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의 희망사항 ‘북·일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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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청산 없는 접근에 한계” 지적도

일본 정부 측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일본 외무성 실무진은 지난 14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북한 측 관리들과 접촉했다. 일본 언론도 각종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4일 총리 관저에서 납치 피해자 가족들과 만나고 있다. / 도쿄|AP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4일 총리 관저에서 납치 피해자 가족들과 만나고 있다. / 도쿄|AP연합뉴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연일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과 경제 지원을 명분으로 북·일 정상회담 실현에 적극 나서고 있다. 6·12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그간의 ‘대북 강경 일변도’ 입장을 확 튼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대화 분위기에 올라타 ‘재팬 패싱(배제)’ 우려를 불식시키고 ‘최우선 과제’로 내걸어온 납치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노림수지만,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아베 총리는 최근 매일이다시피 북·일 정상회담 추진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김 위원장에 대한 칭찬도 마다치 않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 6월 18일 국회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납치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내가 김 위원장과 마주 앉아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며 “북한과 상호 신뢰를 쌓아 성과를 거두고 싶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에게는 북·미 정상회담을 실현한 지도력이 있다”고도 했다. 지난 16일 요미우리TV에 출연해선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김 위원장의 큰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2개월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 “최대한의 압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아베 총리, “이번엔 내 차례”

지난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아베 총리의 태도 변화를 사실상 강제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김 위원장을 만난 뒤 대북 유화 자세를 보이자 ‘노선 변경’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납치문제가 “새로운 페이스에 들어갔다”(고노 다로 외무상)고 보고, 지금까지 진전이 없었던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인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아사히신문>에 “각국이 사다리를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일본만 사다리 위에서 떠들어대서는 납치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내 정치용 성격도 다분하다. 사학 스캔들로 추락한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연임을 이루기 위해 ‘외교의 아베’라는 이미지를 과시하고, 납치문제 해결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이다. 친(親) 아베 언론도 ‘이번에는 내 차례’ ‘나는 속지 않는다’ 등 아베 총리의 발언을 기사 제목으로 뽑으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일본 정부 측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일본 외무성 실무진은 지난 14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북한 측 관리들과 접촉했다. 고노 외무상도 오는 8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외교장관 회의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의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분위기 조성 차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울란바토르 접촉의 경우만 해도 뚜렷한 목적도, 성과도 없다는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AP·로이터연합뉴스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AP·로이터연합뉴스

일본 언론도 각종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북·일 정상회담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아베 총리가 8월 평양을 방문하는 방안,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서 만나는 방안, 9월 뉴욕에서 열릴 유엔총회에서 만나는 방안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블라디보스토크 정상회담이다. 오는 9월 11~13일 이곳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아베 총리는 이미 참석을 결정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초청했다.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하려 하고 있는 만큼 김 위원장이 포럼에 참석하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는 경제 지원을 북한과의 교섭 카드로 활용할 태세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비용 부담,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적 지원, 인프라 정비를 포함한 경제협력이라는 3단계를 상정하고 있다. 다만 이런 경제 지원이 납치문제 해결 전에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북·일 정상회담 실현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북한이 일본의 ‘러브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부터 불투명하다.

일본 정부는 납치 피해자가 12명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생사 확인과 전원 귀국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12명 가운데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북한에 있지 않다고 반박하고 있다.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된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와 만나도 좋다”고 말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왔지만, 북한의 공식 반응은 없다. 오히려 북한 국영 평양방송은 지난 6월 15일 논평에서 “일본은 이미 해결된 납치문제를 끄집어내 이익을 얻으려 획책하고 있다”며 “한반도 평화 기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치졸하고 어리석은 추태”라고 비난했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교섭 카드로 활용하려는 경제 지원에 대해서도 북한에 당장 요긴하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비핵화 문제가 진전될 경우 한국과 중국 등에서 경제 지원을 얻을 수 있는 만큼 북·일 교섭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2002년 북·일 평양선언에서 납치문제 해결과 함께 명기돼 있는 ‘불행한 과거의 청산’, 즉 식민지 지배 문제를 내버려둔 채 ‘돈’으로만 접근하려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운영하는 조선대학교의 리병휘 준교수는 “납치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것인가”라며 “일본이 향후 동아시아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설혹 북한이 응하더라도 납치문제 재조사 결과를 일본의 국내 여론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럴 경우 아베 총리의 정치생명도 위험해질 수 있다. 아베 총리는 납치문제에 대한 ‘강경 대응 이미지’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납치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만약 재조사에서 북한이 ‘일부 생존’이라고 답할 경우 ‘전원 생환’을 말해온 아베 총리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박정진 쓰다주쿠(津田塾)대학 교수는 “납치문제 해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레토릭(수사)”이라며 “납치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국교 정상화 협의와 함께 납치문제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데, 이건 국내 정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진우 경향신문 도쿄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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