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근로제, 만성 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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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최대 노동시간 제한 없어… 기간, 2주서 최소 6개월로 확대 논의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마다 비행기에 붙어 분주하게 일하는 이들이 있다. 공항의 지상조업 노동자들이다. 지상조업 노동자들의 절반가량은 대한항공의 자회사인 한국공항에서 일한다.

대표적인 장시간노동 사업장으로 알려진 한국공항에서 지난해 12월 과로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사망한 이기하씨는 주당 52시간에 가까운 노동을 했다. 주 52시간을 약간 넘겨서 일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한국공항 노동조합이 사측과 탄력근로제에 합의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이씨는 합법적으로 장시간노동을 했던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공항 지상조업 노동자들이 화물기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다. / 공공운수노조 민주한국공항지부 제공

인천공항에서 공항 지상조업 노동자들이 화물기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다. / 공공운수노조 민주한국공항지부 제공

장시간노동을 합법으로 둔갑시켜

당시 이씨의 동료들은 그가 4개월간 800시간이 넘는 노동을 했으며, 1년간 노동시간은 2400시간을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OECD 발표에 의하면 한국인의 연간 노동시간은 2024시간으로 OECD에서 세 번째로 길었다.

공공운수노조 민주한국공항지부 서우석 홍보부장을 통해 공항 지상조업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살펴봤다. 한국공항 램프화물팀에서 일하는 ㄱ씨의 11월 근무일지를 확인해 봤다.

근무일지상 ㄱ씨의 11월 첫째 주 근무시간은 40시간이다. 또한 두 번의 연장근무가 있었다. 11월 4일에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비행기 일정이 추가로 잡혔다. ㄱ씨는 7시30분에 도착한 비행기 지상조업 업무까지 마치고 나서 퇴근을 했다. 연장근무까지 따지니 대략 한 주 52시간 정도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램프화물팀 노동자들은 비행기 착륙 시 수신호를 보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을 한다. 이것을 마셜링이라고 한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비행기가 움직이지 않게 바퀴를 지면에 고정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비행기의 꼬리칸과 날개에 있는 짐칸에 들어가 화물과 승객들의 짐을 꺼내야 한다. 소형 기종 비행기의 경우 짐칸의 높이가 사람 키보다 낮다. 허리를 굽혀서 작업하는 수밖에 없다. 짐을 꺼낸 뒤에는 수화물 담당에게 인계를 하고 나면 일단 일이 끝난다.

공항에서 나가는 비행기일 경우 일이 좀 더 복잡해진다. 공항에 뒤늦게 도착하는 승객, 비행기를 아예 놓치는 승객이 늘 발생하기 때문이다. 승객이 비행기를 놓칠 경우 짐칸에 다시 사람이 들어가 승객이 미리 부친 짐을 비행기에서 내려놔야 한다. 여러 사정으로 비행기가 연착륙될 경우에도 일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여차저차 짐 싣기를 마치고 나서는 비행기가 시동을 걸어 지상에서 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까지 하면 지상조업 한 사이클이 끝난다.

짧으면 1시간, 길면 1시간30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배치된다. 중간중간 작업이 빨리 끝나서 시간이 나면 알아서 적절하게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인해 잠시 숨 돌릴 시간에는 다른 팀의 업무를 지원해야 한다. 11월 9일 ㄱ씨의 근무상황을 살펴봤다. 오전 9시50분 A활주로에 들어오는 비행기의 지상조업을 시작한 뒤, 11시37분에 같은 활주로에 들어오는 또 다른 비행기의 지상조업을 지원했다. 30분 뒤인 12시8분에는 B활주로에 가서 지상조업을 실시한 뒤, 1시18분에는 같은 활주로에 있는 다른 비행기의 지상조업을 지원했다. 그리고 1시39분 C활주로에 도착하는 또 다른 비행기의 지상조업을 하러 나갔다.

“탄력근로제 핑계로 추가 채용 안 해”

서우석 부장은 “공식적인 스케줄로는 매주 52시간 일을 하는 걸로 나오지만 여러 돌발상황으로 인해 실제는 10시간 이상 일하는 날도 많다. 하지만 사측과 친한 다수노조가 사측과 탄력근로제를 합의했기 때문에 매주 64시간까지 일을 해도 불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공항의 지상조업 항공편수는 2016년 기준으로 18만4000여편이었다. 2010년에 비해 4만900여편이 늘어났다. 하지만 현장노동자 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10년 현장직은 2530명이었다가 2015년엔 2844명으로 약간 늘었다. 올해는 9월 기준으로 3년 전보다 200명 정도 줄어든 2648명으로 나온다.

서 부장은 “저희가 보기로는 350명 정도는 추가로 채용을 해야 연장근무를 최소화하면서도 작업을 할 수 있다. 탄력근로제를 핑계로 추가 채용을 하지 않고 개개인에게 장시간노동을 요구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근로기준법상 주당 노동시간은 40시간이다. 여기에 주당 최대 12시간의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노사합의로 탄력근로제가 적용되면 탄력근로제 기간 동안에는 최대 주당 52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다. 여기에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하면 최대 주 64시간까지 일을 시켜도 합법이다.

노동계가 탄력근로제 기간 연장에 반발하는 것은 장시간노동에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다. 현재는 노사가 최대 3개월마다 합의를 통해 탄력근로제를 운영할 수 있다. 3개월 사이에 노동자 측의 상황이 바뀌면 탄력근로제가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정치권에서는 최소 6개월에서 1년까지 탄력근로제 기간을 늘리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지난해 7월 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광역버스의 졸음운전으로 버스와 승용차간 추돌사고가 빚어졌다. / 연합뉴스

지난해 7월 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광역버스의 졸음운전으로 버스와 승용차간 추돌사고가 빚어졌다. / 연합뉴스

노동계에서는 탄력근로제 기간이 늘어나면 노동부의 현행 과로사 인정기준과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6개월 단위 탄력근로제가 도입될 경우 최대 3개월간 노동자들에게 주당 64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다. 노동부의 만성과로 산재 인정기준에 따르면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 4주간 평균 주당 64시간을 초과하면 업무와 만성과로의 발병과 관련성이 강하다고 되어 있다.

서우석 부장은 “장시간노동이 비정상적이다. 워낙 오랫동안 장시간노동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탄력근로제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려버리면 노동자 스스로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탄력근로제 하에서는 하루 최대 노동시간에 제한이 없는 문제도 있다. 경기도 평택시에 위치한 협진여객의 경우 하루 17시간 운전을 하고, 다음날 휴무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주 3일간 17시간 51시간을 일하는 셈이다. 근로기준법 상으로는 하루 최대 12시간까지만 일을 시킬 수 있지만, 탄력근로제 하에서는 탄력근로제 기간 전체 동안 주 52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만 지키면 문제가 없다.

엄도영 공공운수노조 협진여객 지회장은 버스업계의 고질적인 저임금이 노동자들의 자발적 장시간노동을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진여객은 한 달에 13일 근무가 기본이다. 하지만 13일보다 많은 날을 근무할 경우 비사고수당 등 각종 수당이 많아진다. 엄 지회장은 “저도 다른 회사를 다닐 때는 일주일에 6·7일 17시간씩 운전을 한 적도 있었다. 하도 월급이 적어서다. 지금도 어떤 기사가 사정 때문에 못나오면 휴무를 반납하고 서로 운전하려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경부고속도로에서 경기도 광역버스 참사가 일어난 이후, 하루 17시간 운전이 노동자의 건강은 물론 승객의 안전에도 위협이 된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이 때문에 서울버스처럼 경기버스에서도 주야간 2교대제를 시행하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엄 지회장은 버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해 명확히 합의된 안이 도출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격일근무에 익숙해져 있는 것도 있고, 17시간 근무를 하면 야근수당이 발생한다. 하지만 주야로 일을 하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월급도 줄어든다”며 “버스의 공공성을 생각하면 서울버스처럼 경기버스도 1일 2교대제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임금수준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굳이 1일 2교대제를 해야 하느냐는 여론이 높은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동부의 과로사 인정기준과 안 맞아

노동단체 일각에서는 노동자들의 과로사를 예방하는 ‘과로사 예방법’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3월 신창현 민주당 의원이 과로사 예방법을 발의했으며, 현재 신 의원과 과로사아웃공동대책위 등 노동단체의 협의를 통해 ‘과로사 예방법’ 법률안이 준비되고 있다.

과로사 예방법은 국가가 나서서 노동자들의 과로사를 예방하는 방침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과로사에 대해 국가가 방지 대책을 수립해 시행해야 하며, 임금노동자뿐만 아니라 고용인이 없는 사업주, 영세 자영업자의 과로사에 대해서도 국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노동단체에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과로사 방지대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로사아웃대책위의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은 “생활임금이 보전되지 않고 저임금으로 장기간 노동하는 것이 익숙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근로시간 단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국가가 나서서 생활임금 보장과 노동시간 단축을 연계시키는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한국에서 과로사 추방은 요원하다”며 과로사 예방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한 사무처장은 과로사를 막기 위해서는 탄력근로제, 연장근무 등 어떤 사유가 있더라도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최대 노동시간을 확실히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의 경우 하루 최대 11시간 내지 12시간을 일할 수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노사가 탄력근로제만 합의하면 1일 노동시간에 제한이 없다.

한 사무처장은 “하루 노동시간을 11시간으로만 정하면 또 그것대로 잘못 활용하는 경우가 분명히 발생하게 된다. 탄력근로제 실시를 늘릴 게 아니라 어떤 사유가 있어도 주간 노동시간은 52시간을 넘지 않게, 1일 노동시간은 11시간을 넘지 않게 해야 노동자들을 과로사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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