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저 아저씨와 합의하지 마세요”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처벌의사가 부모나 법정대리인에 의해 외면당해

미성년자들도 ‘미투’를 외친다. 다만 묻힐 뿐이다. 가해자가 유명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학교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이유로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미성년자들을 향한 성범죄자의 폭력행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피해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 겪은 성폭력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법부 제공

사법부 제공

김주영씨(가명·39)는 성폭력 피해자다. 그가 국민학교 4학년이던 20여년 전 동네 아저씨로부터 준강간을 당했다. 그는 “하굣길에 그 사람이 ‘이거 집에 갖다줘라’며 불러 아무 생각 없이 (세탁소에) 들어갔다가 그 짓을 당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집으로 돌아와 세탁소 아저씨가 자신에게 한 일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부모님은 “엄마·아빠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너는 그 일을 입밖에도 내지 말아라”고 했다. 김씨는 뒤늦게 부모님이 그 남성으로부터 돈을 받고 합의했다는 것을 알았다. 김씨는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돌아온 답변은 “다 너를 위해서다”였다. 김씨는 “미투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30년 전 그 일이 다시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여자가 성폭력을 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피해자가 동네를 떠나야 하는 분위기였다”며 “부모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 애써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그때 부모님이 좀 더 강하게 나를 지켜주셨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친고죄 폐지 전 효력 막강했던 ‘합의’

한국여성정책연구소가 여성가족부 용역으로 2015년 12월 작성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발생추세와 동향분석> 연구보고서를 살펴보면 2009~2014년 사이 강간 피해를 당한 미성년자는 4217명에 달한다. 강제추행 피해 미성년자는 7923명이다. 같은 기간 13세 미만의 아동 피해자는 몇 명일까. 여성가족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3969명(강간·강제추행)이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성폭력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들이 전부 중한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합의’라는 양형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친고죄가 폐지되기 전까지 ‘합의’의 효력은 실로 막강했다. 가해자 입장에서 처벌을 피하는 방법으로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는 것보다 더 완벽한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기소가 됐더라도 재판에서도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의 ‘합의서’, ‘처벌불원서’는 형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돼 왔다. 때로는 피해자인 미성년자는 원치 않는 합의서가 부모(법정대리인)에 의해 작성되는 사례도 나타났다. 과거 아동·청소년 성폭력범죄 전담 재판부를 맡아온 중견 변호사는 “지금은 그렇지는 않을 것임을 전제로 말한다”면서 “피해 청소년의 의사를 법원이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피해자 부모만 가해자와 합의한 후 작성한 것으로 짐작되는 처벌불원서와 피해자의 학생증 카피본이 제출되면 (재판이 바쁘다는 핑계로) 피해학생의 진의는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들의 처벌의사가 부모 또는 법정대리인에 의해 무시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해자가 부모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이의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일 경우 부모들은 고소보다는 합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결국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합의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청소년 성범죄 피해자들의 ‘미투’를 막는 장애물이 돼 온 것이다. 서울지역의 여성·청소년계 한 경찰 간부는 “미성년자뿐만 아니라 성폭력범죄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진술을 하러 올 때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동석하도록 하고 있는데 미성년자들은 대부분 부모님과 동석해 진술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사관들은 피해아동의 정확한 진술과 처벌의사를 확인하려 노력하지만 아이는 진술하는 순간순간마다 부모의 눈치를 본다”며 “고소하지 않겠다는 피해아동의 의사가 100% 아동의 의사인지는 수사기관으로서는 전부 다 알 수 없지만 부모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작용한다는 심증은 있다”고 덧붙였다. 2016년 <청소년상담연구>지에 실린 ‘현장전문가들이 인식한 성폭력 피해 청소년의 특성과 개입방안’(강석영·김래선·류다정 공저)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의 성폭력 피해는 ‘듣는 상대(부모)가 어떻게 반응하냐’도 피해자의 앞으로의 개입과정이나 치료 여부에 영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피해 청소년의 부실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 청소년이 적절한 대처를 받지 못하고, 부모의 잘못된 개입으로 인해 문제가 커지기도 한다”며 “가족이나 친지, 지역사회와의 강한 사회적 지지와 유대감 등은 성폭력 피해를 완충하거나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언급했다.

가해자들이 합의에 집착하는 이유

친고죄가 폐지된 지도 5년이 지났다. 성폭력 피해자의 ‘처벌 불원’ 의사는 더 이상 수사기관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해자들은 여전히 합의에 집착한다. 형을 낮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피해자의 합의서와 처벌불원서이기 때문이다. 상당액의 보상금도 양형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문제는 미성년 피해자의 합의 없는 법정대리인과의 합의다. 한 부장판사는 “몇 년 전 대법원에서 고소에 관한 법정대리인의 권한이 어디까지냐를 놓고 기준을 정한 적이 있다”면서 “고소에서는 민법상의 법정대리인과 달리 실제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가 중요한 것이므로 부모가 함부로 대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논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실제 2009년부터 도입한 양형조사관 제도를 성폭력 피해자의 의사 확인에 활용하기도 한다. 양형조사관을 통해 피해자의 현재 상태, 피해자와 부모의 상황 및 관계 등을 조사해 재판에 반영하는 것이다. 한 부장판사는 “초등학생의 의사는 재판부도 확인하기 어렵다”면서 “피해아동을 직접 만나기 어려울 경우 조사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쉼터 직원이나 학교 교사 등을 통해 아이의 상태와 의사를 확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 부모가 양형조사관과 아이의 면담을 거절하는 경우 거절하는 이유까지 자필로 기재해 오기 때문에 피해아동을 직접 볼 수 없는 재판부로서는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지난 3월 말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형사법정. 친족 간 성폭력범죄를 저지른 피고인 측 변호사가 재판부에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제출했다. 변호인은 “피해자는 현재 마음의 상처를 씻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1심에서 엄벌에 처해주셨고, 그간 (가해자가) 키워준 정도 있어 피해자가 부모님과 상의해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제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서류를 살펴보던 재판장이 변호인에게 물었다. “피해자 본인 의사를 확인한 것이 맞습니까?” 순간 멈칫하던 변호사는 “아버님의 의사만 확인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재판장은 변호인이 제출한 합의서 및 처벌불원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5년생이면 이제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인데…, 피해자 변호사님 나와 계시지요. 피해자 아버지의 의사만 확인될 뿐이고, 본인과도 합의한 것이 맞는지 다시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기일에 나오기 어려우시다면 서면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법원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미성년자의 처벌 의사가 확고하다면 부모의 처벌불원 의사는 참고자료로만 활용될 뿐 피해자의 의사로 반영되지 않는다”면서 “재판이 피해자에게 마음의 부담을 줘서도 안 되지만 피해자의 의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했는지도 판결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