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저녁은 달라졌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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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 근로 시행 한 달, 한국 사회상 바꾸려면 다른 정책에도 힘 실려야

‘저녁이 있는 삶’이 가까워졌다. 여전히 세 살배기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킬 때 같이 오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야근 때문에 아이가 하원시간 이후까지 어린이집에 남을 걱정은 줄어들었다. 서울 종로구의 직장에서 일하는 김승모씨(37)가 은평구에 있는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은 주 노동시간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되면서 오후 7시 정도로 당겨졌다. 이전 같으면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야근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눈치로 셈하던 시간대였다. 52시간은 상한일 뿐 웬만해선 주 40시간을 지키는 쪽으로 바뀐 것이 김씨에겐 가장 큰 변화다.

300인 이상 기업에 노동시간 주 52시간 상한제가 적용된 후 출근 첫날인 7월 2일 서울 중구 청계천로에서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300인 이상 기업에 노동시간 주 52시간 상한제가 적용된 후 출근 첫날인 7월 2일 서울 중구 청계천로에서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수입의 질’ OECD 회원국 중 27위

귀가하면 아내와 아이는 저녁을 먹고 있다. 새로 밥상을 차릴 필요 없이 이미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올리면 되니 손 가는 일이 줄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면 김씨는 와이셔츠를 다린다. 이전까지는 세탁소에 맡겼던 일이지만 시간 여유가 있으니 직접 빨고 다리기로 했다.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해도 셔츠는 매일 입어야 하니 하루 한 번은 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전에 비해 적어도 2시간은 앞당겨진 귀가시간 덕에 잠드는 시간도 조금은 빨라졌다. 아침잠이 많아 기상시간은 그리 앞당겨지지 않아서 ‘아침(밥)이 있는 삶’까지는 못갔지만 초등학생인 첫째가 등교할 때 준비물을 챙겨줄 정도의 짬이 난 것은 이전과 달라진 생활의 모습이다.

7월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체를 시작으로 주당 노동시간에 52시간 상한이 정해진 지 한 달이 지나면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일상에서 나타나는 변화도 하나둘씩 늘고 있다. 단기간에 닥쳐온 변화에 우려를 보이는 직장 현장도 없지는 않지만, 예고된 변화였기 때문에 실제로 급격한 부작용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 그동안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로 순위권에 올랐던 오명을 벗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장시간 노동이 낳은 여러 부수적 폐해도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수입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기대되는 대표적인 결과다. ‘수입의 질’이란 해당 국가의 소득불평등 정도를 반영해 시간당 수입을 미국 달러로 표시한 수치다. 쉽게 표현해 각 나라마다 한 사람이 벌어들이는 소득을 질적인 측면에서 비교할 수 있게 정리한 것이다. 올해 7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고용 전망 2018(Employment Outlook 2018)’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이와 같은 소득의 질이 시간당 평균 9.9달러(약 1만80원)에 불과해 35개 회원국 가운데 끝에서 9번째일 정도일 낮다. OECD 평균인 16.8달러에 크게 못미쳤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1인당 소득은 22위지만 소득의 질로 따지면 27위로 순위가 내려갔다. 상대적으로 질적인 면에서 더욱 열악한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한국에서 전반적인 소득수준보다 상대적으로 소득의 질이 낮아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지표에 들어 있는 의미대로 한국 사회의 소득불평등이 높다는 점이 한 요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이 바로 장시간 노동이다. 전체 소득을 일하는 데 들인 시간으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길수록 소득의 질도 낮아지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노동시간 상한이 주당 52시간으로 줄어들면서 소득수준에 비해 질을 떨어뜨렸던 문제를 개선할 여지도 높아진 셈이다.

하지만 단기간에 수입의 질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문제는 남아있다. 수입의 질을 낮추는 요인인 소득불평등이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배경 중 하나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눠진 이중적인 노동시장의 양극화이기 때문이다. 당장 7월부터 적용되는 52시간 상한제가 300인 이상 사업체 중심이기 때문에 제도 변화의 혜택을 누리는 비율도 대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높다. 5인 이상 사업장에도 ‘저녁이 있는 삶’이 보편화될 정도로 적용범위가 넓어지는 2021년 7월까지는 변화가 점진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퇴근 빨라져 ‘투잡’ 기회도 늘어

노동시간의 변화가 시차를 보이는 지점은 서비스업종 사업장에서 잘 드러난다. 서울 도심의 한 헬스장에서 트레이너로 일하는 정모씨(28)는 7월 들어 부쩍 늘고 있는 회원들을 맞느라 더욱 바빠졌다. 직장인들이 주고객인 헬스장은 평년 같으면 회원들이 여름을 앞두고 몸매를 가꾸려는 젊은층이 몰리는 6월에 반짝 회원수가 늘다 한여름 휴가철이 시작될수록 오히려 한동안 한산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올해는 7월에도 꾸준히 증가하는 회원수 덕에 계획했던 여름휴가를 미루려고 한다.

물론 회원이 늘수록 개인지도를 받는 회원들도 많아지기 때문에 바쁘기는 해도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운동법은 물론 헬스장의 기본 매너에 익숙지 않은 신규회원들이 단시간에 늘었기 때문에 한시도 눈을 떼기 어려운 고충도 있다. 정씨는 “누구나 운동을 처음 시작하면 의욕이 앞서서 꾸준히 운동효과를 키우려는 트레이너의 지도에 불만을 갖는 경우도 많다”며 “한정된 인원으로 회원 지도와 같은 감정노동은 물론 헬스장 관리와 청소, 잡무까지 한꺼번에 처리하는 등 업무량의 변화가 심해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7월 2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전자상거래 기업에서 직원들이 정시 퇴근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월 2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전자상거래 기업에서 직원들이 정시 퇴근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하는 시간이 준 만큼 소득 감소를 받아들여야 하는 직종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빨라진 퇴근시간 덕에 모자란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는 ‘투잡’의 기회가 늘어난 면도 있다. 작은 마켓 컨설팅 업체에서 일하는 이도균씨(35)의 직장은 당장 52시간 상한제를 적용받는 규모는 아니지만 자체적으로 퇴근시간을 앞당기기로 했다. 수주받은 프로젝트가 있을 때에만 일이 몰려 심야까지 일해야 하는 사정을 감안해 평소에는 오후 5시에 이른 퇴근을 하게 된 것이다. 대신 그동안 상시적으로 지출되던 저녁식대와 야식비, 교통비가 없어져 월급 총액은 다소 줄게 됐다. 이씨는 월급은 줄었지만 가용시간은 늘어난 상황을 활용해 일정 지분을 내고 동업을 하는 식으로 저녁시간 동안 투잡을 하려 준비 중이다.

이씨는 “시장의 변화를 보니 아무래도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여가활동이나 가족들과 보내는 데 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식당처럼 가사의 일부를 대체하는 전통적인 서비스업은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나 여가활동 제공업체를 소비자와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다. 음식 배달업체 중개서비스처럼 동호회나 여가서비스 업체를 중개하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사업이다. 일종의 창업이긴 하지만 그동안 업계에서 익힌 노하우를 활용하면서 퇴근 후 시간만 투자해도 되는 수준이라 부업처럼 부담은 덜하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일터에서 돈을 버는 데 보내는 시간이 길면 반대로 무급으로 집에서 처리해야 할 가사노동에 들일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 관행은 이면에 무급노동 시간이 OECD에서 가장 짧은 결과를 낳았다. OECD의 국제비교 통계를 보면 한국의 무급노동시간은 2시간16분으로 회원국 중 가장 짧았다. 노동시간 단축은 이처럼 직장에서의 생활에 집중하느라 가정에 집중하지 못한 생활상에도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여성 경력단절 문제 해결 실마리

특히 그동안의 장시간 노동이 집안에서의 무급노동을 어렵게 만든 문제를 추적하면 반대로 돈을 받는 유급노동 역시 가치가 저평가돼온 저임금 현실과도 이어진다.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액수를 벌기 위해서는 더 오래 일해서라도 수입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장시간 노동이 돈을 내고 가사노동을 남에게 맡기는 결과를 낳게 되고, 저임금을 바탕으로 싸게 맡기는 가사노동의 외주화가 돌아가는 고리를 이루며 그동안의 노동시장을 굴려온 셈이다. 게다가 가정 내 전체 무급노동시간 중 여성이 83.5%, 남성이 16.5%를 담당할 정도로 성별 간 격차 역시 한국이 가장 크게 나타난 점까지 고려하면 여성의 고용률을 높이지 못한 주된 요인 중 하나인 경력단절 등의 문제까지 노동시간 단축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보일 수 있다.

앞서 나온 직장인 김승모씨도 아내가 둘째를 출산한 뒤로 반강제적으로 남편 혼자 외벌이를 해야 했던 처지가 노동시간 단축으로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됐다. 첫째까지는 친할머니가 육아를 도와줬지만 건강이 나빠지면서 둘째 출산 이후로는 아내가 퇴사 후 육아와 가사를 전담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아직은 퇴근이 빨라진 지 오래되지 않아 더 두고 봐야겠지만 계속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일찍 퇴근하게 되면 저녁시간에는 내가 아이들을 보고 아내는 전공을 살려 파트타임으로 미술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냥 일하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보다는 집에서 가족들에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확실히 보장되는 문화가 그동안 무엇보다 절실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정들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 단지 ‘워라밸(work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을 넘어 장기적으로 사회상을 바꾸는 데까지 이르려면 함께 추진되는 정책들에도 힘이 실려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저임금을 높여 사회 전반의 임금수준을 함께 높여야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연결고리를 더 효과적으로 깨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단절 없이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최정은 연구원은 “한국 맞벌이 여성이 감당해야 할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부담이 여전한 현실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정체시키고, 결혼과 육아기를 맞은 30대 젊은 여성들의 경제활동 이탈률도 높게 만든다”며 “장시간 임금노동 구조를 개선해 남성의 가족활동 시간을 보장하면 동시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높일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한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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