바 ‘인명피해 야기 기업 처벌법’이다. 하지만 인명피해 야기 기업 처벌법은 몇 차례 입법 토론을 하는 데 그쳤다. 발의도 되지 않았다. 비슷한 내용이 담긴 법안이 계류 중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법안 통과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민주당이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이라는 이름을 붙여 발의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 등 7개 패키지 법안도 다른 노동현안에 밀려 논의 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7년 5월 1일 노동절,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프로세스 모듈 건조현장에서 크레인 충돌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피해노동자들은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이 사고로 삼성중공업은 노동계가 뽑은 ‘2018 최악의 살인기업’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피해 노동자들의 빈소에는 대선후보의 발길이 이어졌다. 후보들은 하나같이 원청인 ‘삼성의 책임’을 강조했다.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는 “(사고 책임을) 법리적으로 따지지 말고 인간적인 도의를 대기업인 원청이 져야 한다”며 “삼성이 원청답게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유승민 당시 바른정당 후보 역시 “사고 책임은 전적으로 원청업체에 있다”며 “건설현장 사고에 대해 원청업체 책임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대선이 끝난 뒤 후보들의 발언은 공수표가 됐다. 이후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대선 당시 바른정당)에서 관련 법안이 제출된 사례는 없다. 이에 대해 유승민 의원 측은 “원청 처벌은 아니지만 사고 발생 사업장은 작업을 중단하도록 하는 등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며 “앞으로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입법 여부 여전히 불투명해

지난 10월 문재인 정부는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안을 내놨다. 원청의 안전관리 책임을 늘리고, 안전보건조치 위반으로 노동자가 숨질 경우 사업주가 받는 처벌을 강화했다. 노동계에서는 “기업살인 처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노동환경 개선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이번에는 재계가 반발 중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는 올 3월 이미 정부의 개정안에 담긴 처벌규정이 ‘너무 과도하다’며 입법 보완을 요구했다. 경총이 주최하는 각종 정책토론회에서는 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성토가 이어졌다. 정부는 결국 재계 입장을 반영해 처벌규정을 일부 완화한 최종안을 만들어 10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하지만 경총은 최종안에도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경총은 “개정안이 산업재해 발생의 책임을 사업주에게만 전가하고 또한 그 책임의 범위를 넘어 과도하게 처벌하는 규정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며 “향후 국회를 통해 수정·보완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지난 7일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의 문제를 지적한 ‘종합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대기업의 설문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현실 여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용균씨 사고를 계기로 정치권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비롯한 기업살인처벌법에 대한 논의가 다시 진행되고 있다. 법안 통과를 원하는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압박도 거세다. 이번에는 기업살인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마련될까.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당 일각에서는 여전히 개정안을 두고 이견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은 27일 본회의에서 법안을 처리한다는 계획을 세워둔 상태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은 “이번 개정안은 노동자 안전을 위한 정말 최소한의 장치를 담은 법”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뜻을 모아 재계의 반대를 뛰어넘고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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