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폭정, 무함마드 왕세자의 본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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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우디의 석유 의존 경제를 체질개선하고 여성 운전, 영화관 영업 등을 허용한 ‘젊은 개혁군주’의 모습은 가면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가 10월 16일 사우디를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수도 리야드 야맘마궁에서 대화하고 있다. / 리야드|EPA연합뉴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가 10월 16일 사우디를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수도 리야드 야맘마궁에서 대화하고 있다. / 리야드|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측근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16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33)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레이엄 의원은 “사우디는 왜 많은 좋은 사람들을 두고 무함마드 왕세자를 골랐느냐”면서 “그는 자신은 물론 사우디를 더럽히고 있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 직면해 있다. 사우디의 석유 의존 경제를 체질개선하고 여성 운전, 영화관 영업 등을 허용한 ‘젊은 개혁군주’의 모습은 가면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카슈끄지 사건으로 국제사회 제재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그의 정치·경제적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젊은 개혁군주의 탄생

무함마드는 저유가 기조 장기화에 흔들리는 사우디를 일으켜 세울 개혁군주로 각광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왕은 아니지만 아버지 살만 국왕으로부터 조기에 왕위를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사실상 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많지 않은 나이지만 일찍부터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은 덕분이다.

무함마드는 2015년 1월 숨진 압둘라 국왕의 뒤를 이어 아버지 살만이 국왕이 되면서 세계 최연소 국방장관이 됐다. 경제개발위원회 의장을 맡았으며,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회장이기도 하다. 사우디 왕가에서는 드물게 국내파로 킹사우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009년 12월 아버지 살만이 리야드 주지사에 취임했을 당시 특별고문에 임명됐다. 2011년 10월 살만이 국방장관에 임명됐을 때도 아버지를 보좌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2014년 국무장관에 지명되면서 처음으로 내각의 일원이 됐다.

무함마드는 젊은층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2011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사우디 청년들이 경영·문학·과학기술 등 다방면의 학문을 배우도록 하고 관련 소질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저소득 가정에 주택을 공급하는 자선단체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비영리 공립학교인 리야드스쿨 회장도 역임했다.

2016년 발표한 탈석유 경제개발계획 ‘비전 2030’은 무함마드의 개혁군주로서의 면모를 가장 부각시켜줬다. 무함마드는 아람코 지분 5%를 매각해 2조 달러(약 2260조원) 규모의 국부펀드 기금을 마련해 도시개발, 비석유 생산부문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모은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시혜적으로 주던 각종 보조금도 삭감하겠다고 했다. 석유 의존 경제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사업부문 다각화, 경제활성화라는 맥락에서 여성들의 운전과 영화관 영업도 허용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투자처를 찾았다. 지난 4월 3주 방문 일정으로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 배우 겸 영화제작자 모건 프리먼을 만났다. 아랍 왕실 전통의상을 벗고 노타이에 정장 차림으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나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을 방문하기 앞서 찾은 우방국 이집트에서는 홍해변에 위치한 초대형 신도시 ‘네옴’ 개발사업에 이집트 시나이반도 남부를 포함하고, 100억 달러 공동펀드를 조성하기로 합의하는 등 통큰 투자도 했다.

무함마드는 지난해 6월 왕위 승계 서열순위 1위였던 사촌형 무함마드 빈나예프를 축출하고 왕세자 자리를 넘겨받았다. 이후 권력강화 시도는 가족 간 ‘피의 숙청’으로 이어졌다. 무함마드는 그해 11월 반부패위원회를 구성한 직후 왕자 11명, 현직 장관 4명, 전직 장관 수십 명을 부패 혐의로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 중에는 아랍국 최고 부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무함마드의 사촌형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도 있었다.

체포됐던 왕자들은 벌금 명목으로 거액의 재산을 내놓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반부패위원회는 무제한에 가까운 수사권과 여행금지·자산동결 등의 조치를 행사할 수 있어 향후 무함마드 권력 강화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모두 제거하는 기구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혁과 폭정, 무함마드 왕세자의 본모습은?

왕자 11명과 현직 장관 4명 체포

숙청은 대규모 인사 교체로도 이어졌다. 무함마드는 국가방위부 장관을 맡고 있던 미텝 빈압둘라 왕자를 경질하고 자신의 측근을 앉혔다. 미텝은 1974년 22세 나이로 사관학교를 졸업해 임관한 이래 평생을 군에 몸담은 사우디 군부 핵심인사다. 그는 지난 2010년 아버지 압둘라 전 국왕으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고 군을 통솔해 왔다.

무함마드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 머물며 <워싱턴포스트>에 꾸준히 사우디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온 카슈끄지도 무함마드의 제거 대상 리스트에 올라 살해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무함마드는 지난해 6월 아랍권 국가의 카타르 단교, 2016년 초 사우디의 시아파 성직자 47명 집단처형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슈끄지 살해 지시 의혹에 대해 해명하라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주요 7개국(G7) 외무장관들은 17일 철저하고 투명한 조사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사우디 방문을 연기했다.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카슈끄지 살해의혹 장소로 언급되는 터키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의 면책특권을 유예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동 패권전략의 핵심 파트너 국가로서 사우디를 지원하는 미국 내에서도 비판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 상원에서는 사우디에 무기 판매를 규제해야 한다는 공화·민주당 의원들이 20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대선 공화당 후보에 도전했던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신뢰도는 돈으로 살 수 없다”며 제재 필요성을 역설했다.

무함마드의 비즈니스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영국 버진그룹 리처드 브랜슨 회장은 지난 11일 사우디 서부 홍해 인근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우주여행사업 프로젝트 이사직에서 물러나고, 사우디 국부펀드와 향후 사업 관련 논의도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사우디 국부펀드는 이 프로젝트에 1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었다. 브랜슨 회장은 “카쇼기 암살의혹과 관련해서 터키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서구 기업들의 사우디 정부와의 협력 의지에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사건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사업 논의를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어니스트 모니즈 전 미국 에너지장관, 네일리 크루스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도 ‘네옴’ 프로젝트 관련 자문역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박효재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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