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부의 대물림’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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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사 신설→일감 몰아주기→분할·합병 등 3단계 판박이 승계구도 흔들려

부를 대물림하기 위한 재벌들의 ‘승계 공식’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200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시도된 재벌들의 경영승계 과정은 판박이 마냥 ‘3단계’를 거쳐왔다. 1단계로 출자나 신주배정을 통해 총수 일가가 최대 100%까지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를 만든다. 2단계로 이렇게 만들어진 계열사에 그룹 일감을 몰아주거나 알짜배기 사업을 맡기는 방식 등으로 계열사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마지막 3단계로 계열사의 가치가 극대화됐을 때 그룹 내 주력 계열사들과 분할·합병하면 승계와 함께 부의 대물림도 완성되는 구도였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현대모비스 사옥. / 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현대모비스 사옥. / 연합뉴스

하지만 현대모비스가 5월 29일로 예정됐던 분할·합병 결의를 위한 임시주주총회를 21일에 전격 취소하면서 이 같은 공식에도 큰 균열이 생겼다. 3단계 작업이 시작도 못해보고 좌절된 셈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이미 3단계에 진입한 삼성도 각종 논란 속에 승계작업을 중단한 상태다. 현대차그룹과 삼성그룹이 승계 공식을 통한 부의 대물림에 실패한 이상 다른 재벌기업들이 이를 그대로 답습하기는 어렵게 됐다.

분할·합병 총수 뜻대로는 어려워져

전문가들은 “재벌들의 승계 공식을 사회와 시장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정부도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올 하반기엔 승계 공식의 중간고리에 해당하는 일감 몰아주기 문제를 어떻게든 손보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계획이 발표되자 미국의 헤지펀드인 엘리엇이 공개적으로 계획안에 대해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엘리엇은 현대모비스의 자사주 전량 소각 및 순이익의 50% 배당을 요구했고, 현대차그룹이 제시한 계획안 대신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가 합병하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엘리엇 탓에 합병이 무산됐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되지만 진짜 원인은 주주들과 시장에 분할·합병의 정당성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현대차 내부에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대차그룹이 제시한 그룹 지배구조 개편안대로라면 현대모비스는 핵심 부품사업 및 투자를 하는 ‘존속 모비스’와 모듈사업 및 애프터서비스(AS) 부품사업을 하는 ‘분할사업부’로 분할한 뒤, 이 중 분할사업부를 현대글로비스(향후 합병글로비스)로 합병시킬 계획이었다. 이후 합병글로비스가 탄생하면 총수 일가가 보유한 합병글로비스 지분을 매각해 이를 가지고 기아자동차 등이 보유 중인 존속 모비스 주식을 매입한다는 게 개편안의 전체적인 그림이다.

여기서 특히 논란이 됐던 게 현대모비스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분할사업부의 가치 추정 문제였다. 총수 일가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6.96%,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29.99%씩 각각 가지고 있다. 현대모비스 분할사업부의 기업가치가 크면 클수록 합병글로비스에 대한 총수 일가 지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대차그룹은 외부 회계법인의 평가를 바탕으로 분할사업부의 가치를 현 모비스의 40.12%로 제시했지만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가치 추정의 근거가 불명확하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합병글로비스에서 총수 일가의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분할사업부의 가치를 낮게 잡았다는 것이다.

분할사업부의 가치 산정 문제에서 시작한 논란은 분할사업부와 현대글로비스의 합병 문제로까지 번졌다. 개편안에 부정적인 의견을 낸 기관투자가들이나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의 반대 논리를 종합해보면 ‘합병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로 종합된다. 합병으로 얻는 효과나 이익이 명확지 않다는 지적인데, 이는 총수 일가의 그룹 지배력 강화나 경영승계 목적의 합병이라면 허용할 수 없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현대모비스 분할·합병계획 전격 취소

부정적인 건 단지 기관투자가들뿐만이 아니었다. 현대모비스 전체 주식의 55.98%를 보유한 소액주주(지분율 1% 미만)들 상당수도 잇따른 기관들의 반대의견을 듣고 계획안에 등을 돌린 것으로 전해진다. 증권가에서는 현대모비스가 임시주총에서 계획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필요한 지분율로 47~54%를 제시했다. 현대모비스의 총수 일가와 특수관계인 지분이 30%인 점을 감안하면 추가로 17~24%가량의 지분율만 확보하면 된다는 분석이었다. 산술적으로는 소액주주 절반만 설득해도 달성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때 삼성물산의 소액주주 비율은 25% 미만이었다. 당시에도 엘리엇의 반대로 합병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삼성물산 임직원들이 수박을 싸들고 소액주주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다는 얘기는 지금도 재계에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다. 현대모비스의 경우 국민연금이 계획안에 반대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해지면서 소액주주들에 대한 설득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5월 10일 열린 10대 그룹 정책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5월 10일 열린 10대 그룹 정책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대차그룹은 현대자동차의 최고경영자인 이원희 대표가 5월 17일 ‘주주 여러분들께 말씀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통해 주주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등 소액주주 설득에 나섰다. 현대모비스가 소액주주들에게 ‘수박’을 들고 찾아다녔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임시주총까지 일주일이 넘는 설득시간이 남아있었음에도 주총을 취소한 건 소액주주들의 분위기 역시 반대쪽으로 많이 기울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홍순탁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은 “과거에도 명목상으로는 독립된 두 법인의 합병이지만 결국은 총수 일가의 동일인 지배를 받는 상속 목적의 합병이 많았다”며 “이 같은 합병 행태가 수많은 부작용을 낳으면서 합병을 바라보는 눈도 많아졌고 그만큼 기준도 높아진 것”이라고 밝혔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애초에 분할 후 합병까지 계획을 내놓지 않고 일단 현대모비스를 분할한 뒤 여론과 시장 반응 등을 봐가며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을 추진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달라진 사회 분위기와 시장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했다.

현대차 정의선 부회장은 임시주총을 취소한 직후 성명을 통해 “개편안을 추진하면서 여러 주주분들 및 시장과 소통이 많이 부족했음을 절감했다”며 “여러 의견과 평가들을 전향적으로 수렴해 사업경쟁력과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지배구조 개편방안을 보완하여 개선토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규제 필요” 목소리 높아져

현대차그룹의 개편안은 일단 좌절됐지만 과거 총수 일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계열사를 분할·합병한 사례가 다양하고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제도 보완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2015년 10월 발간한 <총수 일가를 위한 불공정 합병·분할 사례와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합리적인 경영 판단이나 기업가치 제고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재벌들의 조직변경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경영권 분할형’, ‘경영권 승계형’, ‘법률적 규제 회피형’, ‘회사 재무구조 개선형’ 등으로 조직변경 유형이 나뉜다.

이번 현대차그룹의 개편안이 바로 ‘경영권 승계형’에 해당된다. 경영권 승계형만큼이나 논란이 분분한 게 바로 ‘법률적 규제 회피형’이다. 이에 속하는 조직변경 상당수가 사회적으로도 민감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4년 12월 단행된 CJ시스템즈(현 CJ올리브네트웍스)와 CJ올리브영의 합병이 꼽힌다.

CJ시스템즈는 정보기술(IT) 기업이고, CJ올리브영은 화장품을 주로 판매하는 유통기업이었다. 전혀 다른 업종이 합병한다는 소식에 재계에서도 갸우뚱하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CJ 측은 “IT를 활용한 스마트 유통회사로 거듭나겠다”며 합병을 강행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보고서를 통해 합병 전 CJ시스템즈는 2013년 기준 내부거래 비중이 79%가 넘었지만 매출규모가 크고 내부거래 비중이 작은 CJ올리브영을 흡수합병하면서 합병 후 내부거래 비중이 30% 선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CJ올리브네트웍스는 2016년 기준 매출 1조5558억원 중 3086억원(약 20%)을 내부거래를 통해 올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으로 올라 있다. 재계에서는 CJ올리브네트웍스에 대한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44%가 넘고, 특히 CJ그룹의 후계자로 꼽히는 이선호 CJ제일제당 마케팅담당 부장의 지분도 17.9%에 달해 그룹의 승계 등 총수 일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라도 조직변경 가능성이 있는 기업으로 꼽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5월 16일 열린 ‘현대차그룹 출자구조 재편방안 문제점 진단 토론회’에서 “불공정 합병에 대한 사회적 통제장치가 없다”며 공정거래법상 총수 일가 사익편취 규제조항을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또 공정거래법에 계열회사 간 합병을 공정위가 사전 승인토록 하는 이른바 ‘재벌 계열회사 간 합병 승인제’ 도입을 제안해 관심을 모았다.

전 교수는 “소수주주의 청구를 통해 공정위가 합병비율의 적정성, 경제력 집중 해소·완화 효과의 존재 등을 심사해 합병을 승인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법조문의 예시로 ‘청구가 있을 경우 공정위 승인 없는 합병은 무효’, ‘합병 승인의 기준과 절차에 대한 구체적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규정’ 등의 세부조항까지 제시했다.

같은 날 토론회에서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현대차그룹의 개편안은 지주회사 규제를 회피하고 세습을 위한 것일 뿐”이라며 현행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규제를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지주회사 기준 산정 시 많은 기업들이 규제 회피를 위해 이용하는 원가법 대신 지분법 또는 공정가치법으로 자회사 주식가액을 평가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금산분리 원칙도 강화해 금융지주회사가 금융·보험업을 하는 회사가 아닌 국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반대로 일반지주회사가 금융·보험업을 하는 국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도 금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5월 16일 참여연대에서 열린 현대차그룹 출자구조 재편안 관련 토론회에서 노종화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 참여연대 제공

5월 16일 참여연대에서 열린 현대차그룹 출자구조 재편안 관련 토론회에서 노종화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 참여연대 제공

경제개혁연대는 지배주주의 독단을 막기 위해 이사회의 독립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사의 자격요건 강화, 소액주주 추천 사외이사 선임 등을 법으로 의무화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 비상장 회사의 불공정 분할·합병으로 상장 모회사의 주식을 가진 소액주주들이 손해를 입을 경우 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다중대표소송 등 관련 소송제도의 개선, 주총에서 지배주주 및 계열회사들의 의결권 제한, 조직변경 승인 시 의결정족수를 현행 3분의 2에서 4분의 3으로 강화 등의 방안도 제안 중이다.

공정위 일감 몰아주기 규제로 만회할까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이 무산되면서 타격을 입은 건 현대차뿐만이 아니다. 개편안이 나오자 “긍정적으로 본다”며 정부의 ‘수락’ 입장을 밝힌 공정위도 비판에 직면해 있다. 현대차의 개편안은 공정위가 재벌들에게 요구한 이른바 ‘셀프 개혁’의 주요 성과 중 하나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김경률 소장은 “공정위의 발언을 선의를 가지고 해석하자면 순환출자고리 4개가 해소된다는 점인데 결과적으로 개편안을 통해 지배력 집중과 부의 편법적 승계를 위한 발판이 마련된다면 본말이 한참 전도된 것”이라며 “공정위가 재벌개혁에 대해 특정사안에 대한 양적 지표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공정위의 ‘긍정’ 발언은 과거 학자시절부터 “재벌들의 현 순환출자 구조 해소는 급한 게 아니고, 재벌개혁에 있어 우선순위도 아니다”라고 밝혀왔던 김상조 위원장의 소신과도 맞지 않는 부분이다. 재계에서도 공정위의 반응이 김 위원장 개인 소신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이 순환출자 해소 문제를 공약으로 제시한 데 따른 결과로 풀이하고 있다. 현대차의 개편안이 한 차례 좌절된 이상 현대차가 재차 개편안을 내놓았을 때 공정위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도 관건이다.

현대차 개편안이 무산되면서 공정위는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재계에서는 공정위가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일감 몰아주기 실태조사가 완료되는대로 강도 높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공정위는 2015년부터 CJ, 현대, 한진, LS 등 4곳을 일감 몰아주기로 제재해 왔다. 김 위원장은 5월 10일 열린 ‘10대 그룹 간담회’에서도 “일감 몰아주기는 중소기업의 희생 위에 총수 일가에게 부당한 이익을 몰아주고 편법승계와 경제력 집중을 야기하는 잘못된 행위”라며 “기업이 일시적으로 조사나 제재를 회피하면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잘못된 관행을 지속하기보다는 선제적으로 개선해달라”고 밝혔다.

공정위가 일감 몰아주기 관련 법 개정에 직접 나설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행 일감 몰아주기 규제대상 기업은 상장기업의 경우 총수 일가 지분이 30% 이상인 기업, 비상장기업의 경우 총수 일가 지분이 20% 이상인 기업이다. 올해 초 공정위가 이 기준을 상장·비상장 관계없이 20%로 일괄 조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이렇게 되면 삼성생명, 현대글로비스 등 주요 그룹의 핵심 기업들이 추가로 규제대상이 될 수 있어 재계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정위는 당시 “국회에 이미 관련 법들이 많이 발의돼 있어 정부가 별도로 입법에 나설 이유가 없다”며 부인했지만 국회에서 법안 논의에 진전이 없을 경우 공정위 내부에서 재차 입법 논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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