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대스타를 만든 부모들의 ‘가정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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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기를 강조한 아버지 덕분에 손흥민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또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김연아, 류현진 등 스포츠스타들 뒤에는 헌신적인 부모가 어김없이 있었다.


미국 프로야구 LA다저스의 류현진이 지난 9월 23일(현지시각) 샌디에이고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미국 프로야구 LA다저스의 류현진이 지난 9월 23일(현지시각) 샌디에이고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다니엘 레비 회장은 손흥민의 아버지를 영입해야 한다.’

지난 9월 7일 미국 스포츠 네트워크 ‘SB네이션’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커뮤니티에 오른 기고문의 제목이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손흥민이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그를 향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또한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의 훈육방식이 토트넘 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이들은 아버지 손씨가 손흥민이 16세였을 때까지 직접 코칭을 한 사실 등에 주목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관중석에서 아들을 지켜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손씨는 “운동선수들의 성공에는 부모들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신념을 가진 이들은 손씨뿐만 아니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김연아, 류현진 등 스포츠스타들 뒤에는 부모의 헌신이 어김없이 있었다.

손흥민 손흥민의 아버지는 한마디로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실제로 프로축구 선수 출신이라 손흥민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들이 걸음마를 막 시작할 때 축구공을 장난감 삼아 놀게 하다가 재능을 발견했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을 걷게 했다. 12살 소년이었던 손흥민에게 아버지는 기본기부터 익히게 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손흥민에게 개인지도를 하면서 그를 더 좋은 축구선수로 성장시켰다. 슈팅과 패스 등 기본기를 연마하는 데에만 시간을 할애했다.

손흥민이 독일 분데스리가에 갔을 때에도 아버지는 함께했다. 훈련장 건너편에 있는 값싼 모텔에서 아들과 생활하면서 직접 단련시켰다. 매일 새벽 손흥민을 깨워 팀 훈련 전에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을 하도록 시켰다. 기본기를 강조한 아버지 덕분에 더 단단해진 손흥민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한국축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주축 선수가 됐다.

김연아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피겨는 생소한 종목이었다. 하지만 피겨를 사랑한 딸을 향한 어머니의 헌신 덕에 한국에서 피겨가 유망한 종목으로 떠올랐다. ‘피겨 여왕’으로 불리는 김연아와 그의 어머니 박미희씨 덕분이다. 김연아는 7살이던 1996년 경기도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특강을 통해 처음 스케이트를 탔다. 마침 TV에서 나오던 미국의 ‘피겨 퀸’ 미셸 콴이 김연아의 꿈을 키웠다. 재능을 발견한 류종현 코치가 김연아의 선수 입문을 어머니 박씨에게 권했다.

박씨는 김연아가 피겨를 시작한 이후로 닥쳐온 고난을 모두 넘어서는 데 도왔다. 김연아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사춘기가 찾아온 10대 소녀에게 빙상장과 학교만 오가는 생활은 너무나 가혹했다. 피겨를 관두겠다고 하는 딸을 박씨가 다독여 다시 링크에 세웠다.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가세가 기울 때에도 박씨는 딸을 뒷바라지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운동을 하면서 부상이 거듭될 때에도 박씨는 링크에서 딸의 아픔을 함께 느끼면서 속으로만 눈물을 삼켰다. 시니어 데뷔 직후 김연아는 고관절과 허리 부상을 안고 살았다. 김연아가 일반인이 출입하는 아이스링크에서 홀로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서 얼음 위에서 울 때 박씨는 속으로 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딸이 다시 일어서기를 바랐다.

1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전지훈련을 하면셔 보낼 때에도 박씨는 딸을 위해 묵묵히 짐을 쌌다. 대회가 열리면 관중석 한 구석에서 딸을 지켜봤다. 박씨의 이 같은 지원 덕분에 김연아는 각종 국제대회에서 차츰 자신의 이름을 알려갔다. 그리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선수들의 최종 꿈이라는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선 뒤에 박씨는 매니지먼트사인 올댓스포츠를 설립하면서 대표이사로 취임해 딸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또한 딸의 뒤를 이을 후배까지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 덕분에 김연아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고, 후회 없이 은퇴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류현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서 뛰고 있는 류현진은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밥을 먹을 때에도, 심지어 타석에 설 때에도 우타자로 선다. 하지만 류현진은 마운드에 오르면 왼손으로 공을 던진다. 왼손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하는 공을 던진다. 이는 아버지 류재천씨의 영향이 컸다. 럭비선수 출신인 류씨는 둘째아들인 류현진과 종종 야구를 보러 갔고 캐치볼도 종종 했다. 경기도 부천 창영초등학교에 다니던 류현진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류씨의 ‘왼손 훈육법’이 시작됐다. 류씨는 바로 왼손 글러브를 사서 아들의 품에 안겼다. 왼손 투수는 희소성으로 가치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을 훈육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집 옥상에 류현진의 개인 연습장을 만들어서 밤낮으로 언제든지 야구 연습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물망도 있고 조명도 달린 류현진만의 연습장이었다. 류현진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04년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을 받았을 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경을 딛고 아들이 재활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류현진이 200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한화와 계약을 해 프로 무대에 데뷔를 하자 계약 첫해에 아버지는 2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를 지켜보곤 했다.

아버지가 줄곧 강조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류씨는 “홈런은 맞아도 볼넷은 절대 주지 말라”고 했다. 경기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투수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류현진은 KBO리그에서 뛰던 7시즌 동안 190경기에서 383개의 볼넷을 내줬다. 한 경기당 2.01개의 볼넷을 내준 셈이다. 아버지의 이 같은 헌신은 류현진을 KBO리그 최고의 투수는 물론 메이저리그 무대에서도 손색없는 선수 반열에까지 올려놓았다. 이 때문에 메이저리그 진출 첫해 외신기자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류현진에게 아버지는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다. 류현진이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오거나 다시 시즌 준비를 위해 미국으로 떠날 때면 류씨는 언제나 공항에서 그를 마중하거나 배웅하고 있다. 류씨의 한결같은 지원이 재능있는 소년을 큰 선수로 만들었다.

<김하진 스포츠경향 기자 h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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