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비 주지 않는 ‘나쁜 아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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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결정에도 절반 가까이 지급 의무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양육비 주지 않는 ‘나쁜 아빠들’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2일 정오, 서울 청량리 청과시장에서 소동이 일었다. 키가 180㎝는 돼 보이는 시장상인 ㄱ씨가 시장통 한가운데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방송국 취재진이 자신의 가게를 촬영하자 ㄱ씨는 취재진의 촬영용 카메라를 양손에 꽉 움켜쥐었다. 취재진이 손을 놓고 이야기하자고 말했지만 ㄱ씨는 연신 “달라고! 내 가게를 왜 찍는데!”라며 고함을 질렀다.

이날 ㄱ씨의 전 부인 등 ‘양육비 해결모임’ 카페 회원 5명은 ㄱ씨를 만나러 왔다. 올해 ‘제1회 서울상인’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로 건실한 상인으로 알려진 ㄱ씨는 사실 이혼한 전 부인에게 수천만 원 상당의 양육비를 미지급한 소위 ‘나쁜 아빠’다.

모임을 주도한 건 김희숙씨(가명)다. 김씨도 이혼한 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법원이 김씨 남편에게 양육비는 물론이고 부채까지 떠안으라고 판결을 내렸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다. 김씨는 “나쁜 아빠들이 법원 판결도 무시하고 있어서 엄마들과 함께 직접 양육비를 받으러 왔다. 제가 다른 이들의 양육비 받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면 이분들이 제 양육비 문제에도 힘을 빌려주실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양육비 해결모임 카페 회원들이 ㄱ씨를 찾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사 취재진 4명도 합류했다. 김씨가 ㄱ씨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ㄱ씨가 카메라의 존재를 확인하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ㄱ씨는 카메라를 보고 흥분했는지 고함을 질렀고, 김씨와 함께 찾아온 다른 양육비 피해 여성들도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졌다. 김씨도 누군가의 발에 차였는지 발목에 상처를 입었다. 경찰이 출동해 ㄱ씨를 제압하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됐다.

4명 중 1명은 양육비 전혀 못 받아
김씨는 “전날 다른 사람들과 가게를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자로 ‘많이 오실수록 아드레날린이 나와서 재밌겠네요’란 답장이 왔다. 엄마들 5명이서 같이 갔는데도 아빠 쪽에서 저렇게 무섭게 나오면 양육비를 입에 올리기조차 어렵다. 과연 엄마들이 나쁜 아빠들을 1대 1로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ㄱ씨처럼 양육비 지급 의무가 있으면서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나쁜 아빠’의 비율은 전체 양육비 채무자의 절반에 가깝다. 최신 통계조사인 2015년 한부모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양육비 채권을 가진 한부모 중 절반 가까이가 제대로 양육비를 받지 못했다. 양육비 채권자 중 4분의 1이 넘는 27.3%는 전 배우자로부터 양육비를 아예 받지 못한다고 답했다. 17.6%도 부정기적으로 양육비를 받는다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한부모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90만원으로 2014년 기준 전체 가구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양육권자가 양육비 없이 자녀들까지 키우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법원 결정에도 불구하고 양육비 채무자들(상대측 부모에게 양육비를 낼 의무가 있는 사람)은 왜 양육비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올해 초 아내와 이혼한 뒤 양육비를 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이성호씨(가명)를 만났다. 이씨는 아내와의 사이에 5살난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아이의 돌잔치를 치른 이후부터 부부 간의 갈등은 깊어졌다. 남편은 아내가 용도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생활비를 쓰는 게 불만이었고, 아내는 ‘왜 나를 못 믿느냐’며 맞섰다. 아내는 집 근처에 사는 시어머니의 간섭도 불편했다. 갈등은 별거로 이어졌고 결국 이혼으로 끝났다.

아내와 합의이혼한 이씨는 양육비로 월 35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씨는 별거 때부터 양육비를 주지 않을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단 전세보증금은 자신의 부모 이름으로 바꿔 놨다. 소득내역도 숨기기 위해 자신이 다니던 중소기업 사장을 직접 면담했다. 이씨는 “사장에게 4대 보험을 뺀 액수만 현금으로 급여를 줄 수 있냐고 했다. 우리 집안사정을 어느 정도 알던 사장은 원하면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이씨는 “양육비가 자동이체처럼 빠져나가는 게 아니다. 양육비 채무자가 채권자 쪽에 알아서 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양육비 채무자가 재산과 소득을 숨긴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우선 양육비 채권자가 양육비이행관리원이나 법률구조공단 등에서 법률 조언을 받아 양육비 이행명령을 받아야 한다. 이후에도 양육비 채무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양육비를 내지 않는다면 법원은 과태료나 감치명령을 내릴 수 있다.

종적 감추면 법원판결도 무용지물
이씨는 “아내가 너무 미운 생각에 법적으로 어떤 조치를 받더라도 아내에게는 돈을 주기 싫었다. 아내가 과연 내 딸을 위해 양육비를 쓸지 개인적 용도로 쓸지 알 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씨는 양호한 편이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라는 지인들의 권유에 이씨는 아내에게 정해진 양육비를 제대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채무자가 아예 종적을 감춘 경우 양육비를 받을 길은 암담하다.

정유정씨가 인터뷰 도중 이혼소송 관련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 백철 기자

정유정씨가 인터뷰 도중 이혼소송 관련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 백철 기자

강원도의 한 도시에서 40대 여성 정유정씨를 만났다. 정씨는 법원으로부터 양육비를 두 번이나 인정받았지만 전 남편으로부터 단 1원도 받지 못했다. 정씨 부부가 이혼한 것은 정씨가 둘째를 출산한 직후인 2006년이었다. 당시 정씨의 남편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빚을 진 뒤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잠적했다. 정씨가 남편이 잠적하기 전 “한부모가정 복지혜택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합의이혼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미 정씨가 살던 집이나 기타 재산은 남편 채권자들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정씨는 비정규직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100만원도 채 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며 두 딸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6년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사실상 잊고 지냈던 정씨가 양육비 청구소송을 결심한 건 2012년 6월이었다. 시에서 ‘아이들 아버지의 소득 상승으로 기초수급자 자격이 중지됨’이라고 적힌 복지대상자 자격변동 사전 안내문을 정씨에게 보냈다. 소식이 끊긴 남편이 어디선가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다. 정씨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시청으로 달려갔다. 내가 남편과 정말로 금전거래가 끊겼다는 걸 10일 안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수급자 자격이 취소되어 주거혜택 등을 받지 못한다는 거다. 갖고 있던 모든 통장 거래내역과 확보할 수 있는 통화기록을 모두 가져다 내서 겨우 수급자 자격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소송과정에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남편의 과거 연락처는 없는 번호가 됐다. 소송과정에서 알게 된 남편의 주소를 찾아가도 아무도 살지 않았다. 소송과정에서 남편이 개명한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과거 시댁 식구들에게 남편의 소재를 물어도 “우리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2013년 8월 정씨는 밀린 양육비 2000만원과 매월 60만원의 양육비를 남편으로부터 받는다는 판결을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받아냈지만 생활은 달라진 게 없었다.

올해 정씨의 큰딸이 중학생이 됐다. 학교에서는 큰딸이 무용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매월 50만원 이상 들어가는 준비물비, 수업료 등은 정씨가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정씨는 다시 법률구조공단을 통해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올 7월, 법원은 다시 양육비 이행명령을 결정했다. 5년이 다시 지나는 동안 정씨가 받아야 할 양육비는 6000만원 가까이 쌓였다. 그러나 소송과정에서 정씨는 법원의 결정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법원이 정씨의 남편에게 소환장을 5차례나 발송했지만 ‘폐문부재’란 이유로 남편에게 닿지 않았던 것이다.

아예 한국을 떠나버린 ‘나쁜 아빠’도 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여권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에 사는 40대 박영희씨(가명)는 자신을 “좋은 아빠 밑에서 자란 딸”이라고 소개했다. 박씨는 둘째가 돌도 채 되지 않은 2013년 말, 남편의 외도 사실을 눈치챘다. 경남의 한 도시로 발령났다는 남편이 알고 보니 골프장 캐디와 두 집 살림을 차린 것이다. 박씨는 “아이를 낳은 뒤 살도 많이 찌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전부터 남편의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자주 다퉜는데 더 이상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남편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합의이혼 후 자녀 1명당 월 50만원의 양육비를 주기로 했지만 박씨가 지난 4년간 양육비로 받은 총액수는 285만원이다. 2년 전 남편이 수입도 없고 빚이 많다며 고향집으로 돌아간 이후엔 남편 얼굴도 보기 싫어서 아예 양육비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이 생일 때라도 연락을 해오던 남편과의 소식은 그때부터 끊겼다.

그러던 지난해 말, 남편의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편이 재혼한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남편 지인이 알려준 SNS 계정을 본 박씨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미 이혼한 남편이 다른 여성을 만날 순 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양육비는 한푼도 보내지 않으면서 새 여자친구와는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박씨는 “남편이 돈이 없어서 양육비를 못주는 줄 알았다. 해외여행도 하필 미국 디즈니랜드를 갔더라. 우리 딸이 디즈니 캐릭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뻔히 아는 사람이… 미국 여행할 돈은 있고 자식들에게 밥 한 번 사줄 돈이 없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국가 양육비 선지급제’ 청와대 청원
올해 3월 박씨는 양육비이행관리원의 문을 두드렸다. 이행원에서 박씨의 시댁에 양육비 이행 청구서를 보내자 1년 반 만에 남편이 먼저 박씨에게 연락을 해 왔다. 남편은 박씨에게 “앞으로 잘하겠다”며 7월까지 양육비를 보내다가 여자친구와 해외로 떠난 뒤 자취를 감췄다. 박씨는 “취약한 사람들을 위한 방향으로 법이 바뀌어야 한다. 양육비를 주겠다고 사기를 쳐도 외국으로 도망가 버리면 그만이다. 법이 엄마들을 안 지켜주는 상황에서 ‘나쁜 아빠들’ 사이트에 신상공개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양육비 채무자의 양육비 지급 이행과정에서 공권력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9월 28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양육비 이행 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양육비 채무자의 재산을 파악하는 근거법이다. 하지만 양육비 채권자가 양육비 긴급구제를 받은 상황이 아니라면 채무자의 동의가 없이 재산을 파악할 수 없다.

지난 8월 정훈태 변호사(법률사무소 지청)는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국가 양육비 선지급제’ 도입을 촉구하는 청원을 올렸다. 정 변호사는 양육비 선지급제는 형편이 어려워 양육비를 주지 못하는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돈이 있으면서도 양육비를 안 주는 채무자들도 있지만 실제로 재산이 없는 경우도 있다”며 “양육비가 정상적으로 지급되지 않을 경우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아이들이다. 국가가 먼저 양육비를 지급하고 양육비 채무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 양육비 이행 심의위원이기도 한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법무사)는 양육비 미지급자를 형사처벌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대표는 “임금체불 문제가 노동자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양육비 미지급 역시 아동에게 있어 직접적인 문제다. 양육비와 임금 문제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근로기준법을 참고해서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해 실질적인 압박을 할 수 있는 제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오 대표는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해 운전면허 정지뿐만 아니라 비자 발급 불허 등 행정조치도 지금보다 강하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오 대표는 양육비는 자녀에 대한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설령 이혼의 책임이 양육비 채권자에게 있다 하더라도 양육비는 지급돼야 한다. 양육비는 전 배우자를 위한 돈이 아니라 자녀를 위한 돈이기 때문”이라며 “한쪽이 직접 아이를 키우면 다른 쪽은 양육비를 통해 최소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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