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쏠 권리’를 포기 못하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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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을 느끼면 선제 발포가 가능하고, 사격 부위에 제한도 없다. 한 해 평균 1000명가량이 희생된다. 하지만 연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적 개정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85년작 SF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는 자동차를 개조해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달리다 우연히 30년 전 과거로 돌아간다. 1985년에는 없지만 1955년엔 있었던 헛간이 바로 앞에 나타났고, 멈출 새도 없이 들이받는다. 헛간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하지만 돌아온 건 대답 대신 총알이었다. 엽총을 들고 나타난 집주인은 총을 쏴대고, 주인공은 혼비백산해 차를 몰고 달아난다.

‘우리의 권리를 위한 행진’ 집회 참가자들이 7월 7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국인을 무장한 채로 둬라’는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든 채 미국 국가를 부르고 있다. / AFP연합뉴스

‘우리의 권리를 위한 행진’ 집회 참가자들이 7월 7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국인을 무장한 채로 둬라’는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든 채 미국 국가를 부르고 있다. / AFP연합뉴스

영화적 재미를 위한 과장이라 여겨졌을 이 장면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실제 미국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주인공이 총에 맞아 사망했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른바 ‘성의 원칙(Castle Doctrine)’ 때문이다. 미국 형법 원칙 중 하나로 주거지를 일종의 ‘성’으로 보고 ‘성’에 침입한 자를 물리치기 위해선 치명적 무기의 사용도 허락한다.

‘총을 가질 권리’는 신성불가침?

이는 미국에서 총기로 인한 사망자가 매년 3만명에 육박하는 이유를 시사한다. 미국은 누구나 총을 가질 수 있는 나라일 뿐 아니라, 누구나 총을 쏠 권리도 있는 나라다. 미국인에게서 ‘총을 가질 권리’를 빼앗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총기 규제 요구는 이제 ‘총을 쏠 권리’를 제한하자는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지난 3월 17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숨진 플로리다 파크랜드의 더글러스 스톤맨 고교 총기 참사 이후 지금까지 미국 전역에서 55건의 총기규제법이 통과됐다. 가정폭력 전력이 있는 자의 총기 소유 제한, 반자동 소총의 자동사격을 가능하게 해주는 ‘범프 스탁’의 판매 금지, 경찰에 총기 임시 압수 권한 부여, 총기 폭력 방지 프로그램 도입, 총기 구매자 신원조회 강화, 공공장소에서의 총기 휴대 제한 등이다.

법 개정은 미국 51개 주 중 26개 주에 걸쳐 이뤄졌다. 미국의 주 절반 이상이 동참한 것이다. 특히 이들 주 중 15개 주가 공화당 소속 주지사가 있는 곳이다. 총기 옹호론을 펴오던 공화당 지역에서조차 총기 규제를 강화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파크랜드 참사를 계기로 총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이전과는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명확하다. 이 법들은 총기의 소유 자체를 금지하진 못한다. 범죄 전력자나 이상징후를 보이는 자의 총기 소유가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제한되고, 일부 장소에서의 총기 휴대가 금지되긴 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예전처럼 총기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또 여전히 대부분의 장소에서 총기를 휴대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누구나 총을 가질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총기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총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남은 방법은 가진 총을 함부로 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다.

미국에서는 총을 얼마나 ‘함부로’ 쏠 수 있을까? 앞서 <백 투 더 퓨처>를 통해 소개한 ‘성의 원칙’은 사실 ‘성’이 아닌 곳에서도 적용된다. 이른바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 법(stand-your-ground law)’ 때문이다. ‘성의 원칙’을 길거리로까지 확대 적용한 이 법은 글자 그대로 ‘당신이 서 있는 땅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취지다. 때문에 ‘퇴각할 의무 없음 법(no duty to retreat law)’으로도 불린다. 이를 위해 법은 장소를 불문하고 치명적 무기의 사용까지 허락한다. 상대가 먼저 총을 꺼내지 않아도, 심지어 총이 없어도 위협을 느낄 경우 먼저 총을 쏠 수 있다. 상대가 사망해도 면책될 수 있다. 단 상대가 도망치기 시작한 이후의 발포는 면책 대상에서 제외된다. 미국의 26개 주 이상에서 전면시행 중이며 적용 장소에 예외를 두고 제한적으로 시행 중인 주도 적지 않다.

한 경찰관이 7월 11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용의자를 추적하던 도중 권총을 재장전하고 있다. / 라스베이거스로이터연합뉴스

한 경찰관이 7월 11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용의자를 추적하던 도중 권총을 재장전하고 있다. / 라스베이거스로이터연합뉴스

위협을 느끼면 물러서지 말고 쏴라?

이는 미국 경찰이 걸핏하면 총을 쏘는 이유와도 무관치 않다. 사실상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용의자가 무장을 했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조차 위협을 느끼면 선제 발포가 가능하고, 사격 부위에 제한도 없다. 위협을 즉각 제거할 수 있고 명중도 쉽다는 점에서 몸통을 향해 발사하는 경우가 많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동안 2945명이 경찰관이 쏜 총에 숨졌다. 한 해 평균 1000명가량이 경찰의 총에 희생된 셈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 총기 때문에 사망한 미국인은 31만6545명에 달했다. 미국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빈발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수치다. <워싱턴포스트> 집계에 따르면 1999년 이후 19년간 학교 총기 참사로 숨진 이는 131명 정도였다. ‘총을 가질 수 있고 쏠 수도 있는 권리’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는 이제 ‘총을 가질 권리’에서 ‘총을 쏠 권리’로 옮겨붙고 있다. 2005년부터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 법’을 시행 중인 플로리다주에서는 최근 이 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항의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템파 지역에서 시비 도중 자신을 밀쳐 넘어뜨렸다는 이유로 비무장한 시민을 총으로 살해한 용의자가 이 법 때문에 처벌을 면하면서 지역사회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결실을 거둘지는 알 수 없다. 이 법은 연방법이 아니다. 각 주가 자체적으로 제정한 주법이다. 때문에 연방정부가 폐지를 강제할 수 없다. 결국 주별로 개정돼야 하지만 총기규제법들의 경우처럼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 법이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미총기협회(NRA)나 법안대체협의회(ALEC) 등 로비단체의 영향력이 아직도 막강하기 때문이다.

<박용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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