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의 심장이 다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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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대표팀이 지거나 형편없는 경기를 할 경우 그동안은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파나마전 무승부 이후에는 비난보다는 예방주사를 맞아 다행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대표팀을 향한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국가대표 미드필더 정우영(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지난 1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미 강호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뒤 팀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가대표 미드필더 정우영(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지난 1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미 강호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뒤 팀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올해 초만 하더라도 한국축구를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계속되는 졸전에 응원의 목소리 대신 비판이 가득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는 ‘당연히 1승도 못 거둘 것’이라는 예상이 팽배했다. 월드컵 조별예선 첫 2경기였던 스웨덴, 멕시코전에서 연패하면서 사람들의 비웃음은 커져만 갔다.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의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독일을 격파하면서부터였다. 그렇게 살아난 불씨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거쳐 파울루 벤투 감독 체제하의 성인 대표팀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추운 겨울을 보내왔던 한국축구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축구를 향한 주변 분위기는 싸늘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된 후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신태용 감독은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내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 영입설이 진지하게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도 결국은 팬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벤투 감독의 부임, 달라진 대표팀

월드컵은 끝났다. 그러나 축구는 계속된다. 뒤이어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한국 23세 이하 대표팀이 각고의 노력 끝에 금메달을 따내면서 축구 인기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8월 부임한 벤투 감독에 대한 평가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과거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으로 유로 2012에서 4강 진출이라는 성적을 냈던 이름 있는 지도자이긴 했지만, ‘독이 든 성배’로 불리는 한국대표팀 감독 자리를 그가 과연 버텨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많았다.

현재진행형이지만 지금까지는 대단히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내려진다. 벤투 감독이 부임 후 치른 A매치 평가전 4경기에서 한국은 2승2무로 무패를 달리고 있다. 파나마전처럼 앞서고 있다가 방심해 무승부를 기록한 경기도 있었지만, 우루과이나 칠레 같은 세계적 강호들과 대결해서도 패하지 않은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벤투 감독은 대표팀에 하나의 ‘틀’을 단기간에 확실하게 입혔다. 기본 4-2-3-1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빠르게 주전선수들을 확정해갔다. 그러면서도 실험을 잊지 않았다. 파나마전에서는 주전선수 일부를 제외하고 새 얼굴들을 기용하면서 가능성을 엿봤다. 보통 대표팀이 지거나 형편없는 경기를 할 경우 그동안은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파나마전 무승부 이후에는 비난보다는 예방주사를 맞아 다행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대표팀을 향한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지난 9월 8일 파주 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NFC)에서는 ‘오픈 트레이닝’ 행사가 열렸다. 평소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대표팀의 훈련을 하루 정해서 팬들이 볼 수 있게 공개하는 행사다.

훈련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파주 NFC 주변은 훈련 전부터 구름 같은 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날 모인 팬들의 숫자는 자그마치 1000여명에 가까웠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몰렸다. 협회는 이날 인원 정리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도 들린다. 오픈 트레이닝은 지난 10월 13일에도 한 번 더 열렸는데, 이날 모인 팬들의 숫자도 1000여명을 훌쩍 넘어섰다. 손흥민을 포함해 이승우(베로나), 기성용 등 대표팀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팬들이 질러대는 함성으로 파주 NFC가 가득 찼다. 전날 밤 파주 NFC 주변에 텐트를 치고 밤새워 기다린 ‘소녀팬’들은 1990년대 후반 H.O.T나 젝스키스 콘서트를 보기 위해 콘서트장 주변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밤새워 기다리던 고등학생들을 연상케 했다.

다시 찾아온 절호의 기회

경기장에도 사람들이 가득 찼다. 벤투 감독 부임 후 치른 A매치 4경기는 모두 만원사례를 이뤘다. 지난 12일 우루과이전이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무려 6만명이 넘는 팬들이 가득 차 카드섹션까지 펼치며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응원전을 펼쳤다.

단순히 팬의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팬층도 다양해졌다. 기존에는 주로 축구를 좋아하는 청·장년 남성층이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해졌음은 물론, 여성팬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 팬층의 다양화는 향후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도 그 폭이 넓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축구는 야구에 비해 팬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전 승리부터 시작된 한국축구의 달라진 행보는 조금씩 변화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최근 대표팀 취재를 했던 미디어 종사자들 사이에서 “축구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엄밀히 말해, 지금 불고 있는 축구 인기는 대표팀에 국한됐다. 한국축구의 근간인 K리그는 여전히 팬들의 발길이 뜸하다. 라이벌인 프로야구는 아시안게임 악재가 있었음에도 올해 또 800만 관중을 돌파했다. K리그를 보는 팬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이제는 프로축구연맹 차원에서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할 때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9월 ‘한국축구 정책제안 간담회’를 가졌다. 팬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비판을 수용해 9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번씩 총 세 번 열린다. 9월 주제는 대표팀이었는데, 미디어와 사전 신청을 통해 선정된 축구 관계자, 일반인 등 총 100여명이 참석해 뜨거운 열기를 과시했다. 사람들이 내는 의견은 끊임없이 쏟아졌고, 예정된 2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팬들의 목소리만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팬들이 낸 의견을 수렴해 한국축구에 발전된 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간담회의 취지다.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지난해부터 바뀌면서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밖에 드릴 수 없지만, 10월과 11월에 열리는 간담회 때 나올 의견까지 연말에 모두 모아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직은 미약하다. 그래도 한국축구의 심장이 지금 다시 뛰기 시작했다.

<윤은용 스포츠경향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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