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분 30권 펴낸 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관 “북조선 실록, 하루 14시간씩 20년 연구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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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는 사료를 바탕으로 말한다. 그 점에서 역사를 포함한 북한 연구는 ‘실증’이 어려운 대표적 분야였다. 오랜 냉전 기간 동안의 대립으로 북한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문건과 자료에 접근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국내에 들어온 자료들도 체계적으로 모이질 않았다.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59)은 북한에 대한 이념적 선전과 평가는 난무하지만 정작 객관적인 근거와 자료는 부족한 국내의 연구현실에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직접 발벗고 나선 지 2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모은 막대한 사료들을 묶어 연대 순으로 <북조선 실록> 1차분 30권을 펴냈다. 1990년대까지 다루는 사료집을 계속 펴낼 경우 1000권을 넘게 될 수도 있는 전체 기획의 첫 작업물이다.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이석우 기자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이석우 기자

-북한 연구에 활용될 편년별 사료집을 최초로 펴내게 된다.

“사료를 모으고 선별해 공개한 것은 내 일이지만 이것을 바탕으로 그동안 빈칸으로 남아있던 북한 연구를 충실히 채워가는 것은 관련 연구자들의 몫이다. 역사라는 창고에 쌓여 있는 사료들을 어떻게 꺼내서 재구성한 뒤 무슨 얘기를 할지는 각자 나름이고, 우선 없던 창고를 짓고 그 안을 채우는 일을 내가 맡은 셈이다.”

-어디에 써먹을지는 이제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다는 뜻인가.

“1차분 발간 기념 자리에서 책을 리뷰한 전문가들은 향후 북한 연구사를 시기로 나눌 때 <북조선 실록> 출간이 전후를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하더라. 단순한 수사가 아닌 것이 그동안은 연구를 하다가 어떤 인물의 행적이 묘연하면 숙청당했다고 처리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는데 이제 근거가 되는 자료가 있으니까 함부로 쉽게 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의 북한 연구는 객관적인 분야라기보다는 심할 때는 체제 옹호의 장으로 이용될 정도로 선전도구가 된 면도 있었다. 김일성 주석 사망 후 북한체제가 3개월밖에 못 간다는 얘기를 전문가들이 공공연히 했지만 전혀 다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런 관행이 이제 불가능하게 됐고, 연구문화가 바뀔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만큼 선별에 있어서도 그동안 나오지 않은 자료들이 중심이 됐다고 하는데.

“나오지 않은 자료들 중심이지만 근거를 못 밝히는 사료는 다 빼고 확실하게 전거가 알려진 사료만 채택했다. 우선 현대사의 대표적인 사료는 신문이나 잡지, 공식 보도자료 같은 기록물이다. <로동신문>이나 <민주청년>, <청년전위>, <민주조선> 등 북한의 주요 기관지를 비롯해 북한이 발간한 각종 자료를 모두 망라하면서 각종 외교문서 등 해외에서 수집한 자료들도 선별해 포함했다. 역사 전공자의 역할이 모은 자료를 정본화해서 사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역사 말고도 정치·군사·정책·문화 등 북한 연구 전반에서 쓰일 자료를 최대한 엄선해 제공하는 데 목표를 뒀기 때문에 기준도 일관성을 지키려 혼자 책임작업을 맡았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국내에서의 연구가 어려웠을 것 같다.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에만 국한해 보더라도 국내에 <로동신문> 전체를 모아둔 기관이나 언론이 전무했다. 이건 기록물을 대하는 문화적 특성 때문인 것 같은데, 미군만 해도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 문서부대를 두고 노획문서를 수집해 정보를 모을 정도로 전쟁 과정에서도 기록을 중시하는 전통을 유지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자료를 모으면서 유실된 북한 간행물을 찾아 언론사나 연구기관 자료실들을 돌아다니다 느낀 점은 지금도 기록에 대해 투명하고 철저한 관리가 미흡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며 정권이 어두운 구석이 있는 기록들을 통제하거나 삭제하는 관행도 있었지만, 사실 지금도 연구환경이 좋다고 하긴 어려운 게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관련 규정을 보면 아직 냉전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 점에서 통제사회인 북한의 기록에 접근하기는 더 어려웠겠다.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기록을 중시하는 공통점은 있다. 중앙이 아니라 말단기구에서 작은 회의를 해도 3부 이상씩 회의록을 남길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된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문화가 아니라 당 중앙위 소속 연구위원들만 기록을 다룰 수 있으니까 비밀정보가 외부로 나가기 어렵다. 과거 기록에 오류가 있어도 그걸 찾아낼 사람도 적고 비판도 하지 못한다.”

-정권 차원에서 의도적인 통제를 했을 수도 있겠다.

“이미 만들어진 기록을 왜곡한다기보다는 과거와 정책방향이 달라지면 이전의 기록들을 회수하는 방식이 많다. 김정일 위원장 시절 ‘인민생활이 풍요로워지면 당대회를 열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쌀밥에 고깃국 먹는 그런 시절은 도통 오지 않고 그렇다고 당대회를 계속 미룰 수만도 없으니 김정일 선집의 이전 판본은 회수하고 새로운 판본을 찍어내는 식이다. 최근 모습을 보자면 70년 넘게 반미구호를 내걸어 왔지만 요즘 들어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 말을 들으면 반미 선전구호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광운 연구관이 1차분으로 펴낸 <북조선 실록> 30권을 선보이고 있다. / 이석우 기자

김광운 연구관이 1차분으로 펴낸 <북조선 실록> 30권을 선보이고 있다. / 이석우 기자

-그래도 자료 수집이 충실히 진행됐다면 과거의 자료와 비교해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겠다.

“1994년 소련이 해체되던 당시 문서보관소의 기록물에 일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 북한 외무성 부상을 했던 박길용이 북한을 탈출하며 소련 공산당에 제출한 조선노동당 내부의 고급정보를 볼 수 있었다. 그밖에 외교문서처럼 외국으로 나간 공식문서들을 북한 내부 기록과 비교하면 빈칸으로 남아있던 자리를 채울 수 있게 된다. 물론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만든 기록같이 인명을 러시아어로 음차해 기록하면 읽기도 쉽지 않은 등 여러 난관도 있지만 공신력 있는 문서들은 그만큼 활용도가 높다.”

-수십 년 전의 자료를 읽고 선별하는 작업만 해도 물리적인 어려움은 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금 유일하게 먹고 있는 약도 안과에서 받은 약이다. 해방 직후 국한문 혼용을 하던 시기 깨알같은 글씨로 나온 과거 문서를 보면 눈 좋은 사람도 해독하기조차 어렵다. 20년 동안 해온 ‘선수’니까 보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자료들을 일일이 선별한 뒤 다시 다른 연구에도 활용하기 위해 텍스트화하는 작업까지 거친다. 하루 14시간씩 일해 나온 결과물이다.”

-남과 북이 달리 걸어온 길을 보면서 통일의 가능성이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나.

“1차분에서 다룬 시기인 해방 직후부터의 역사만 남측과 비교해 보더라도 양측의 특징은 잘 드러난다. 해방 직후 상당수 아시아 국가들의 과제는 봉건체제를 해체하고 제국주의에 맞서는 한편 민주적 체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이 과제들 중 민주주의 수립에 중점을 둬서 결과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나라가 됐다. 북한은 반대로 자주와 반제국주의에 중점을 둬서 나름 비동맹국가들 중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서로 상반된 길을 걸은 경험이 통일 이후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통일 이후에도 이 작업은 계속 가치를 인정받을 것 같다.

“북한이 기록에 충실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체제 유지를 위해 ‘영광과 승리의 역사’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기록을 해 왔다. 그런데 사람 사는 모습은 좌절과 고뇌, 어려움이 있고 지저분한 면도 있는 게 실제 역사 아닌가. 연구자들에게는 정권 차원의 관점이 반영된 자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객관적인 시각이 반영된 자료가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게다가 현재 평화국면이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북한 주민들에게도 열려 있지 않은 내부 기록과 자료들이 하루아침에 외국 연구자들에게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현재의 작업을 계속해 완수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북조선 실록>은

<북조선 실록>은 북한 연구에 필수적인 각종 사료를 연도별로 정리한 사료집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간한 문서와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사료를 집대성한 이 장기 프로젝트에서 1차분으로 간행된 30권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9년 6월 30일까지의 기간을 다뤘다. 200자 원고지 13만7228장, 글자 수는 2744만자에 달하는 막대한 분량이다.

<로동신문>은 1945년 11월 창간 이후 결호 없이 발행되면서 1일 평균 62개 기사와 12장의 사진을 실었다. 그밖에도 잡지와 기관지인 <근로자> <조선인민군> <평양신문> 등의 간행물을 포함해 방대한 분량 가운데 선별한 결과물을 사료집에 담았다. 김광운 연구관이 20년간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북한 관련 외교문서와 해외 소장자료, 일지 등도 사진과 각주를 붙여 책에 넣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북한 기록물에서도 발견됐던 조선노동당이나 인민군 등 주요 기관의 일지와 연표 기록, 주요 인사 명단에 있어서의 오류 등도 바로잡았다. 기획과 선별, 편집작업을 김 연구관의 책임으로 수행했고, 경남대와 북한대학원대가 간행을, 서적 제작과 총판은 출판사 민속원과 선인이 맡았다.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이만열 상지대 이사장은 “북한 1차 자료집은 몇몇 기관에서 산발적으로 간행한 것이 있지만 <북조선 실록>은 체계적으로 간행한 최초의 북한 사료집으로 연구가 진행되기 어려웠던 해방 직후 북한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 흑룡강성 사회과학원과의 중간협력을 통해 북한 당 역사연구소와도 통할 수 있었는데 김 연구관의 노력이 더해져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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