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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국가에 남긴 숙제는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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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재단 설문 결과 ‘진상규명’ 이어 ‘안전강화’를 우선 해결과제로 꼽아

김강욱씨(41)는 자신의 SUV 자동차 뒤에 노란리본 스티커를 부착하고 다닌다. 벌써 3년이 지났지만 그는 뗄 생각이 없다. 간혹 행인들로부터 “재수없게 저런 걸 아직도 붙이고 다닌다”는 험담을 듣기도 하지만 그는 “나도 아빠라서 뗄 수가 없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아이가 100일이 채 안 됐었어요.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아내가 TV로 사고장면을 보며 펑펑 울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저렇게까지 울 일인가’ 생각도 했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다치기도 하고, 사고날 뻔하는 일들을 겪으며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김상민 기자

김상민 기자

그는 “아내를 보면 세월호가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어떤 ‘낙인’ 같은 것을 찍어준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종종 아이에게 “엄마는 네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만 크면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어쩔 수 없이 자식과 이별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세월호처럼 구할 수 있는 목숨을 손놓고 있다 잃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올해 5살이 된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생존수영도 가르칠 생각이다. 김씨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국가가 아닌,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4·16재단 최우선 역할 ‘안전사고 예방’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들고 다닌다. 노란리본은 차 유리에도, 행인의 가방에도, 연예인의 손목에도 있다. 생존수영이 초등학교 3·4학년생들의 필수교과로 지정됐다. 사람들은 2014년 4월 16일을 여전히 아파한다.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침몰한 지 1440여일이 지났다. 부모와 자녀를 잃은 수많은 세월호 유가족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이어갔다. 촛불집회의 결과 정권이 바뀌었고, 감춰져 있던 많은 일들이 드러났다. ‘세월호 7시간’의 비밀도 일부 밝혀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하고, 수백 명의 생명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보고조차 받지 않은 사실이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살아남은 사람들과 이들을 바라보며 살아온 국민들에게 ‘세월호’는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세월호 가족과 시민들이 설립한 민간재단인 ‘4·16재단 설립사무국’(이하 4·16재단(준))·글로벌리서치가 지난 3월 6~7일 이틀간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발생원인에 대한 진상규명’을 우선 해결과제로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중복응답). 응답자 가운데 67.1%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침몰 이유의 명확한 규명을 문재인 정부에 요구하고 있었다. 안전재난 대책 강화(60.8%) 및 책임자 처벌(37.3%), 피해자 보상 및 치유(28%)가 뒤를 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세월호 사건 대응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응답자(29.1%)들은 철저한 진상규명(59.5%)보다는 안전재난대책 강화(64.1%)를 우선과제로 꼽았다.

안전 강화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다른 설문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4·16재단(준)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역할로 응답자의 67.4%가 ‘해상 안전사고를 비롯한 안전사고 예방 및 안전문화 확산’을 꼽았다. 재난상황을 겪었거나 재난상황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심리·생활안전 및 사회복귀 지원(58.5%), 생명존중 문화 확산을 위한 사업(23.3%), 세월호 참사 추모 및 기억(18.7%) 등도 재단이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역할로 답했다.

세월호는 실제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남겼다. 문화연구자 정원옥씨는 책 <재난을 묻다>에서 세월호가 국가에 남긴 숙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라진 이들의 희생에는 억울함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기 어렵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난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라진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함께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국가와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만들어낸 이들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는 실천이 되어야 한다.’

재단 정식명칭에도 ‘안전’이 주요 키워드

지난 3월 20일 발표된 문재인 대통령 개헌안에는 이들의 염원이 헌법조항으로 명시됐다. 바로 생명권과 안전권 신설이다. 제10차 헌법 개정안에는 생명권과 안전권이 포함됐다. 세월호 참사, 살인사건 등 각종 사고와 위험으로부터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국민이 안전하게 살 권리를 헌법조문에 명시함으로써 국가의 제1 역할은 국민의 생명보호 및 안전유지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모든 국민은 안전하게 살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천명하는 한편, 국가의 재해예방 의무 및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노력 의무를 ‘보호의무’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세월호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안전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시민들은 4·16재단(준)이 출범하면서 갖게 될 명칭에 어울리는 단어로 ‘안전(43%)’을 가장 많이 택했다. 노란리본(25.8%)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응답 역시 ‘생명(23.8%)’이었다. 재단 설립이 단순히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안전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해줄 것을 시민들은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응답자의 51.1%는 재단이 실시하는 생명안전교육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고, 공동체 살리기 활동(30.9%)에 참여하겠다는 응답자도 뒤를 이어 나타났다. 또 전체 응답자 중 50.3%가 재단이 설립되면 후원을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재단 관계자는 “국민들은 대체로 세월호 침몰 원인 및 당시 정부·관계부처의 대응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또 국민의 안전 강화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여 이를 재단의 사업으로 어떻게 녹여낼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재단의 명칭은 응답자가 선호하는 다섯 개의 주요 키워드인 ‘안전’, ‘노란리본’, ‘생명’, ‘4·16’, ‘세월호’를 어떤 방식으로 적절히 녹일 수 있을지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4·16재단(준)은 오는 4월 4일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재단의 정식명칭 및 로고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재단설립 추진단에는 고 박성빈양의 어머니 김미현씨를 비롯해 안순호 4·16연대 공동대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김희중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청화 스님(전 조계종 교육원장), 신경림 시인, 심재명 명필름 대표 등 종교·노동·문화계 인사들이 참여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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