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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고용’ 되면 삶이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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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의 ‘꼼수고용’으로 이전보다 노동환경 나빠진 경우도

불법파견을 일삼는 대기업들에 대해 정부가 직접고용을 하라는 ‘시정명령’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 시정명령이 나오면 얼핏 문제가 해결될 걸로 보이지만 정작 그 이후가 더 문제다. 시정명령을 거부하고 과태료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아예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운운하며 반발하는 경우도 있다. 마지못해 직접고용에 나선 대기업들도 막상 뜯어보면 터무니 없는 근로조건을 내세워 노동자들을 이전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몰아넣는다. 노동계가 파견법 개정과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을 호소하고 나선 이유다.

지난해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의 사내하청 노조 등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지난해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의 사내하청 노조 등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자회사 직접고용, 달라진 것 없어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ㄱ씨는 최근 9개월 동안 ‘저녁’ 없는 삶을 살았다. 퇴근 후에도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점주는 매일 저녁 전화를 걸어 업무를 지시했다. 휴가기간에도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잠자리에 든 밤 11시에도 불쑥 전화가 걸려왔고 통화는 수십분씩 이어졌다. 심지어 새벽 2시에도 업무지시를 하는 카톡 메시지가 날아왔다. 새벽 6시에 출근하는 ㄱ씨는 늘 만성피로에 시달렸다.

점주의 업무지시에는 폭언이 따랐다. 업무시간에는 항상 폐쇄회로(CC)TV로 ㄱ씨를 감시했다. 자신보다 10살 이상 어린 점주에게 시달리던 ㄱ씨는 결국 빵집을 그만뒀다. ㄱ씨 측은 피비 파트너스 지역본부에 점주의 폭언 등 부당행위를 알리고 시정조치할 것을 요청했지만 회사로부터 들은 대답은 ‘일을 만들지 않고 원만히 처리하기 원한다’였다.

ㄱ씨는 파리바게뜨의 자회사 피비 파트너스의 ‘정규직’ 직원이다. 지난해 불법파견 등으로 노사갈등을 겪다가 상생협약을 통해 어렵게 자회사에 ‘직접고용’됐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당시 불법파견의 중심에 있던 협력업체 관리자들은 그대로 피비 파트너스로 왔고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직원을 관리했다. 협력업체 대표들은 지역본부장으로 직함을 바꿔 자리를 유지했다.

제빵기사들이 겪는 노동인권 침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빵기사의 근무지는 점주의 뜻에 따라 회사 측의 ‘통보’로 바뀌었다. ‘노조 조합원은 싫다’는 점주의 말에 출근을 하지 못한 제빵기사도 있었다. 모양이 좋지 않은 빵은 제빵기사들이 사비로 매입해야 했다. 피비 파트너스는 철저히 자신들의 ‘고객’인 가맹점주 입장에 섰다. 사측은 신입직원을 대상으로 한 특정 노조 가입을 종용하기도 했다. 신입 제빵기사들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자리에서 관리자가 ‘기업노조는 회사가 만들었다’며 친 회사 측 노조에 가입할 것을 권했다. 이 같은 사측의 노조 갈라치기로 현재 피비 파트너즈 노조는 세 개로 갈렸고 노노(勞勞)갈등을 겪고 있다. 임영국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사무처장은 “간접고용 당시 회사는 이익을 취하고 노동자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며 “하지만 직접고용을 한 지금도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은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본사’에 직접고용된 노동자들도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롯데캐논)의 사내하도급업체인 유천산업 소속 노동자 41명 가운데 사직한 9명을 제외한 32명은 올해 4월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에 직접고용됐다. 이들은 본사 소속 정규직이 됐지만 잃은 게 많았다. 직접고용된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7년. 하지만 캐논코리아 측은 이들의 근속연수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신입’으로 채용했다. 이 때문에 임금수준 등은 불법파견 당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일부 고연령 노동자의 경우 소속이 바뀌자마자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분류돼 ‘최저임금’만 받게 됐다.

근속연수 인정하지 않아 신입으로 입사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회사를 옮기면서 응당 받아야 할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32명의 노동자들은 유천산업으부터 받아야 할 퇴직금 5억6000만원 가운데 3억1300만원을 정산받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남은 퇴직금을 받을 도리가 없다. 유천산업은 폐업했고, 캐논코리아 측은 남은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경기 안산시 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문상흠 노무사는 “2007년 파견법 개정 전에는 불법파견이 확인되면 직접고용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퇴직금 정산이나 근속연수 인정에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직접고용’만 하면 되기 때문에 노동자의 처우가 더 나빠지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불법파견을 일삼아온 대기업들은 문제가 드러난 뒤에도 ‘직접고용’이 아닌 ‘꼼수고용’으로 대응한다. 일단 불법파견 문제가 불거지면 자회사를 만들거나 기존 자회사를 활용해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채용하는 방식이다. 캐논코리아 역시 불법파견 문제가 터지자 노동자들에게 ‘자회사의 정규직 채용’ 혹은 ‘본사 1년 계약직 채용’ 가운데 선택할 것을 통보했다. 이 같은 사측의 횡포는 파견법이 사용사업주에게 ‘직접고용’할 의무를 부여할 뿐, 고용형태나 근로조건에는 제약을 두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현행 파견법 제6조의 2 제3항 1·2호에는 ‘파견근로자와 동종 또는 유사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가 있는 경우에는 그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취업규칙 등에서 정하는 근로조건에 따르고, 없을 경우 기존의 근로조건 수준보다 저하돼서는 안된다’고 명시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유명무실하다. 사용자가 새로운 직군을 만들어 파견노동자를 채용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없던 직군으로 채용하면 근로조건을 비교할 동일노동 동일임금 적용대상도 사라지게 된다. 사용자는 이 같은 편법을 통해 파견노동자의 처우 등을 임의대로 정할 수 있다. 실제로 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는 지난해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면서 ‘기능직’ 직군을 새로 만들었다. 별도의 취업규칙을 정했고 근로조건도 새롭게 명시했다. 이 과정에서 기능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상여금을 받지 못하는 등 기존 생산직·사무직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처우에 놓이게 됐다.

이 같은 문제로 인해 노동계는 파견법의 개정을 요구해 왔다. 핵심은 현재 파견법에 명시된 ‘고용의무’ 조항을 ‘고용의제(擬制)’로 바꾸는 것이다. 요컨대 사용사업주가 불법파견 노동자를 ‘직접고용된 노동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불법파견 노동자는 근무경력과 근속연수를 오롯이 인정받을 수 있고 사용자는 퇴직금 등 체불임금을 부담할 의무가 생긴다.

법을 위반한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사용자는 직접고용 등 고용노동부의 시정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물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과태료 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해진 기한까지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다가 기한을 넘긴 뒤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하며 시간을 끈다. 대기업들에 정부의 과태료 명령은 거부하면 그만인 ‘솜방망이’인 셈이다.

솜방망이 과태료 비웃는 재계

지난 5월 한국지엠은 고용노동부로부터 창원공장에서 일하는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774명을 7월 3일까지 직접고용하라는 시정명령을 받았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노동부는 지난 5일 불법파견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한국지엠에 과태료 77억4000만원을 부과하기로 했다. 불법파견 판정 이후 금속노조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직지회는 3~4년에 걸쳐 비정규직을 단계적으로 직접고용하는 절충안 등을 제안하면서 회사에 교섭을 신청했지만 사측은 응답하지 않았다. 진환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직지회 사무장은 “한국지엠은 정부로부터 4000억원을 지원받았고 앞으로 4000억원가량을 더 지원받게 된다”며 “총 8100억원의 국민 혈세로 과태료를 내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상시·지속적 업무의 정규직 고용화’를 공약했다. 아울러 동일 기업 내에서 동일가치 노동, 동일임금이 실현될 수 있도록 강제하고 사내하청에 대해서 원청기업이 공동고용주의 책임을 지도록 법을 정비하겠다고 약속했다.

국회에서도 파견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대한 법률 일부 개정안’ 대표발의를 준비 중이다. 파견법상 근로자 파견의 허용범위를 출산·질병 등으로 인해 일시적 결원이 생긴 경우 등으로 한정하는 한편, 사용사업주가 불법파견으로 노동자를 이용한 사실이 드러나면 위반행위를 한 시점부터 고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동안 노동계가 주장해온 대로 ‘고용의무’를 ‘고용의제’로 개정한 것이다. 여기에 제조업의 직접생산 공정업무를 근로자 파견 금지 대상으로 지정해 상시업무에 대한 직접고용 원칙을 강화하는 조항도 넣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상시·지속적 업무의 정규직 고용화’ 공약은 진척이 없고, 파견법 개정안은 국회 협상 테이블에조차 오르지 못하고 있다. 파견법을 바라보는 여당과 야당, 노동계와 재계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은 파견직 허용대상을 확대하자는 입장이다. 자유한국당 이완영 의원은 고령자·고소득 전문직도 파견대상에 넣고 뿌리업종도 파견을 허용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재계 역시 현재 32개 업종, 197개 직종에 묶어둔 파견 허용범위를 넓혀달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처럼 여론이 엇갈리자 아예 파견법을 폐지해 파견직이 확대될 소지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파견법의 허점을 악용한 불법파견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며 “파견법이 생기면서 간접고용의 문이 열리게 된 만큼 파견법은 반드시 폐지돼야 할 법”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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