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 사외이사로 감시가 잘 될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업 바람막이 논란 늘 지적… 사외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도 제 역할 못해

‘철’은 단단하지만 만드는 회사는 가볍다. 국내 최대 철강기업 포스코 얘기다. 포스코는 지난 2000년 민영화됐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포스코는 ‘주인 없는 기업’ 취급을 받았다. 정권에 따라 으레 포스코의 수장도 교체됐다. 지난 2014년에 취임한 권오준 포스코그룹 회장은 예외다. 정권교체 바람 속에서도 지난해 3월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권 회장이 ‘최순실’과 연루됐다는 꼬리표는 떼내지 못했다. 권 회장의 취임과정에 최순실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여전히 따라다닌다. 실제로 포스코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16억원을 들여 펜싱팀을 만들고 최순실의 더블루케이에 운영을 맡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포스코는 2015년 말 미르재단에 30억원을, 2016년 4월에는 케이스포츠재단에 19억원을 출연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구속된 가운데 롯데그룹은 법조계 출신 사외이사를 대거 선임했다. | 경향신문 이준헌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구속된 가운데 롯데그룹은 법조계 출신 사외이사를 대거 선임했다. | 경향신문 이준헌기자

외풍 피하기 위해 친정부 인사 임명

정권교체 후 포스코가 ‘외풍’을 피하기 위해 영입한 ‘방패’는 친정부 인사다. 많은 기업들이 택하는 ‘검증’된 방법으로 포스코는 이번에도 안전한 길을 택했다. 지난 9일 포스코는 주주종회에서 김성진 현 삼성증권 이사를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김성진 후보는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 산업정책비서관을 거쳐 2004년 중소기업청장, 2006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번 김성진 이사의 선임은 현정부 코드인사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증권 사외이사로 재직 중인 김 이사의 이력을 두고도 잡음이 일었다. 삼성증권은 지난 2011년 포스코의 사채 발행을 주관하는 한편 지난 2010년 계열사 성진지오텍 인수 당시 재무자문사로 선정됐던 회사다. 김 이사가 두 회사의 사외이사직을 겸직할 경우 이해관계가 충돌될 위험이 있어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 경제시민단체에서는 김 이사의 선임을 반대했지만, 포스코는 김 이사의 선임을 강행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CEO 교체로 몸살을 앓아온 KT 역시 참여정부 인사를 내세워 외벽을 세웠다. 23일 주주총회를 앞둔 KT는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정책수석과 통계청장을 지낸 김대유 원익투자파트너스 부회장과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출신 이강철씨를 사외이사로 점찍었다. 코오롱글로벌도 참여정부 초대 정무수석 출신인 유인태 전 의원을 사외이사 겸 감사로 선임한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기업이 선임하는 대부분의 사외이사들은 회사의 상황에 맞춰 세우는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다”며 “사외이사들이 소액주주나 일반주주의 이익은 대변할 수 없는 구조로 돼 있다”고 말했다.

외풍의 방패막이 혹은 현정권의 교류창구로 전락한 사외이사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현 정부와 관련이 없더라도 사외이사 대부분은 ‘권력기관’과 맞닿아 있다. 장ㆍ차관 등 고위관료는 물론 법원과 검찰, 공정위ㆍ금감원 등 기업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에 있던 인사들은 대기업 사외이사 단골손님이다. 경실련 관계자는 “법원과 검찰, 관료 출신 사외이사들은 총수의 로비스트나 방패막이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과거에 총수를 잘 봐줬던 인사를 보상 차원에서 선임하기도 하는데, 일종의 뇌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이 처한 위기에 따라 출신 달라져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선임하는 사외이사의 ‘출신’도 달라진다. 각종 송사에 얽혀 그룹 총수인 신동빈 회장이 구속된 롯데그룹은 권력기관 가운데서도 법조계 출신 사외이사 선임에 공을 들이고 있다. 롯데푸드는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출신인 송찬엽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를 신임 사외이사로 내정했다. 기존에 선임한 법조계 사외이사들 역시 그대로 품고 간다. 롯데케미칼은 박용석 전 대검찰청 차장을 사외이사로 재선임한다. 박 이사는 현재 법무법인 광장의 대표변호사로, 광장은 롯데그룹 계열사에 법률대리와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박 이사가 재직 중인 법무법인이 롯데그룹 계열사와 거래를 하고 있어 사외이사로서 독립성을 갖기 어렵다며 재선임에 반대의견을 냈다. 연구소는 박 이사가 지난 2016년까지 대표이사였던 허수영 사장과 고교 동문인 사실도 지적했다. 롯데쇼핑은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인 이재원 전 법제처장을 사외이사로 재선임하고, 롯데정밀화학도 법원장 출신인 변동걸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을 상정했다. 변동걸 변호사는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으로 지난 2009년 롯데정밀화학의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후 지금까지 사외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번에 재선임되면 11년을 사외이사로 재직하게 된다. 안진걸 참여연대 시민위원장은 “사외이사를 10년 이상 재직한다면 사실상 사내이사가 됐다고 볼 수 있다”며 “기업 내부인이 돼서 사외이사가 해야 할 효과적인 감시ㆍ견제업무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처럼 기업 입맛에 따라 ‘맞춤형’ 사외이사를 선임하다 보니 사외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도 감시와 견제라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어렵다. 감사위원 가운데 선임되는 회계전문 감사위원 역시 전문성과 독립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업들은 자사 출신 사외이사를 회계전문 감사위원으로 내세우고 있다.

KCC그룹 KCC의 회계전문 감사위원인 정종순 위원은 KCC 부회장 출신으로 2007년부터 KCC의 감사를 맡고 있다. LS그룹 LS의 회계전문 감사위원 신용삼 위원도 계열분리 전 같은 그룹에 속했던 LG전자, LG유플러스 등에서 오랫동안 임원으로 재직했다. 하이트진로그룹 하이트진로의 감사위원장인 김영기 사외이사 역시 하이트진로 계열사 임원과 대표이사 출신으로 지난 2006년 처음 하이트맥주 사외이사로 선임된 후 지금까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김광윤 한국감사인연합회 상임공동대표는 “감사위원이 임직원 출신으로 채워진 구조에서는 감사업무의 독립성을 지킬 수 없고 회사의 거수기 역할만 하게 된다”며 “감사위원은 별도의 과정을 통해서 분리 선출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사 출신이거나 지배주주와 친분

자사 임직원 출신이 아니더라도 학연 등 그룹의 지배주주와 친분관계로 얽힌 감사위원들도 있다. 두산그룹의 두산이 선임한 김창환 감사위원은 그룹의 지배주주 박용만씨의 고교 동문이고, LS네트웍스가 선임한 오호수 감사위원 역시 지배주주인 구자엽 LS전선 회장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다. 이럴 경우 감사위원으로서 업무 독립성을 보장 받기 어렵다.

감사위원을 공개하더라도 누가 회계전문 감사위원인지 여부를 밝히지 않는 기업도 부지기수다. 중상위권 규모의 기업집단에 속하는 신세계, 금호아시아나 그룹 등은 다수 계열사에 회계전문가 지정 의무가 있지만 한 명도 공시하지 않았다. 대규모 기업집단인 삼성과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회계전문가 지정 의무 계열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회사에서 공시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회계전문 감사위원이 누구인지 공개하지 않아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 감사위원을 선임하는 주주총회 안건을 공시할 때 해당 감사위원이 회계전문가인지를 공시하도록 강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이 ‘선심’을 베풀어 감사위원에 대한 자세한 경력을 공개하지 않는 이상 주주들은 회계전문성을 갖춘 감사위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셈이다.

한진중공업그룹의 한진중공업 감사위원은 한진중공업 임원 출신 최성문 사외이사와 만해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박기동 사외이사, 부산일보 사장을 역임한 김종열 사외이사가 맡고 있다. 변호사와 언론인 출신인 두 감사위원을 제외하면 과거 한진중공업의 재무본부장 경력이 있는 최 위원이 회계전문 감사위원일 가능성이 높다. 주주들은 최 위원이 과거 회사의 회계ㆍ재무를 담당한 ‘전문가’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영풍그룹 영풍의 부사장을 역임한 최문선 감사위원 역시 회사의 회계전문 감사위원이다. 하지만 최 위원의 공시된 경력에는 영풍의 임원 경력만 나와 있을 뿐 회계ㆍ재무전문성과 관련된 경력 정보가 없다. 법령에서 정한 회계전문가의 자격요건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수정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기업들이 감사위원 가운데 회계전문가를 선임은 하고 있지만 실제 회계전문가로 볼 수 있는지 불분명하고 누가 회계전문가인지가 명확하게 공시되지 않고 있다”며 “감사위원회 전체에 전문성이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업무 자체가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거수기나 방패 역할에 그치는 이사회와 허울뿐인 감사위원들은 총수 중심의 지배구조가 낳은 결과물이다. 그룹의 총수나 경영인이 이사회 구성 권한을 손에 쥔 구조에서는 이사회가 회계감사는 물론 회사 경영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기 어렵다. 2017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이사회 회사 경영 감독의 효과성과 회계감사의 적절성 부문에서 최하위인 63위를 기록했다.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현재의 병폐를 막기 위해서는 재벌의 소유지배구조를 단순화시키는 개혁을 통해 사익편취 요인을 줄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며 “재벌들이 선의를 갖고 자발적으로 하길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