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다문화 편견 버리고 그냥 평범하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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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널리 쓰인 지도 20년 가까이 흘렀다. 다문화 2세 아이는 자라 청소년으로, 청소년은 성년이 됐다.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다. 한국 다문화 청년이다. 그들은 어떻게 2018년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이 고민하는 다문화 정체성은 무엇일까. <주간경향>이 이들 다문화 2세 청년을 만나봤다.

[표지 이야기]“다문화 편견 버리고 그냥 평범하게 봐주세요”

“상처받은 적이 있냐고요? 전혀 그런 것은 없었어요. 물론 중학교 때 사춘기를 겪긴 했죠. 중2병이라고도 하잖아요. 제가 반항적이거든요.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전에 저와 비슷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왕따를 당해 자퇴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어요. 제가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죠. 걔는 걔고 나는 나니까. 물론 사건·사고는 많았습니다. 부딪치거나 싸우고 문제 일으킨 적은 많은데 다른 애들처럼 그만두거나 어울리지 못하거나 그런 건 없었습니다.” 김민철씨(27)의 말이다. 그는 힙합 래퍼다. 어머니의 고향은 몽골이다. 김씨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몽골에서 살다 한국에 왔다. “어머니 고향요? 한글로 표기하기가 애매한데 ‘토브 아이막’이라고 쓰면 될 겁니다.” 막상 김씨는 몽골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중학교 2학년 때 짧은 일정으로 다녀온 것이 전부다.

그는 자신이 몽골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의 오른손에는 태극기가, 왼손에는 몽골 국기의 문신이 있다. ‘제7병동’이라는 아이돌 그룹을 1년 넘게 하다가 때려치우고 다른 기획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다녀와 싱글앨범도 하나 냈다. “나이도 먹고 그러니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보다 음악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아서 비즈니스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럽에서 힙합파티 디제잉하는 친구들이랑 크루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제 인생은 당연히 다르죠”

음악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어릴 때 미술을 했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부모님이 좋아하진 않으셨어요. 그걸로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 생각이냐고. ‘돈은 못 벌어도 대회 같은데 나가 상도 타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살 수도 있지 않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사춘기여서 반항적인 성격이라 어느 날 확 때려치우고 춤을 춘다고 싸돌아다녔어요. 춤을 추면서 음악을 듣잖아요? 그런데 그 음악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때 어울렸던 단짝 친구가 연기에 관심을 가졌는데 ‘노래는 니가 한 번 해봐’라고 해서 노래도 부르고, 스스로 몇 마디씩 가사도 써보니 이게 꽤 재미난 거예요. 친구들도 ‘너 잘하는 것 같다,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저도 하다보니까 ‘어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도 들고….”

어머니가 몽골 출신인 래퍼 김민철씨가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어머니가 몽골 출신인 래퍼 김민철씨가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고등학교 졸업 후 독립해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 “부모님은 지금은 옛날처럼 반대하고 그러진 않아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제가 하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이게 음악인지 뭔지도 모르시는 것 같고.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저는 저니까. 다문화 정체성은 전혀 안 감춥니다. 대놓고 드러내는 편이에요.” 믹스곡을 제외하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사를 담은 노래를 정식 발표한 적은 아직 없다. “예전에 좀 쓴 것은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가사가 안 나오는데…. 다시 보면 조금 유치하긴 해요. ‘나는 몽골에서 피를 이어받았고, 거기서 여기까지 이어진 것’ 이런 느낌? 집에 혼자 있으면 그런 가사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가사노트나 휴대폰 메모장 같은데 옮겨 적어놓는 식이었고.” 지금까지 인생에서 롤모델은 없었다. 굳이 따지면 자메이카계와 베트남계 혼혈 미국인 래퍼 타이가(tyga)를 본받고 싶다고 했다. “아직 뚜렷한 인생계획은 없습니다. 여친과 연애도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모르잖아요. 언제까지 취직하고 또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런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은 싫어요. 살아오면서 겪은 것이 있기 때문에 될 일이면 될 것이고, 안될 일이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 너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요.”

1994년생인 위흥우씨(가명)는 한국인과 재혼한 엄마가 살고 있는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였다. 2012년 8월 20일이었다. “한국어를 아예 몰랐어요. 중국에서 작은 사설학원에서 한글 읽는 법하고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와 같은 간단한 인사말만 배워 들어왔습니다. 막막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갈 생각이었는데….” 그는 현재 한국의 명문대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어학당에 다닌 뒤 처음 지원했던 대학에서 떨어졌어요. 외국인 전형으로 지원해 면접까지 봤는데 전화가 와서 서류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순수 외국인 전형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제도가 그렇게 되어 있어 엄마랑 많이 싸웠어요.” 위씨의 이후 진로 결정에는 이주배경 청소년 지원재단 무지개청소년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앞으로 뭘할지 진로상담도 하고 자격증 준비하는 것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어 10주 정도 하면서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거기에 제빵사, 바리스타 같은 직업체험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하면서 대학교 진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죠. 거기 수련원에서 또 다른 프로그램도 했어요. 나를 돌아보고 또 몇 년 계획을 세워보고 그런 것도 있었는데 그때는 그냥 별 생각 없이 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종이에 썼던 것들 중 대부분을 이룬 것 같아요. 교환학생도 다녀와 보고.” 학교에 들어와서는 한국으로 유학온 외국인들을 돕는 봉사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지난해는 일본 정부가 유학생들 대상으로 만든 장학금으로 교환학생도 다녀왔다. 거기서 대만에서 유학 온 현재의 여자친구도 만났다.

대한적십자사 등이 주최한 다문화가정 모국방문 후원사업에 선정된 가족들이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열린 모임에 참가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경향자료사진

대한적십자사 등이 주최한 다문화가정 모국방문 후원사업에 선정된 가족들이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열린 모임에 참가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경향자료사진

위씨의 원래 계획은 무역학과에 진학해 졸업 후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업하는 것이었다. 그가 진학한 대학에는 무역학과가 없어 대신 경영대를 선택했다. 수업을 쫓아가는 것은 지금도 버겁다. “한국어도 신통치 않은데 영어수업도 10개나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스트레스를 받아 여드름도 많이 났어요. 학점은 지금도 높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도움도 많이 받았고 운이 좋았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노력은 했는데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중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의 가족들과 같이 살아야 해서 포기하라고 하니 ‘아무 생각 없이’ 중국 국적은 포기했다. 들어오자마자 귀화를 신청해 2012년 12월에 면접을 봤다. “받은 질문요? 애국가를 불러보라고 한다든가, 자기소개를 하고 앞으로 뭘할지 물어봤어요.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이런 질문도 기억나고요. 역사문제도 있었는데 그건 어려워 대답을 못했습니다.” 법적으로는 한국사람이지만 솔직히 그는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중국인이라고 해도 국적은 한국이고, 한국인이라고 하지만 또 한국말이나 문화를 토종 한국사람처럼 잘하지는 못하거든요. 게다가 곧 취직을 해야 할텐데 이제는 귀화를 했으니 한국 친구들과 똑같이 시험을 봐야 하는데 아무리 중국어를 잘한다는 메리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수준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은 정말 고민이 많아요.”

지난 8월 6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이주배경 청소년재단의 캠프행사에 참가한 다문화 청소년들이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 / 무지개청년센터 제공

지난 8월 6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이주배경 청소년재단의 캠프행사에 참가한 다문화 청소년들이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 / 무지개청년센터 제공

“사회에 나가 취직 경쟁이 부담”

베트남 출신인 고미르씨(23)도 고등학교까지 베트남에서 마치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의 베트남 이름은 응우옌띠엔부. 2014년에 들어와 2016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일하던 어머니는 같은 공장에서 한국인 아버지를 만나 재혼했다. 베트남에는 친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살고 있고, 한국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고 있다. 한국 새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비행기표는 한국에 있는 엄마가 보내주셨어요. 한국어 교육은 처음엔 되게 어려웠어요. 기초부터 배우니 몇 개월 정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집에서만 있었습니다. 평일 낮에는 다문화센터에 나가고 저녁하고 주말에는 공장에서 책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시급이요? 6250원을 받았어요.” 그는 필기 세 번, 실기 네 번 도전 끝에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현재는 경기도 파주의 롯데아울렛 매장 한식당에서 일한다. 일하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고된 일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오면 별로 하는 일이 없어요. 누워서 휴대전화 들여다보고 자고, 다시 아침 8시15분이 되면 나가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 중 자신처럼 외국 출신은 없다. ‘다문화’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완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 다문화라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한국에 와서 그 단어를 많이 들었습니다. 느낌이 좀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 저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일하는 직장에서도 그가 베트남 출신이라고 딱히 차별을 받거나 부당대우를 받은 기억은 없다고 말한다. “고향이오? 항상 베트남에 가고 싶죠. 내년 설에도 가려고 비행기표를 사려고 해요. 가면… 베트남 가족들이랑 모이고, 여자친구가 베트남에 있거든요.” 베트남에 있는 여자친구와는 거의 매일 저녁 페이스북 페이스타임으로 영상통화를 한다.

“인생 목표는 베트남에 냉면집 차리는 것”

그의 인생계획은 ‘냉면’을 공부해 베트남에 돌아가 냉면집을 차리는 것이다. 30살, 그러니까 한 7년 후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작은 돈이지만 꾸준히 적금도 붓고 있다. “베트남은 날씨가 덥잖아요. 그런데 지금 베트남엔 냉면 같은 음식은 많이 없거든요. 이번에 베트남에 다녀오면 냉면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려고 해요. 적어도 1년을 배워야 할텐데 결혼하게 되면 자유가 없잖아요. 그전에 많이 공부해야지요.” 고씨가 생각하는 냉면요리의 핵심은 ‘육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 각지의 냉면 전문점을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제일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됐던 <경향신문> 인터넷에 게재된 ‘냉면의 취향’ 인터랙티브 뉴스가 도움이 되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처음 들었다는 눈치다. “식당에서 일하다보니 주말이 오히려 더 바빠요. 그러다보니 베트남에서 온 친구들을 만난다든가 교류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생활 정보도 주로 페이스북 친구 게시물을 통해서만 접하고 있네요.”

다문화 2세 청년 기획을 추진하면서 청년 당사자들을 섭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주지원단체나 센터 활동가, 연구자, 커뮤니티 자조모임 등 여러 경로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막상 돌아오는 답은 적었다. 연락이 된 경우도 대부분은 “언론에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일까.

서울 서초문화예술공원에서 ‘헬로우 코리아 전통 혼례식’이 열려 결혼식을 하지 못한 다문화가정 부부들이 한국 전통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서울 서초문화예술공원에서 ‘헬로우 코리아 전통 혼례식’이 열려 결혼식을 하지 못한 다문화가정 부부들이 한국 전통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한국에서 사용되는 ‘다문화’라는 말, 또는 그것을 바라보는 ‘다문화 밖’ 사람들의 시각에 대해 래퍼 김민철씨가 털어놓은 ‘불만’에 힌트가 있을지 모른다.

“솔직히 다문화가정 애들이라고 하면 힘도 없고, 사회에서 밀려나 있고, 그런 인식이 많지 않습니까. 사실은 다문화가정 아이들 사이에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다문화 아이들은 항상 못살고 의기소침하고 주눅 들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그런 고정관념들, 그게 불만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온 적이 없거든요. 다문화는 불쌍하니 도와야 한다, 과거 그런 시기가 물론 있었겠죠. 하지만 그러니까 뭔가 도움이나 시혜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도식이 자동으로 이어지는 그런 시선은 이제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국에서 다문화의 시원(始源)을 멀리는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벌어진 농촌 총각 중국 조선족에게 장가 보내기 운동으로 본다면 그때 이뤄진 가족의 자녀들은 2세를 넘어 이제 다문화 3세까지 나왔다. 20여년 넘는 세월이 훌쩍 흘러간 지금, 성년이 된 다문화 2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위에서 <주간경향>이 만난 세 청년은 다문화 2세 대한민국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곁에 있는 ‘그들’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일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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