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군 모욕 발언은 ‘누워서 침 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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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군을 향해 날선 발언을 늘어놓는 것이 군 최고사령관인 그 자신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군을 모욕하는 말을 연일 쏟아내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퇴역 장성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박하면서 백악관과 군 사이에 이상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 언론에서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을 모욕하는 일 자체가 ‘누워서 침 뱉기’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1월14일 프랑스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 외곽의 쉬렌 미군묘지에 들어서고 있다. / EPA연합뉴스

11월14일 프랑스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 외곽의 쉬렌 미군묘지에 들어서고 있다. / EPA연합뉴스

‘빈 라덴 작전’ 장군 공격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18일(현지시간) 폭스뉴스 프로그램 ‘폭스뉴스 선데이’에 출연해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사살작전을 이끈 윌리엄 맥레이븐 전 미 합동특수작전사령관을 비난했다. 그는 맥레이븐이 “힐러리 클린턴(전 국무장관)의 팬”이라면서 빈 라덴을 더 빨리 제거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날인 19일에도 트위터를 통해 “우리가 했던 것보다 더 오래전에 빈 라덴을 잡았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빌 클린턴(전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기 전) 빈 라덴을 사살하는 데 실패했다”며 “우리가 파키스탄에 수십억 달러를 지불했는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바보들!”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2000년 펴낸 저서 <우리에게 걸맞은 미국>에서 먼저 빈 라덴을 안보위협으로 지목했다는 자화자찬도 빠뜨리지 않았다.

집권 공화당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편승했다. 공화당은 19일 공식 트위터에 맥레이븐이 2016년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러닝메이트 최종 후보 중 한 명이었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해 왔다고 썼다.

맥레이븐은 2011년 5월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해군 특수부대를 진두지휘하며 빈 라덴을 사살하는 공적을 세웠던 인물이다. 이 같은 ‘국가적 영웅’을 비난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맥레이븐을 포함해 당시 군과 중앙정보국(CIA)에 재직했던 인사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맥레이븐은 CNN 방송에서 “나는 힐러리 클린턴이나 다른 누구도 지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버락 오바마 및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밑에서 일했고 그들의 팬”이라며 “나는 소속 정당과 상관없이 직위의 위엄을 유지하고 어려운 시기에 국가통합을 위해 직위를 사용하는 모든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맥레이븐과 함께 근무했던 마크 허틀링 예비역 중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끔찍하고 역겹다”고 비판했다. 마이클 모렐 전 CIA 부국장은 “빈 라덴의 위치를 찾아낸 건 맥레이븐 휘하부대가 아니라 CIA였으며, 맥레이븐 부대는 지시를 이행했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빈 라덴 사살작전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목소리도 있다. 빈 라덴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 숨어 지냈기 때문에 빈 라덴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고 접근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클린턴 행정부가 1990년대에 빈 라덴을 처리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간인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 많아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또 1990년대만 해도 빈 라덴은 미국 안보에 임박한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과 정보당국의 우선순위에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빈 라덴을 진작 사살하지 못했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얘기다.

윌리엄 맥레이븐 전 미국 합동특수작전사령관이 “나는 직위의 위엄을 지키는 대통령의 팬”이라며 트럼프의 말을 반박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윌리엄 맥레이븐 전 미국 합동특수작전사령관이 “나는 직위의 위엄을 지키는 대통령의 팬”이라며 트럼프의 말을 반박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최고사령관 지위 훼손해”

트럼프 대통령이 맥레이븐을 비난한 것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특징이 이번에도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한 사람에게 반드시 보복한다. 맥레이븐과도 구원이 있다. 맥레이븐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비판한 존 브레넌 전 CIA 국장의 기밀 취급권을 박탈하자 지난 8월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내 기밀 취급권도 박탈하라”며 공개 비판한 바 있다. 이때의 앙금이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군과 어색한 기류를 연출한 게 이번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11월 11일)을 앞두고 기념행사 참석차 프랑스 파리에 갔으나 정작 미군 전사자 묘지 방문은 악천후를 이유로 취소했다. 그는 비난이 쏟아지자 뒤늦게 방문했다. 그는 또 대통령 취임 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방문하지 않아 군의 불만을 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남미 이주자 행렬을 저지하겠다며 멕시코와의 접경지대에 군을 파견하기로 한 것도 군과 마찰을 빚는 요인이 됐다. 대통령이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반감이 군 내부에 조성된 것이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은 “군을 사랑한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공언해 왔다. 실제로 군이 노후무기를 교체하고 임금을 올릴 수 있도록 7000억 달러의 예산을 확보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군 사랑은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사람들을 향한 존경심이라기보다는 힘과 남성성에 대한 숭배라는 분석이 나온다. CNN은 제임스 매티스 장군을 국방장관에 임명할 때 매티스의 별명이 ‘미친 개’라서 좋다고 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이를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군을 향해 날선 발언을 늘어놓는 것이 군 최고사령관인 그 자신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군은 최고사령관이 명령하면 어디든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야 하는 조직인데, 그 최고사령관이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만 한다는 의구심을 갖는다면 안보에 플러스 요인이 될 리 없다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에서 CIA 국장과 국방장관을 지냈던 리언 패네타는 성명을 내고 “맥레이븐이 빈 라덴을 더 빨리 잡지 못했다고 비난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그 발언은 우리 군과 정보기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 아니라 최고사령관이라는 대통령 자신의 지위도 약화시킨다”고 말했다.

<최희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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