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경시’가 부른 대한항공 사태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20년 전에도 인명사고·탈루로 조씨 일가 퇴진…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꿔야” 여론

“대한항공은 전문경영인이 나서서 인명중시 경영체제로 바꿔야 한다.”

2018년 오늘 나왔대도 이상하지 않은 이 주장은 1999년 4월 20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폭탄발언이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기업을 콕 찍어서 경영진 교체 필요성을 역설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당시 대한항공에서 큰 인명사고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1997년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한 여객기가 괌에서 추락해 승객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대형사건은 전국민에게 충격을 안겼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에는 도쿄발 서울행 여객기가 김포공항 착륙 도중 활주로를 이탈해 22명이 다친 데 이어 99년에는 화물기가 중국 상하이에서 추락했다.

대한항공 조현민 통합커뮤니케이션실 전무가 직원에게 물을 뿌려 논란이 되고 있는 4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항공빌딩 앞에 한 시민이 서있다. / 권도현기자

대한항공 조현민 통합커뮤니케이션실 전무가 직원에게 물을 뿌려 논란이 되고 있는 4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항공빌딩 앞에 한 시민이 서있다. / 권도현기자

세 자녀 모두 경영자 자질에 의문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꿰뚫어 본 대한항공의 문제는 바로 ‘인명경시’였고, 당시 회장이었던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일가로는 개혁을 이뤄내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국세청의 한진그룹 세무조사에서 1조원이 넘는 탈루소득이 적발되면서 조씨 일가는 한진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대한항공은 20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가. 조양호 한진그룹 총수 일가가 다시 경영에 복귀한 이래 벌어진 ‘사람을 경시하는’ 요지경 같은 일들이 ‘물벼락’ 갑질 사건을 계기로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한진그룹 일가 및 그룹과 관련해 조사 및 수사에 착수한 기관이 경찰, 검찰, 관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국토해양부, 고용노동부, 법무부로 7곳에 달한다. 그 수나 범위로 볼 때 이 같은 전방위적 조사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한진그룹을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도 조씨 일가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어느 때보다 높다. 업계 관계자는 “경영자의 인문학적 소양과 태도는 가장 ‘돈’과 멀어 보이면서도 사실은 기업 곳곳에 스며들어 문화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라면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 이상 구성원이나 소비자가 용납하기 어렵다. 한진은 그 지점에서 임계점에 달한 듯하다”고 지적했다.

매일같이 터져나오는 조양호 총수 일가 관련 내부고발을 보면 공통적으로 사람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결여됐다. 장녀 조현아는 2014년 ‘땅콩 회항’ 사건으로 선고 받은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3월 칼호텔 사장으로 복귀해 “반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았다.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는 광고사 직원들에게 막말을 퍼부으며 물컵을 던졌고, 여론이 악화되자 직원들에게 ‘사임 없는 사과 이메일’만 덜렁 보냈다. 아들 조현태 대한항공 사장은 노인 폭행, 뺑소니와 막말 전력을 갖고 있다.

세 자녀 모두 경영자 자질에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모친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만행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2014년 인천 그랜드하얏트 호텔 공사장에서 여성 작업자의 팔을 낚아채고 자재를 걷어차는 제보영상이 공개되면서 그 심각성이 폭로됐다. 소나기가 내릴 때 본인만 우산을 쓰고 임산부를 비롯한 직원들은 30분 넘게 비를 맞도록 했다거나, 운전기사에게 “야, 이 개X끼야” 같은 욕설과 고성을 내지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직원에게 뜨거운 뚝배기를 던졌다는 증언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되는 중이다. 수도권 대학병원 모 교수는 “이 이사장은 자기애성 성격장애와 분노조절 장애의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재벌 2세·3세들이 부와 권위를 그대로 대물림하면서 중세봉건적인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다. 자칭 상류계층 특유의 미성숙한 문화와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2016년 4월 26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청사 상량식에 참석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 이준헌 기자

2016년 4월 26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청사 상량식에 참석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 이준헌 기자

계열사 12곳에 전문경영인은 5명뿐

이렇듯 오너 일가가 타인 위에 ‘군림’하는 태도는 한진그룹의 인사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조 회장 일가는 한진그룹 주요 계열사 12곳 중 11곳의 대표이사 및 사내이사를 맡으며 기업 경영을 독식하고 있다. 조양호 회장은 한진칼·대한항공·진에어·한진관광·정석기업 등 8곳에서 대표이사 등 임원직을 맡고 있다. 지난해 이를 통해 챙긴 연봉은 66억4000만원이다. 딸 조현민은 대한항공 전무를 비롯해 7곳의 임원이었고, 아들 조원태는 대한항공·한진칼을 비롯해 4곳을 맡고 있다.

반면 부사장급 이상 전문경영인은 한진 계열사 12곳 임직원 2만7000여명을 통틀어 5명이다. 지난해 재계 서열 14위, 자산총액 29조원인 한진과 비슷한 다른 기업과 비교해도 현격하게 적다. 예로 서열 11위인 신세계는 총 37개 계열사를 두고 있는데, 부사장급 이상의 전문경영인 17명이 계열사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직원들에게 그만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오너 일가의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조양호 회장은 2016년 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당시 페이스북 댓글로 “(비행기 조종이) 힘들다고요? 자동차 운전보다 더 쉬운 오토파일럿으로 가는데”라며 “아주 비상시에만 조종사가 필요하죠. 과시가 심하네요. 개가 웃어요”라고 적은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조씨 일가의 전횡을 막지 못한 것일까. 소유와 경영의 개념이 혼재된 탓에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견제하지 못하는 한국의 봉건적 기업문화가 손꼽힌다. 왕처럼 군림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씨 일가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서 이제 조양호 총수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제 머리 깎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론이 적지 않다. 대한항공과 한진칼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발동해 총수 일가 견제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래서 나온다. 소액주주들을 규합해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대한항공 브랜드 가치를 추락시킨 조씨 일가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대한항공 지분 3.99%를 가진 직원들이 힘을 더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온다.

<최민영 경향신문 기자 min@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