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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반의 반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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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회부된 건 거의 집권 후반 최순실 관련… 초반 정윤회 개입 의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박정희) 때문에 기업들이 다 먹고 살게 되지 않았느냐는 의식이 강해요. 그건 웬만한 참모들은 다 압니다.” ‘도대체 박 전 대통령은 무슨 배짱으로 기업들한테 그랬는지’에 대한 TV조선 이진동 전 사회부장의 질문에 대한 박관천 전 경정의 답이다. 이 질문과 답변은 이 전 부장이 지난 2월 말 펴낸 책 <이렇게 시작됐다>에 실려 있다. 박 전 경정은 2014년 박근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이른바 ‘정윤회 비선실세’ 문건을 만들었다가 쫓겨났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큰 영애 현대그룹 새마음대회 관계자 접견담화’라는 제목의 사진. 상석에 ‘큰 영애’ 박근혜가 앉아 있고 오른쪽 자리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앉아 있다. 1979년. / 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큰 영애 현대그룹 새마음대회 관계자 접견담화’라는 제목의 사진. 상석에 ‘큰 영애’ 박근혜가 앉아 있고 오른쪽 자리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앉아 있다. 1979년. / 국가기록원

박 전 경정의 문건은 그해 말 <세계일보> 단독보도로 세상에 공개된다. 조사를 받으며 그가 했다는 말, “우리나라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는 박근혜”가 은밀히 회자되었다. 비유적인 표현이었지만, 2년 뒤인 2016년 가을께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이 이야기는 사실로 나타난다.

박 전 경정은 자신이 작성한 문서를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다. 정작 실형을 살게 된 것은 병합된 다른 건이었다. 이마저 계속된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 결국 권력의 ‘역린’을 건드린 괘씸죄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朴, 기업 돈 공출 당연시한 까닭은

1974년 어머니 사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는 아버지의 곁에서 수행하며 정치수업을 받는다. 현재 재벌 수장의 선대들로부터 ‘퍼스트레이디’ 내지는 ‘큰 영애’로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근거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국가기록원에서 ‘큰 영애’ 등으로 검색하면 상석에 박근혜를 모시고 정좌하고 앉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모습(사진1)이나, 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부녀에게 차트를 설명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에게서 재벌과 권력 사이의 ‘갑을(甲乙)’을 확인할 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큰 영애’ 박근혜의 만남을 담은 기록사진도 있다.(사진2)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의 제목은 ‘박정희 대통령 큰 영애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운영위원 접견’이다. 1979년도에 찍힌 것으로 되어 있으니 현대건설 사장 시절이다.

4월 6일 1심 선고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유죄가 내려진 18개 공소사실을 보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2013년 취임 이후 탄핵까지 계속된 ‘범죄’로 되어 있는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기밀문건 유출 공모나 2013년 말쯤의 CJ그룹 이미경 회장 퇴진 요구 등 2~3개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공소대상 사건이 벌어진 시점은 박 전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인 2015~16년도에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국정농단’으로 규정될 만한 일이 없었을까.

여기서 다시 주목해봐야 하는 것은 2014년 12월 <세계일보> 보도로 꼬리가 잡힌 ‘비선실세 의혹’이다. 고 김영한 민정수석 업무일지 등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당시 청와대는 보도가 나오기 전부터 <세계일보>가 보도할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박근혜 청와대는 ‘정윤회 국정농단 의혹’을 ‘청와대 기밀문건 유출사건’으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해 성공한다. 그 후 다시 2016년 7월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이 터져나올 때가지 ‘비선실세 권력’은 수면 밑으로 잠복했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2014년 12월 시점에 검찰이 철저하게 파헤쳤다면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오늘날의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검찰 수사 결과로는 박 전 경정이 작성한 문건은 ‘허무맹랑한 찌라시’인 것으로 결론을 냈었다. 정말 강남의 중식당에서 ‘십상시’ 모임은 없었던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 큰 영애 새마음봉사단 자문위원 접견 악수’라는 제목의 사진. 고개 숙여 악수하는 이가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전 대통령)이다. 1979년. / 국가기록원

‘박정희 대통령 큰 영애 새마음봉사단 자문위원 접견 악수’라는 제목의 사진. 고개 숙여 악수하는 이가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전 대통령)이다. 1979년. / 국가기록원

앞서 이 전 부장의 책은 에필로그로 아직 규명해야 할 과제로 ‘정윤회씨의 국정개입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1순위로 들고 있다. 미르·K스포츠 의혹에 이어 박근혜 의상을 담당하던 최순실씨의 샘플실, 김영한씨 회고록 등의 특종보도를 했던 이 전 부장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취재’에 대한 이야기도 책에선 담고 있다. 애초 박 경정 비선실세 문건에 담겨 있던 십상시 회동장소 강남 중식당에 대한 취재다.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탄핵국면이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이뤄진 이 취재에서 중식당의 여사장은 실제 그곳에서 정윤회씨 및 십상시 모임이 열렸으며 “기업인들이 이권을 걸린 문건을 들고 찾아왔었다”고 증언했었다. 정권 초기부터 국정개입은 “시작부터 어마어마했으며” 특히 이곳에서 정씨는 MBC 사장을 만나 좌지우지하며 이용했다는 증언도 내놨다.

정윤회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2007년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을 그만두면서부터 “야인으로 살아왔다”고 밝혀 왔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에 와서 복기해보면 공교롭게도 그 시점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전후로 보인다. 이 해 2월 최순실씨는 최서연으로 개명하고 이혼소송에 들어간다. 두 사람의 이혼이 최종 확정된 것은 그해 5월이다. 이혼 후 정윤회씨는 수개월 동안 충청도 산골의 아버지 정관모씨 집에 칩거한다. 2016년 10월 <주간경향>을 만난 정관모씨는 아들의 이혼은 “박근혜 대통령의 허락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상식적으로 남의 가정사에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허락을 하고 말고 할 문제인지’에 대한 질문에 정관모씨는 “그 당시 (정·최 부부와 박 대통령의) 관계가 그랬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떤 관계였길래?

박근혜와 최순실·정윤회 부부의 관계는?

“쉽게 말한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맺어져 있는 시종·시녀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부부라든가 가족이라고 상정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보면 안된다.” 이른바 ‘조순제 녹취록’의 주인공 조순제씨 아들 조용래씨의 말이다. 조씨의 할머니는 최순실씨의 어머니 임선이씨다. 조씨의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요구로 오랫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 집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다시 조씨의 말이다. “최순실씨가 박 전 대통령 옆에 사람이 오래 붙어 있는 꼴을 못보는 스타일이었다. 삼성동 집에서 일하던 사람도 (박 전 대통령이) 정을 붙일 만하면 갈았다. 결국 최순실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돈 문제가 아닐까.” ‘박근혜 1심 재판 선고 후 아직 남은 규명해야 할 과제가 무엇으로 생각하는가’라는 <주간경향> 질문에 대해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말이다. “무기 관련 비선개입도 안 밝혀졌고, 외교농단도 안 밝혀졌다. 현재 재판은 최순실 특검이 출범할 때 만들어진 15개 리스트에 근거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뤄진 것인데, 보다시피 그런 것들은 규명대상에 포함되지 않지 않았나.” 그는 “정윤회씨의 비선개입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아직 국정농단의 진실은 반의 반 정도밖에 안 밝혀졌는데, 나머지 것들은 다시 청문회나 특검을 해야 밝힐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밝혀내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현재 재판에 올라온 18가지 공소사실을 보면 정윤회씨의 개입 흔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대부분 그가 권력에서 배제된 집권 후반기에 최순실씨가 벌인 일들이다.

최씨 국정농단이 밝혀진 후 정씨는 인터뷰에서 “내가 (박근혜를) 모실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국정농단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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