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콜해야 할 심평위, 오히려 권한 더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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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리콜 대응체계 혁신방안, 자문기구에서 심의기구로 격상

사후약방문이라도 일단 반갑다. 정부가 6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을 골자로 하는 ‘자동차 리콜 대응체계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BMW 사태를 거치며 알려진 부실한 리콜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는 대책을 넣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과징금도 늘렸고, 결함 조사인력과 예산규모도 커졌다. 다만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리콜 결정 권한을 쥔 자동차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의 존재다.

2013년 6월 26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삼존리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급발진 공개 재현실험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13년 6월 26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삼존리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급발진 공개 재현실험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제작사가 제작 결함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제작 결함을 발견하고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공개 무상수리를 시행하는 방식이다. 최소한의 비용을 투입한 소극적 대응으로 결함 사실을 감출 수 있다. 방법은 또 있다. 제작사가 결함 조사업무를 하고 있는 자동차안전연구원을 직접 ‘관리’하는 방법이다. 이럴 경우 현장에서 결함 조사를 담당하는 연구원은 종종 알 수 없는 외압에 부딪힌다. 어느 날 갑자기 업무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2015년까지 연구원 제작결함조사실에 재직했던 박진혁 서정대 자동차과 교수는 “결함 조사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며 “열심히 조사를 했더니 관련 업무에서 배제시켰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제작사의 은폐·축소행위를 막겠다며 정부가 내놓은 새로운 리콜 혁신방안의 근간은 징벌적 손해배상 강화다. 차량 결함을 은폐하거나 축소할 경우 과징금을 매출액의 3%까지 부과하도록 하고 손해액보다 많은 배상책임을 묻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자동차안전연구원은 전문인력을 보강하고 독립성을 보장해 제작사의 ‘외압’에 견딜 수 있는 구조로 만들겠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자동차안전연구원 독립성 보장

자동차안전연구원과 더불어 권한이 강해진 조직은 또 있다. 리콜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자동차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이하 심평위)다. 심평위는 국토교통부 산하 자문기구다. 심평위원 대부분은 자동차 관련 학과 교수들로 연구용역과 산학협력 등을 명분으로 제작사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는 대신 이른바 봐주기 심사를 해왔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주간경향>은 자동차회사·리콜 심평위의 ‘부적절한 관계’ 보도(1293호)를 통해 자동차안전연구원이 내린 리콜 권고가 심평위를 거치면서 무상수리로 뒤바뀐 정황을 포착해 고발했다. 2011년 이른바 ‘가스랜저’ 사건으로 알려진 현대자동차의 ‘그랜저’ 배기가스 실내 유입 문제다. 당시 의학전문가들과 자동차안전연구원은 안전을 이유로 즉시 리콜을 권유했지만 심평위가 리콜을 거부하면서 무상수리에 그쳤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관계자들이 지난 8월 14일 BMW 화재사고 관련 독일 본사와 한국 임원들을 자동차관리법 위반 및 사기죄 혐의로 형사고발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관계자들이 지난 8월 14일 BMW 화재사고 관련 독일 본사와 한국 임원들을 자동차관리법 위반 및 사기죄 혐의로 형사고발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 김창길 기자

명단 공개한다고 투명해질까

이런 가운데 정부는 오히려 심평위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방침을 세웠다. ‘자문’ 기구였던 심평위를 내년 1월부터는 ‘심의’ 기구로 지위를 격상시키기로 했다. 자동차 리콜 및 교환·환불 등의 모든 심의 권한을 이름만 바꾼 ‘2기 심평위’가 갖게 된 것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리콜이 결정되는 구조는 이전과 같지만 이번에는 심사위원 명단과 심의 결과를 공개하기 때문에 투명성이 강화됐다”며 “위원들의 명예가 걸린 일인 만큼 유착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십 년을 거쳐 형성된 대학과 학회, 제작사 간 관계는 심사위원의 명단 공개로는 끊기 어려운 단단한 고리다. 2011년부터 4년간 심평위 활동을 했던 전 심평위원은 “심평위 심사제도 자체가 제작사 개입으로 문제가 생길 가능성 있는 시스템”이라며 “위원 한두 명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심사 결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전 심평위 방식의 심사에 대한 공정성 우려는 외부 전문가들에게서도 나온다. 현대차 엔진 결함 문제를 폭로해 공익제보자로 인정받은 김광호 전 현대차 부장은 “결국 마지막 심사위원들이 공정하게 심사해 리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사안의 핵심”이라며 “국토부 리콜 혁신안에는 이 과정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고 말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결함 심사제도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으로부터 의뢰받아 작성한 자동차 리콜제도 개선 조사보고서에서 “심의위원회가 자동차 리콜 등에 대한 권한이 커 통제방안 마련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역시 이번 정부 혁신안에 대해 “자동차 문제 및 소비자 안전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며, 국토부의 관리 권한만 강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의 선제적 모니터링 시스템과 같은 소비자 중심 조사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함 발생을 사전에 막기 위한 고민 역시 이번 정부 자동차 리콜 대응체계 혁신안에서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제도는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자기인증적합조사다. 자기인증적합조사는 현행 자동차관리법에 따라 제작사가 법령이 정하는 ‘자동차안전기준’에 적합함을 스스로 인증하고, 이들 차량 중 매년 대상 차량들을 별도 기준에 의해 선정해 교통안전공단이 시험·평가를 대행하는 조사를 말한다. 국내에서는 2003년 정부가 자동차 또는 부품이 안전한지 사전에 인증하는 형식승인제도에서 자기인증제도로 전환했다. 지난해 교통안전 공단에서는 모두 45억원의 예산을 들여 14개 제작사의 17개 차종을 조사했다.

문제는 국토부의 선정 기준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홍철호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그동안 국토부가 마련한 자동차 선정 기준은 ▲시장에 신규판매 및 판매대수가 많은 차종 ▲그동안 포함되지 않은 차종 등 두 가지뿐이다. 요컨대 리콜 사태를 몰고 온 2011년부터 제작된 BMW 520d 모델에 대한 ‘자기인증적합조사’는 올해 처음으로 실시돼 여전히 조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다. 해당 520d 모델은 BMW 리콜 대상 차량 10만6317대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우리와 같이 자동차 자기인증적합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매년 무작위로 자동차를 선정해 자동차안전기준(FMVSS)에 적합한지 여부를 검사한다. 2017년에만 약 40개 차종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무작위로 대상을 정하는 만큼 자동차 제작사는 항상 자동차 품질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박재호 의원(민주당)은 “정부의 자동차 리콜 대응체계 혁신방안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보완한 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며 “무엇보다 리콜 심사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내용을 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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