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성인지’ 아직 갈 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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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첫 ‘성인지 인정’ 판결 나와… 조직 전체의 성평등 의식 높여야

지난해 3월 한 중앙일간지에 웃지 못할 정정보도문이 게시됐다. 대선을 앞둔 시점, 김은경 세종리더십개발원장이 국민의당 대선 경선 후보 TV토론회에 나온 박주선 후보에게 던진 ‘성인지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다’는 질문을 ‘성인잡지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다’고 보도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성인지’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이 첫 번째 이유로 꼽힐 듯하다. 성인지란 쉽게 말해 성별에 따른 입장과 경험을 동등하게 고려함으로써 성차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있는 기본인식 정도로 풀어쓸 수 있다. 한마디로 남성 위주의 시각에서 탈피해 여성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내려진 지난 4월 19일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이 착석한 모습. / 김창길 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내려진 지난 4월 19일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이 착석한 모습. / 김창길 기자

그렇다면 사법부에 ‘성인지 개념’이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일까. 중앙정부는 2010년부터, 지방정부는 2013년부터 ‘성인지 예산’을 도입하면서 성인지 개념을 수용해 왔다. 대법원도 이와 유사한 시점부터 ‘성인지 개념’을 도입, 각종 집행예산 가운데 성인지 예산 분류작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판결문에 ‘성인지’가 명시된 것은 지난 4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처음이다. 대법원(주심 권순일 대법관)은 4월 12일 제자인 여학생들을 성희롱했다는 사유로 징계해임된 지방대 이공계열 교수가 낸 교원소청심사위원회 결정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교수의 성희롱 사실을 부정하고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 원고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사법부 최초의 ‘성인지 인정’ 판결인 셈이다.

‘피해자 여성의 시각’ 납득시키기 어려워

성폭력사건은 피해자의 시각과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재판부 구성원 대부분이 남성인 사법부에서 ‘피해자인 여성의 시각’을 납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 여성 변호사는 “사건 발생 후 피해여성의 행동을 두고 같은 여성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납득되는 일들에 대해 재판부는 ‘의문부호’를 붙일 때가 정말 많다”면서 “당연한 일을 설득시키는 것만큼 성폭력사건에서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정상적인 피해자라면 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남성 법조인들의 시각이다. 당장 대법원이 파기환송한 항소심 판결문 안에서도 이 같은 시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서울고법 행정2부는 피해여성이 가해자와 합의를 하면서 “맞고소하지 않을 것”을 기재한 서류를 공증까지 하는 (적극적) 행동은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전형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 가운데 자신이 교수로부터 당한 성희롱 피해사실은 진술하지 않으면서 친구의 피해사실만 진술하는 것 역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볼 수 없다는 등의 판단을 내렸다. 여성계가 말하는 전형적인 ‘남성 가해자 위주’의 시각이다.

실제 성폭력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부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남성이다. 서울고법 성폭력 전담 5개 재판부 15명의 재판관 가운데 여성은 단 3명에 불과하다. 고등법원이 대등재판부를 구성해 운영된다 하더라도 재판장 가운데 여성이 한 명도 없는 것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서울중앙합의부와 단독재판부 전체 22명의 재판관 가운데 여성 재판관은 10명으로 절반에 못미친다. 여성 합의부 재판장은 한 명밖에 없다. 서울 동·남·북·서부지법 법관사무 분담을 살펴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동부지법의 2018년 3월 기준 성폭력 범죄 담당 형사합의 4개 재판부 12명의 재판관 가운데 여성은 3명에 불과하다. 남부지법은 형사합의 3개 재판부 9명 가운데 2명만이 여성 재판관이다. 북부지법 역시 형사합의 3개 재판부 9명 중 여성은 2명이다. 서부지법은 형사합의 2개 전담재판부 구성원 6명 중 3명이 여성 법관으로 다른 법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모두 남성 재판장으로 구성돼 있다.

물론 사법부가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법원 관계자는 “사법부도 성인지 개념을 학습하기 위해 매년 두 차례에 걸쳐 ‘성인지 교육’을 받는다”고 말했다. 해당 교육은 성폭력 전담 형사재판부뿐만 아니라 민사, 행정, 가사, 소액 등 모든 재판부 판사들이 반드시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실효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음 판결을 보자. 직장 내 성희롱 맞고소에 따른 민사소액사건이다. 서울중앙지법 심모 소액전담판사는 최근 피해자 ㄱ씨가 직장상사인 가해자 ㄴ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ㄱ씨는 직장 내 성희롱을 견디지 못하고 사내 신문고에 해당 피해사실을 기재했다는 이유로 가해자 ㄴ씨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피소됐다. 이후 검찰이 ㄱ씨에 대해 명예훼손 무혐의 처분을 내리자 ㄱ씨는 ㄴ씨를 상대로 무고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일부 성희롱 사실은 인정되나 ㄱ씨가 주장하는 ㄴ씨의 발언·행동 전체를 성희롱으로 인정할 수는 없어 ㄴ씨의 명예훼손 고소를 모두 무고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 청구액의 20%만 인정했다.

성폭력 재판부 구성원 대부분이 남성

문제는 판결문 속 내용이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재판부는 “원고(ㄱ씨)가 유부남이자 주말부부였던 직장동료 ㄷ씨와 자주 어울리면서 친하게 지냈고, 피고(ㄴ씨)가 ㄷ씨로부터 받은 여자 가슴 사진을 원고(ㄱ씨)에게 보여준 것은 ‘ㄷ씨가 이런 사람이니 경계하라는 뜻’일 뿐 성희롱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피고(ㄴ씨)가 원고(ㄱ씨)에게 업무가 끝난 후 영화를 보자고 한 것은 데이트를 강요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ㄷ씨가 원고(ㄱ씨)를 여자로 보고 있다고 말한 것도 팀 내의 분위기를 전달한 것이므로 성희롱으로 인정할 수 없다”, “직장 내 다른 직원으로부터 ‘원고(ㄱ씨)의 옷차림과 행실이 바르지 않다’는 말을 듣고 전달한 것은 조심하라는 의미지 성희롱을 했다고 할 수 없다”는 등의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의 판결을 기준으로 본다면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판결인 셈이다.

‘성인지 감수성’ 결여된 판결문들

여기에 변호사들의 각종 의견서 역시 재판부의 판단을 ‘흐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지속적으로 재판부에 제출해서 피해자를 ‘오염시키는’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난달 서울고법에서 진행된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위반사건 피고인 측 변호사가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현재 미성년자들은 신체·성의식의 발달로 자신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하여 더욱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피해 청소년 역시 사건 발생 당시 성인과 동일한 화장과 복장을 하고 있어 피고인이 미성년자로 인식하기 어려웠고, 피해자 주변 의견 청취 결과 평소 성인여성으로 오인할 만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등… 피해자 OOO는 범행 당시 만 16~18세로 이미 성인기에 달해 있었고….” 피해자를 비난함으로써 피고인의 행동을 옹호하는 전형적인 의견서 형태다. 성폭력 전담재판부를 맡고 있는 한 부장판사는 “피고인 측 제출서류를 받아보면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작성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부장판사는 “의견서 내용은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피고인의 선처를 바라는 내용으로, 거의 동일한 형태라고 보면 된다”면서도 “피고인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항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변호인 측 의견에 수긍이 갈 때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좀 더 적극적인 재판부의 경우에는 제출된 자료 외에 양형조사관을 통해 ‘피해자의 평소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가져와 달라’거나 성인 피해자는 동의를 얻어 비공개로 증인신문을 함으로써 재판부가 다시 판단하기도 한다”고 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신아 활동가는 “상담소가 개소한 이래로 지속적으로 사법부에 성인지성을 가지고 피해자 관점에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27년이 지난 2018년에 이르러서야 성인지 감수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면서 “이는 사법부가 그동안 일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상식선보다 못한 판결을 내려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법부가 남성중심적 조직문화에서 탈피하지 않는 이상 이번 대법원 판결문 하나만으로 기존 하급심 판결에 성인지성이 담길 것이라 낙관하기 어렵다”면서 “조직 전체가 성평등 수준을 올려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로펌의 낯 뜨거운 성범죄 변론 호객 광고

“네OO 검색창에 ‘카메라 촬영’을 한 번 쳐봐라. 성범죄 가해자가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지 알 수 있다.” 서울지역의 한 여성·청소년계 경찰의 말이다.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카메라 촬영’을 치는 순간 경찰관의 말을 금방 이해하게 된다. ‘성범죄 해결 OO성범죄전담센터’, ‘성범죄 전문로펌 법무법인 OO’….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최소 집행유예까지 보장해주겠다는 로펌의 낯 뜨거운 호객광고가 주르륵 검색된다. 이들 로펌은 ‘높은 승소율 1500건 이상 수임, 재판 전 무죄로 사건 해결’ 등의 문구를 내걸고 수임 장사를 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적법절차에 따라 조사 및 재판을 받도록 조력하는 것은 변호사의 역할이자 의무다. 그러나 이들 로펌이 내세우는 소위 ‘성공사례’를 보면 변호사가 법률조력 이상의 능력을 가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로펌들이 내세우는 성공사례를 살펴보자. #휴대폰에 탑재된 카메라를 이용해 다수 여성들의 특정 신체부위를 촬영한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된 의뢰인은 교육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어 성범죄로 처벌될 경우 직장을 잃을 수 있고, 취업도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합의 시도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형사조정에 회부해 일부와 합의하고, 검사와 면담을 진행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대학생 신분으로 성매매 알선영업 행위를 해오던 의뢰인이 가출청소년과 접촉, 성매매 영업을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에서 의뢰인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피해자와 합의를 성사시킨 뒤 처벌 불원 탄원서를 얻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집행유예를 얻어냈다.

형사사건에 대한 국선변호사 비중이 높아지는 와중에 성범죄사건은 변호사들에게는 몇 안 되는 ‘돈 되는 사건’에 해당한다. ‘최대 기소유예, 최소 집행유예’를 표방하며 호객행위를 하는 이유다. 수도권의 한 중견변호사는 “대부분 가해자의 보호자들이 사건을 의뢰하는데 ‘이런 건 맡기 싫다’ 싶으면서도 집행유예만 받아내도 성공보수를 받을 수 있어 굳이 거절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부 변호사들은 무혐의 또는 무죄판결을 받아내면 의뢰인을 상대로 맞고소를 권하기도 한다. 로스쿨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맞고소를 해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의뢰인이 변호사가 시키는대로 한다”면서 “변호사 입장에서야 한 명의 의뢰인으로부터 두 건의 사건을 수임할 수 있는 것이라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의 김보화 책임연구원은 “성폭력은 시장화되었고, 그 어느 분야보다 ‘돈이 되는 분야’로 선호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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