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추천 이사제’ 살아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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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헌 금감원장 내정되면서 공론화… 국회서도 개정안 준비

‘한 발짝도 진전이 없다.’ 지난해 11월 ‘근로자추천이사제(노동이사제)’ 도입을 검토하겠다던 코스콤의 최근 상황이다. 근로자추천이사제는 노동자가 이사회에 참여해 회사의 경영을 위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제도다. 정지석 코스콤 사장은 2017년 11월 취임 후 노조와 이사제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상생협약을 체결했다.

윤석헌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5월 8일 열린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이상훈 기자

윤석헌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5월 8일 열린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이상훈 기자

진전이 없는 이유는 일단 관련 법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코스콤 노사 간 상생협약서에는 ‘근로자추천이사제에 대한 법률적 토대가 마련될 경우’라는 단서조항이 붙었다. 상법 개정안 등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을 추진한 법안들이 줄줄이 국회 통과를 못하고 정부마저 제도 도입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코스콤의 상생협약 역시 힘을 잃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기도 한 근로자추천이사제가 도입 여부를 놓고 ‘군불’만 때다가 표류할 위기에 놓였다.

금융노조와 사무금융노조 다시 불 지펴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뒤 국정과제로 정해 추진하고 있는 사안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공약에서 ‘공공부문부터 노동이사제를 도입해 민간기업으로 확산’한다는 조항을 넣고 “근로자 대표 1~2명의 경영 참여를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근로자추천이사제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금융위원회의 민간 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는 2017년 12월 금융행정혁신 보고서를 통해 제도의 도입을 정식 권고하기도 했다. 금융행정혁신위는 당시 “근로자추천이사제가 낙하산 인사를 방지하고 금융회사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권고 취지를 밝혔다.

혁신위 권고시기와 맞물려 금융권 노조가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에 나서면서 제도 도입이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이하 사무금융노조)는 2017년 11월 근로자추천이사제 즉시 도입에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며 금융위원회에 노동조합과의 논의 테이블 구성을 요구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하 금융노조) 역시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권력 전횡을 견제하기 위한 필수 제도라며 노동자 이사제 도입을 촉구했다.

여세를 몰아 KB금융노조는 같은 달 열린 임시주주총회에서 주주제안권을 활용해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결과적으로 노조가 낸 선임안은 17.73%의 찬성을 얻는 데 그쳐 부결됐다. 하지만 KB금융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주목받았다. 국민연금은 포스코·KT·네이버 등의 최대주주다. 국민연금은 지분이 10%를 넘는 국내 기업만 84곳에 달해 주총 안건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KB금융지주 임시주총 이틀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은 노동자를 식구라고 말하는데, (노동자가) 의사결정에는 왜 참여하지 못하는가”라며 근로자추천이사제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근로자추천이사제에 대한 전망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금융위원회가 금융행정혁신위의 보고서에 대해 ‘보류’ 입장을 내놓으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근로자추천이사제 등의 내용이 담긴 혁신안에 대해 “취지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수용하기는 어렵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금융위의 입장 표명 이후 재계를 중심으로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지난 3월 금융위가 발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방안’에도 근로자추천이사제는 제외됐다.

국민연금의 입장 변화도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 논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KB금융노조는 3월 23일에 열린 KB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다시 추천했다. 당시 주총에서도 노조 추천 사외이사는 부결됐다. 중요한 점은 2017년 11월 주총에서는 찬성표를 던졌던 국민연금이 3월 주총에서는 근로자추천이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이다. 당시 금융권 안팎에서는 ‘재계의 극심한 반발을 우려해 국민연금이 몸을 사린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재계와 한국경제연구원은 반대

표류하던 근로자추천이사제는 최근 금융노조와 사무금융노조가 금융적폐 청산과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손을 잡으면서 그나마 ‘불씨’가 살아나는 분위기다. 5월 2일 두 노조는 ‘금융 공공성 및 금융 민주화를 위한 금융노동자공동투쟁본부’(이하 금융공투본)를 출범했다. 금융공투본은 금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6개 공동투쟁 과제로 선정해 공론화의 불을 지폈다.

윤석헌 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가 최근 금융감독원장으로 선임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윤 원장은 근로자추천이사제를 핵심 과제로 권고했던 금융행정혁신위의 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윤 원장은 금감원장 선임 소식이 발표되기 이틀 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근로자추천이사제는 금융회사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사 협력관계를 새롭게 일구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입법화도 재추진된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민간 금융회사에서도 우리사주조합이나 소수주주가 추천한 사람 가운데서 한 명 이상을 반드시 사외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하도록 하는 게 주요 골자다. 현행법은 금융회사가 이사회 내에 3명 이상의 위원으로 구성된 임원후보추천위원회를 두고 그 추천을 받은 사람 중에서 사외이사 3명 이상을 선임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회의 의사결정이 주로 대주주의 이익을 반영함에 따라 소수주주 및 금융회사 노동자의 이익은 보호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개정안에서는 우리사주조합이나 소수주주가 추천한 사람 중에서 반드시 1명 이상을 사외이사로 두도록 하고, 임원후보추천위원회에도 우리사주조합이나 소수주주가 추천한 사외이사를 1명 이상 포함하도록 하며,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위원의 3분의 2 이상을 사외이사로 구성하도록 명시했다.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이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자 재계에서도 즉각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사회적 합의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법’을 통해 밀어붙이기 식으로 제도를 도입할 경우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원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창출팀장은 “이미 노사정위원회와 노동조합이라는 노동자와 사측 간 대화 통로가 마련돼 있다”며 “근로자추천이사제가 강행될 경우 경영 효율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경영진들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에도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에서 개정안이 문턱을 넘으려면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여당의 한 관계자는 “금융위원회에서도 근로자추천이사제가 민감한 사항이니 국회에서 결론을 내달라고 넘긴 사안”이라며 “야당 반대가 심해서 법안 통과까지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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