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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법’이 시행된 지 20년이 됐다. 파견근로자를 보호한다는 명목과는 달리 그동안 다양한 불법파견 문제를 낳았다. 법 개정과 함께 불법파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과 기업의 인식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4년 12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 종합대책 폐기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팻말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다. / 김정근 기자

2014년 12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 종합대책 폐기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팻말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다. / 김정근 기자

IMF 금융위기가 몰아치던 1998년 7월 1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시행됐다. 국민들이 원한 결과는 아니었다. IMF는 구제금융 제공의 대가로 노동 유연성 확보 문제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악법’이라는 노동계의 반발 속에서도 국가 부도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노동 유연성은 ‘쉬운 해고’의 다른 말이다. 오늘날 658만명에 달하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한편으론 정당화하는 개념이다.

지난 7월 1일부로 파견법 시행 20년이 됐다. 최초 26개였던 파견근로 허용업종은 2004년 32개로 늘었고, 2010년 이명박 정부가 17개 업종을 더 추가하려다 여론의 반발로 무산됐다. 2015년엔 박근혜 정부가 55세 이상 고령자와 관리전문직에게 파견근로를 새로 허용하려다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2002년 9만4000명이던 파견근로자 수는 지난해 18만5000명으로 늘었다. 노동계는 파견법이 파견근로자를 보호한다는 명목과는 달리 사내하청, 위장도급 등 법의 허점을 파고든 다양한 불법파견을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파리바게뜨 사태, 삼성전자서비스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파견법의 개정 요구와 함께 그간 불법파견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해온 정부를 향해 인식과 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파견법이 시행 20년 만에 중요한 변화의 기로에 섰다.

불법파견 문제 인식전환 시작됐다

시내의 한 파리바게뜨 매장에서 제빵기사가 빵을 굽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내의 한 파리바게뜨 매장에서 제빵기사가 빵을 굽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6월 28일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이 신한생명보험에 시정명령을 내렸다. 신한생명의 충남 천안연수원에 근무하는 파견업체 ㄱ사 소속 도급 근로자 9명에 대해 파견법 위반이므로 직접고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여름 천안지청에 불법파견 문제로 진정을 제기했던 ㄱ사 소속 근로자 A씨(<주간경향> 1281호 보도)는 시정명령 소식을 전해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노조도 없이, 근로자들끼리 틈틈이 노동관련법들을 공부해가며 원청업체와 벌여온 1년간의 싸움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A씨 등은 신한생명과 연수원 관리계약을 맺은 ㄱ사 소속 직원으로 길게는 5~6년씩을 근무했다. 채용될 때부터 근무하는 기간 내내 원청업체인 신한생명으로부터 업무지시 및 근태관리를 받았고, 이 경우 불법파견에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천안지청에 진정을 냈다.

이튿날 더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신한생명 본사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A씨 등을 마주한 그는 “노동부 시정명령을 수용해 직접고용하겠다. 다음주 중에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하자”고 말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ㄱ사와는 도급계약 관계로 직접고용 의무가 없다”고 말하던 사측의 태도가 노동부 시정명령을 기점으로 하루아침에 바뀐 것이다. A씨는 “직접고용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싶었다”며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게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왜 1년이나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한생명은 A씨 등에게 본사 정규직 채용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소규모이지만 ㄱ사 근로자들의 승리는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의 지난해 비정규직 통계자료를 보면 파견근로자의 절반에 가까운 44%가 시설관리·사업지원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견직이 될 수도 있는 용역근로자의 경우 87.7%가 이 직종에 몰려 있다. A씨 등 9명 역시 시설관리·경비 근로자들이다. 김대환 노무사는 “최근까지의 불법파견 시정명령 사례를 보면 대부분이 제조업 분야였다”며 “파견근로자가 특히 많은 서비스 업종에서 나온 결정이어서 유사한 다른 사업장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간 불법파견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제1금융권 내 주요 기업 사례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대기업인 신한생명이 즉각 직접고용을 전제로 협의에 나선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1년간 파리바게뜨, 한국GM, 만도헬라, 캐논코리아 등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여러 불법파견 시정명령 사례 중 이렇게 이른 시간 내 전향적인 해결 의지를 보인 기업은 없었다.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아도 기업은 1인당 1000만원의 과태료만 내면 된다. 신한생명의 경우 직접고용 대상이 9명이라 과태료 부담도 크지 않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파리바게뜨나 한국GM의 경우 불법파견 문제가 크게 부각되면서 기업 이미지 등에 많은 손실을 입혔다”며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빠른 해결책을 찾는 게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밝혔다.

[표지 이야기]파견근로자 보기를 정규직같이 하라

LG유플러스가 2일 협력사 직원 1800명을 정규직으로 직접고용하겠다고 밝힌 것도 불법파견 문제에 대한 기업들의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LG유플러스는 노동부의 불법파견 시정명령이 내려지기 직전에 이 같은 결정을 내리고 실행했다. 선의에 의한 결정은 아니었다 해도 기업들이 과거 불법파견 문제를 무시하고 ‘버티기’로 일관하던 자세에서 최근엔 적어도 이 문제를 ‘리스크’로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는 게 재계의 해석이다.

“노동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근로자가 불법파견 문제를 제기하고 최종 승리하기까지 과정은 험난함 그 자체다. 민·형사재판을 통해 사측의 위법행위를 가리는 방법과 정부의 시정명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이 중 근로자들에게 그나마 쉬운 길은 정부의 판단을 받아보는 쪽이다. 형사재판의 경우 노동부에서 불법파견 판단이 나오더라도 검찰에서 이 판단을 뒤집는 경우가 많아 재판까지 끌고가는 것도 어렵다. 형사에서 막히면 민사로 가야 하는데 ‘근로자지위확인소송’으로 불리는 불법파견 관련 민사소송은 소송기간도 길뿐더러 파견법이 워낙 복잡한 탓에 결과도 장담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자동차만 해도 사내하청 근로자들이 민사소송을 통해 대법에서 불법파견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8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파견근로자들이 파견법 취지대로 ‘보호’를 받으려면 노동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파리바게뜨 사건이다. 정부는 통상 정기 근로감독을 통해 불법파견 실태를 조사하고 적발된 사례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려왔다. 파리바게뜨의 경우 정의당 이정미 의원을 통해 문제제기가 된 후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해 5378명의 제빵기사를 직접고용하라고 명령했다. 파리바게뜨는 사태 초기 법적 대응을 거론하며 버텼지만 정부가 추가 사법처리 및 530억원 규모의 과태료 부과 강행방침을 밝히자 결국 직접고용에 나섰다. 파리바게뜨 사태 이후 노동계에서는 “오랜만에 잘했다”며 노동부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ㄱ사 근로자들만 해도 천안지청에서 시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올 연말 도급업체와의 근로계약 만료 이후 상황을 장담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지청에서 불법파견 판단을 내리지 않은 이상 검찰에서 추가로 문제제기할 가능성도 낮고, 민사소송을 할 만한 여력은 없기 때문이다. 신한생명 제안대로 직접고용이 실현된다면 양질의 일자리 9개가 늘어나는 동시에 9명의 잠재적인 실업도 막는 효과가 생기는 셈이다.

반대로 노동부가 제 역할을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는 삼성전자서비스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가 6월 30일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노동부는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 AS센터에 대해 불법파견 의혹이 제기되자 수시근로감독을 벌였다. 당시 현장에서 감독활동을 벌인 근로감독관들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노동부 고위공무원들이 개입하면서 최종 결론이 뒤집혔다. 그 결과 이듬해 AS센터 소속 근로자가 자살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고, 사측의 노조 파괴활동이 자행되는 등 숱한 문제점이 발생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성희 교수는 “불법파견 문제가 과거보다 중요하게 인식되는 추세인 건 맞지만 비용이나 인력관리 측면에서 기업들이 먼저 파견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설 가능성은 아직 낮다”며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불법파견에 대한 판단을 적극적으로 하는 한편, 공적 부문 간접고용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도 계속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불법파견 시정명령 건수 및 업체가 이를 수용하는 비율은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노동부 집계를 보면 2016년 111개 사업장, 3208명이었던 시정명령 건수는 지난해 167개 사업장, 8593명으로 크게 늘었다. 시정명령을 업체가 수용하는 비율도 같은 기간 46%에서 81.9%로 뛰었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동인권과 일자리를 중시하는 새 정부 출범 후 노동부 내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라며 “불법파견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대응을 강화해가고 있다”고 밝혔다.

1995년 10월 열린 근로자파견법 제정 반대 등을 위한 당시 전국사무노동조합연맹의 공동대책위 발족식에서 참석자가 발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5년 10월 열린 근로자파견법 제정 반대 등을 위한 당시 전국사무노동조합연맹의 공동대책위 발족식에서 참석자가 발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검찰도 변해야 한다

노동계에서는 실질적인 사법처리 권한을 갖고 있는 검찰 역시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동부의 경우 시정명령을 내릴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명령을 강제할 법적 효력이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직접고용 대상 파견근로자가 많을 경우 비용을 따져봐서 직접고용보다 과태료 납부가 낫다는 판단이 들면 과태료를 내면 그만이다. 기업을 파견법 위반혐의로 기소해 경영진 등을 처벌할 권한은 어디까지나 검찰에 있다.

문제는 검찰이 파견법 위반으로 기업을 형사처벌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8년이 걸린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근로자들의 민사소송도 발단은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었다. 노동부가 2004년에 일찌감치 불법파견 판단을 내렸지만 검찰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근로자들은 결국 기나긴 민사소송을 택했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일본기업 아사히글라스의 불법파견 문제도 검찰에서 판단이 뒤집힌 사례다. 노동부 구미지청은 지난해 9월 22일 아사히글라스가 파견법을 위반했다며 178명에 대해 직접고용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검찰에도 불법파견 혐의에 대해 기소의견을 달아 송치했지만 검찰은 같은 해 12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아사히글라스는 시정명령 이행을 거부한 채 과태료를 내고 버텼고,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당시인 2015년에 해고당한 근로자들은 아직도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올 5월 고검에서 재수사 지휘 결정이 내려져 김천지청에서 수사를 진행 중이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검찰은 노동부의 근로감독관에 대한 수사지휘도 겸하고 있다. 불법파견 여부를 수사하고 가리는 단계에서부터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불법파견 등 노동문제는 통상 검찰 공안부에서 맡는 터라 담당검사의 노동법이나 노동현장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노동계는 지적한다. 장석우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노동법 중에서도 파견법은 특히 복잡하고 어렵다”며 “담당검사가 사측 변호인이 주장을 하면 그대로 받아들여 불기소 처분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고 밝혔다. 장 변호사는 “노동문제를 시국·선거사범 등을 다루는 공안에서 다룬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며 “검찰 내 전문성을 가진 노동 전담부를 신설하거나 법원에 아예 노동법원을 따로 두는 방안 등의 개선책을 검토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불법파견 사건을 최초로 접하고 현장에서 수사하는 근로감독관들도 보다 엄격한 법 집행에 나설 필요가 있다.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11월부터 6개월간 근로감독관들의 갑질 사례를 접수받은 결과 100여건의 제보가 전국 각지에서 쏟아졌다. 이 중에는 공정한 위치에 서야 할 근로감독관이 노골적으로 회사 편을 들거나 불명확한 이유로 사건 처리를 지연하고, 직무범위에 어긋나게 사측과 합의를 종용하는 등의 다양한 갑질이 포함됐다. 노동부도 지난해 근로감독관 문제를 인식하고 근무기강 확립과 인력 충원 등 대책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그간 기업 입장에서, 자본 편에서 판단해 왔던 노동부의 고위관료들과 검찰, 근로감독관들 모두 인식을 전환해야 할 시점이 왔다”며 “현행 파견법 역시 폐지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불법파견을 낳는 여러 독소조항을 제거하고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엄단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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