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의결권 ‘쓴소리’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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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 의결권 행사 공정성 확보 과제

주요 대기업들의 주주총회가 몰려 있는 이른바 올해 ‘슈퍼 주총 데이’가 마무리됐다. 몇몇 기업에서는 주총 안건을 놓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지만 예년처럼 큰 이변은 없었다. 논란의 대상이었던 일부 기업의 사외이사 선임이나 지배구조 개선 관련 안건들이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다.

3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삼성물산 제54기 정기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3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삼성물산 제54기 정기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슈퍼 주총 데이에서 재계의 관심을 모았던 사안 중 하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이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국민연금이 2018년 하반기에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는 협약이다. 이 때문에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을 앞둔 국민연금이 올해 슈퍼 주총 데이에서 기업과 재벌들의 요구에 얼마나 많은 ‘반대’를 외치는가가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삼성물산·롯데 등 주총에서 ‘반대’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지난해 12월 집계한 자료를 보면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업은 275곳에 달한다. 10%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도 84개나 된다. 네이버, KT, 엔씨소프트 등의 기업은 최대주주가 국민연금이다. 물론 국민연금의 지분율이 주총에서 안건의 통과 여부를 좌우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산 60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국내 대표적 기관투자가로서 기업을 전반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올해 슈퍼 주총 데이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을 코앞에 두고 있는 터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결과에 많은 이목이 집중됐다.

그렇다면 올해 주총에서는 국민연금이 안건에 대해 얼마나 많은 ‘반대’를 표명했을까. 가장 큰 화제가 됐던 삼성물산 주총에서 국민연금은 최치훈 사내이사 선임 등 5건의 이사·감사 선임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국민연금은 “해당 후보들은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계획 승인을 결의한 이사회 구성원”이라며 “이사의 선량한 권리이자 의무 수행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며 반대이유를 밝혔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찬성’ 의견을 냈다가 홍역을 치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문제는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과 삼성그룹 간 뇌물수수 의혹으로까지 번졌고, 찬성 의견을 내도록 종용한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은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주총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통상 의결권 행사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투자위원회가 내부적으로 마련된 지침에 따라 결정한다. 하지만 이번 삼성물산건은 국민연금의 최고의결기구격인 국민연금기금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로 결정을 넘겼다. 투자위가 그만큼 결론을 내는 데 부담을 느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민연금은 롯데지주, 기아자동차, 넥센타이어 등 주요 대기업 주총에서도 여러 차례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2월 27일에 열린 롯데지주 주총에서는 롯데상사, 대홍기획 등 6개 회사를 분할합병하는 안건에 대해 “주주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 기아자동차와 포스코강판 주총에서는 “이사 보수한도액이 경영성과에 비해 과다하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넥센타이어, 엘지하우시스 주총 등에서는 특정 사내·외 이사의 장기간 선임, 과도한 겸임 등을 이유로 이사 선임을 반대하기도 했다. 지분율 한계상 국민연금이 반대한 사안들이 부결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주요 주주로서 ‘쓴소리’를 톡톡히 한 셈이다.

실제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지는 비율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CEO스코어가 올 1월 국민연금의 2017년 30대 그룹에 대한 의결권 행사 내역을 분석한 결과 국민연금은 총 144회 주총에 상정된 639건의 안건 중 13.3%인 85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이는 2016년 당시보다 반대표를 던진 비율이 3.3%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2018년의 경우 연말까지 집계를 해봐야 정확한 수치가 나올 예정이지만 하반기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 등을 감안하면 반대의사 표명 비율이 더 올라갈 것으로 전망된다.

노조 추천 사외이사 찬반 바뀌어 논란

관건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 후 의결권 행사를 얼마나 공정하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국민연금은 3월 22일 열린 KB금융지주 주총에서 KB금융지주 노조가 추천한 사외이사에 대해 선임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국민연금은 “이사회의 구성상 주주 제안에 따른 주주가치 제고가 불분명하다”며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는 즉시 논란이 됐다. 국민연금은 넉 달 전인 2017년 11월 20일에 열린 KB금융지주 임시주총에서는 노조가 추천했던 사외이사에 대해 선임 찬성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불과 넉 달 만에 노조 추천 사외이사에 대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이 정반대로 뒤집히면서 그 기준을 놓고 비판이 제기됐다. 경제개혁연대는 3월 23일 논평을 통해 “정반대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바뀐 결정의 이유와 근거를 의결권 행사지침과 그 세부기준에 입각해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며 “이번에 내놓은 근거는 현행 의결권 행사지침을 볼 때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노조 추천 사외이사의 경우 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이사회 구성 다양성 등을 이유로 시민단체들이 기업들에 도입을 촉구하고 있는 제도다. 매년 각 기업의 주총 안건을 평가해온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도 이번 KB금융지주 노조의 사외이사 추천에 대해 ‘찬성’ 의견을 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을 준비 중이라면 노조 추천 사외이사에 대해 찬성을 해야 코드 가입 취지에 더 부합한다”며 “왜 이번엔 반대의견을 냈는지 의아하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KB금융지주의 노조 추천 사외이사 문제 역시 삼성물산 안건과 함께 의결권 행사 전문위에서 결정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의결권 행사 전문위를 운영하는 복지부는 경제개혁연대의 논평 등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노조 추천 사외이사제는 아직 찬반 양론이 많아 지난번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을 국민연금이 찬성한 뒤 재계에서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며 “국민연금도 재차 판단하기가 부담스러우니 의결권 전문위에 사안을 넘긴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의사결정기구에 따라 자의적으로 다른 판단을 한다면 누가 국민연금의 결정에 납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오히려 기금운용본부와 의결권 전문위에 각각 로비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등 시장 혼란만 부추기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며 의결권 행사 결정과정의 공정성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 후 국민연금의 건전한 기업 감시·견제 역할을 뒷받침할 제도 개선 마련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CEO스코어 조사를 보면 2017년 30대 기업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반대했던 안건 중 최종적으로 부결된 안건은 4건으로 전체의 0.6%에 불과했다. 삼성물산만 해도 국민연금이 반대한 이사후보 전원이 전원 주총에서 이사로 선임됐다. 국민연금 혼자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이에 소액주주들이 이사 선임 시 투표권을 특정 이사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 등의 도입이 상법개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이총희 연구원은 “사외이사들이 재벌 총수들의 거수기 역할을 하거나 경영상 문제를 일으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도록 돼 있는 구조가 문제”라며 “주총에서 사외이사 선정을 투표로 저지하기보다는 책임소재를 강화해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 사외이사 제안을 받아도 스스로 고사하도록 만드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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