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피해자와 조력자를 학교 측은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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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미투 집담회, 성폭력 고발 후 9개월 “캠퍼스는 답하지 않았다”

올해 초 대학가에서 일어난 성폭력 고발은 ‘○○대 미투’라는 이름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가해자는 주로 권위 있는 교수이고 피해자는 학생이었다. 조민기(청주대), 하일지(동덕여대), 김태훈(세종대) 등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유명할수록 파급력도 컸다. 논란이 된 학교들은 진상을 조사하고 대응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캠퍼스 이투 관계자들이 10월 30일 홍대입구역 카페에서 <주간경향> 집담회에 참석했다.

캠퍼스 이투 관계자들이 10월 30일 홍대입구역 카페에서 <주간경향> 집담회에 참석했다.

9개월이 지났다. 캠퍼스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캠퍼스는 미투에 어떻게 응답했느냐”는 질문에 미투 당시부터 지금까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당사자들은 “캠퍼스는 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교가 진상조사에 미온적일 뿐 아니라 피해자와 조력자들을 무시한다는 대답이 공통적으로 나왔다.

문아영(동덕여대 H교수성폭력비상대책위원회), 박가인(가명·이화여자대학교 성폭력비상대책위원회), 백혜경·강윤지(성폭력반대 청주대 연극학과 졸업생 모임)씨를 만나 지난 9개월의 이야기를 들었다. 집담회는 10월 30일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 카페에서 3시간가량 진행됐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강윤지 “가해자가 사라지면서 법적 구제는 불가능하게 됐다. 이후에는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가 심각했다. 청주대 연극학과 재학생과 졸업생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문아영 “학교는 하일지 교수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결과를 기다린 후에 징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인권위는 학교에 징계를 권고했다. 그러자 학교는 검찰 수사를 기다리겠다고 말을 바꿨다. 하일지 교수는 인권위를 대상으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박가인(가명) “조형예술대학(조예대) K 교수와 음대 S 교수 모두 학교 징계위는 완료됐다. 조예대 S 교수는 징계결과에 대해 불복하고 교원소청위에 재심의를 신청했으나 학교 측이 승소했다. 음대 K 교수는 학교 징계위 완료 이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배경이 궁금하다.

백혜경 “피해자는 모두 나의 동료이자 같은 학과 학생들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욕하는 것으로 그쳤다. 미투로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죄책감 같은 여러 감정이 들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이라도 해야겠다, 이들과 함께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

문아영 “저는 같은 학과는 아니다. 피해자랑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어느 공간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내가 속한 공간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속한 곳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분노한 이들이 모여 해당 사건 해결과 궁극적으로는 학내 인권센터 설립, 성평등 문화를 만들기 위해 조직을 구성했다.”

박가인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두 교수의 성폭력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대학계 미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침묵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캠퍼스 미투는 개인이 아닌 비대위 등으로 활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강윤지 “작동되어야 하는 시스템이 학교 내에서는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그 이상을 해야 할 의무가 없다. 진상조사, 가해자 징계, 피해자 보호 등은 모두 학교 혹은 정부기관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연결다리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문아영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대부분 학교 인권센터, 성상담센터 등에 신고를 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비밀유지가 안 된다. 센터 인력이 가해교수와 친분이 있는 경우도 있다. 진상조사위원회에도 학교 측과 교원 측만 참여한다. 이들이 사건의 징계를 논의할 자질이 충분한지 모르겠다.”

박가인 “교수-제자 성폭력은 위계에 의한 것이다. 학생이 피해를 학교에 알리고 이후 이어지는 성폭력심의위원회(성심위)나 징계위원회에 혼자 대응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신변이 노출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뒤따른다. 피해자 개인에게 가중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공동대응이 필요하다.”

-캠퍼스 미투 이후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강윤지 “가해자가 사라진 이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그 와중에 피해자들에게는 무분별한 댓글과 기자들의 연락이 쏟아졌다. 어떤 채널을 믿을 수 있을지 몰라 계속 경계했다. 그때는 길거리에서 ‘조민기’라는 이름만 들어도 힘들었다.”

문아영 “동덕여대는 학교가 이미 피해자를 알고 있어서 피해자 색출은 없었지만 피해자를 보호하는 과정도 없었다. 피해자 보호도 없는데 비대위는 오죽하겠나. 학교 측이 붙인 대자보를 우리가 수정하다가 교직원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다. 계속 우리에게 학과, 학번을 대라고 했다. 하일지 교수는 비대위가 피해자를 선동한다며 고소하겠다고 했다.”

박가인 “성심위까지는 매우 발 빠르게 학교가 대처했다. 성심위가 빠르게 진행된 것은 학생이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징계위 3∼4개월간 학교는 최소한의 정보조차 피해학생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당사자와 조력자 모두 극도로 예민한 나날을 보냈다.”

-학교나 교수진이 피해자나 비대위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문아영 “그동안 비대위는 수많은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했다. 그럼에도 학교는 ‘비대위의 존재를 몰랐다’고 했다. 학교는 비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등한 관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처장과 면담을 할 때 대뜸 반말을 하더라. 반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화를 냈다. 우리를 어린애들이라고 보니까 나올 수 있는 행동이다.”

강윤지 “4년 동안 그들의 강의를 들었고 연극을 배웠다. 그래서 학과 교수진을 찾아갈 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첫 만남에서 개인이 아니라 ‘성폭력반대 청주대 연극학과 졸업생 모임’으로 온 거고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녹음을 하겠다고 했다. 서로 존대를 하자고 요구했다. 일주일 후에 교수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금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하더라.”

-하지만 비대위는 사건 당사자가 아니다.

박가인 “우리가 얘기하는 사건들은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이다. 교수들의 권력에 짓눌려 몇 년 동안 지속되어온 일들이 곪아터져 공론화됐다. 이는 사적인 사건이 아니다. 대학 전체,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다. 피해당사자만이 사건을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건 미투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시각이다.”

문아영 “한국 사회는 피해자가 모든 걸 드러내야 믿어준다. 하지만 피해자는 자신의 신상을 어디까지 드러낼지, 피해사실은 어디까지 말할지, 이후에는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피해자를 지지하는 모임이 꾸려졌을 때 피해자는 참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건 피해자의 선택이다.”

강윤지 “피해당사자들은 나설 의지가 있고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해당사자가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시스템은 문제다. 누구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문제 해결을 요구할 수 있다.”

-학생들 간의 갈등은 없나.

강윤지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졸업생들이 주도해서 고발을 했고 좋지 않은 뉴스로 노출이 되고 있으니 재학생들 입장에서는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재학생 피해자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한편으로는 재학생들이 목소리를 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문아영 “하일지 교수가 피해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투를 이용한 거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에는 학내에서 흔들리는 기류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재학생들 간 갈등은 덜한 편이다.”

-조력자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문아영 “피해당사자의 피해가 가장 크겠지만 연대해서 싸우는 사람들도 피해자다.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싸우는 과정에서 우울함과 피로감이 생기는데, 조력자는 이 힘듦을 호소할 데가 없다.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목소리가 무시되곤 한다.”

백혜경 “가장 힘든 건 주변인들의 무심함이다. 비슷한 또래의 동료 배우가 청주대, 조민기, 미투를 언급하며 욕설을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순간적으로 참을 수 없었다.”

박가인 “제대로 된 징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학교에 사건을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동시에 피해학생들은 자신들의 신변 노출과 사건에 대한 진술 등을 두려워한다. 이 가운데서 각자의 의견을 왜곡 없이 전달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

-캠퍼스 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시급하게 개선돼야 할 제도가 뭐라고 보나

문아영 “먼저 피해자 보호와 지원이다. 하일지 교수가 피해자에게 형사소송을 걸었고 피해자를 의심하는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학교는 피해자를 지원해주지 않았다. 학교가 그럴 위치가 아니라고 했다. 직장 내 성희롱의 경우, 사용자는 사건을 해결할 책임이 있다. 학교도 이런 책임을 져야 한다. 학교가 교수진을 고용하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는 어느 편에도 서기 힘들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2차 가해는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외에도 피해자의 학업권 등 보완되어야 할 제도를 말하자면 정말 너무 많다. 사실 제도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성인지 감수성 하에서는 어떤 제도가 생겨도 믿을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강윤지 “성폭력 관련 지침 자체가 부실하다. 교수진과 학생 모두에게 성인지 교육이 필요하다. 교수진은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아야 하고 학생들은 성희롱·성추행·성폭행을 당했을 때 대처법을 알려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성희롱을 당하지만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모른다.”

박가인 “학교의 적극적인 징계 의지를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해자가 교원 소청(訴請)을 걸었지만 이 과정에서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인권센터장과 면담하는 등 노력을 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답뿐이었다. 학교가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강제돼야 한다.”

<글·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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