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총기규제론, 왜 늘 ‘불발’로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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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화 가능성은 미지수…거기로 나선 학생들

버니 샌더스, 크리스틴 질리브랜드 등 민주당의 차기 대권후보를 노리는 상원의원들도 공격용 무기 판매 금지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상·하원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은 규제에 비판적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 연방법원 앞에서 17일(현지시간) 학생들이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입법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 연방법원 앞에서 17일(현지시간) 학생들이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입법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미국에서 총기규제 문제가 다시 핫이슈로 등장했다. 플로리다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이 직접 규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결과다. 총기규제 여론이 높아지면서 이번에는 다를 것이란 기대감도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총기규제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정부안은 총기난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며 이마저도 공화당의 반대로 법제화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

지난 2월 14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의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에서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니콜러스 크루즈(19)가 AR-15 반자동소총으로 무차별 난사를 가해 17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올해 들어서만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발생한 네 번째 총기난사사건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관공서에 조기를 게양하도록 지시하는 등 이전 참사 때와 다를 바 없는 대응을 했다. 하지만 여론은 이전과 달랐다. 희생차 추모에만 그치지 않고 총기규제론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여론을 들끓게 만든 주인공은 더글러스고 학생들이었다. 더글러스고 총기난사 생존 학생인 엠마 곤잘레스는 참극 이후 “총기 대신 아이들을 보호하라”고 울먹이며 연설을 해 미국 전역에 총기규제론을 불붙였다.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의 10대들도 백악관과 의회를 찾아가 ‘총기가 아닌 아이들을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총기규제에 대한 호의적 여론도 증가하고 있다. 곤살레스의 트위터 팔로어는 95만명으로 미국총기협회(NRA) 대변인 트위터의 팔로어를 넘어섰다. CNN이 지난 2월 26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더 강한 총기규제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1993년 이후 25년 만에 가장 높은 찬성률이라고 CNN은 설명했다.

CBS의 최장수 앵커였던 댄 래더는 페이스북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행동하라는 분명한 호소이고 그들의 순수함에는 열정과 용기가 있다”면서 “그들이 으르렁거릴 때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상유지는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도 지난 2월 26일 주지사 부인들과의 오찬에서 총기규제를 외치는 학생들에 대해 “아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고 고무됐다”면서 “그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총기구매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높이겠다고 선언했고, 스포츠용품 유통업체 딕스는 공격용 총기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NRA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도 여론에 밀려 3대 총기규제 강화대책을 내놨다. 총기 구매자 신원조회를 강화하고, AR-15 같은 반자동소총의 구매 가능연령을 현행 18세에서 21세로 올리고, 반자동소총을 대량 살상이 가능한 자동소총으로 개조하는 도구인 ‘범프 스탁’ 판매를 중단하는 방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22일 백악관에서 ‘학교안전 간담회’를 열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면서 규제 강화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총기규제론자들이 주장하는 공격용 무기 판매 금지 같은 근본적인 대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신원조회 강화는 사회보장국 같은 연방기관이 범죄 및 정신병 이력 관련 정보를 연방수사국(FBI)의 범죄경력조회시스템(닉스)에 제대로 입력하도록 강제하자는 기초적인 규제안이다. 미국인들의 97%가 동의하고, NRA도 찬성하는 안이다. 하지만 총기사고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당장 전과나 정신병력이 없는 더글러스고 총기사건의 범인 크루즈의 반자동 소총 구입을 막을 수도 없다. 범프스탁은 지난해 10월 발생한 미국 역대 최악의 총기 참사인 라스베이거스 참사에서 범인이 이 부품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금지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미국 올랜도의 한 총기판매점에 ‘AR-15’ 반자동소총이 전시돼 있다./신화연합뉴스

미국 올랜도의 한 총기판매점에 ‘AR-15’ 반자동소총이 전시돼 있다./신화연합뉴스

NRA의 권장안인 교사 무장도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총기사건 대책 중 하나다. 트럼프 대통령은 “교사의 20%가 총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안으로 걸어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며 “총을 소지하는 교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자는 게 내 제안”이라고 밝혔다. 총을 더 많이 보급해서 총기사건을 막자는 안이다. 하지만 교원단체인 전미교육협회(NEA)는 “교사를 무장시켜 학교를 군사 요새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물밑작업을 위해 NRA 지도자는 물론 폴 라이언 하원의장,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각각 만났다. 지난 2월 28일에는 초당파 의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여론을 들었다.

법제화 가능성은 미지수

문제는 총기규제 법안을 통과시켜야 할 의회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총기규제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신원조회 강화와 관련해 현재의 법안 내용으로는 미흡하다며 총기 쇼나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것을 포함한 모든 총기 거래로 신원조회 대상을 확장하자는 입장이다. 데이비드 시실리니 민주당 하원의원 등은 AR-15 반자동소총 같은 공격용 무기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버니 샌더스, 크리스틴 질리브랜드 등 민주당의 차기 대권 후보를 노리는 상원의원들도 공격용 무기 판매 금지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상·하원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은 규제에 비판적이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모두가 동의하는 법안에 대한 진전을 이뤄야 한다”면서 닉스 강화법안 추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지난 2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법을 준수하는 시민에게 총기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공화당 강경보수의원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도 규제안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NRA의 막강한 로비력은 의회의 총기규제를 어렵게 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 자료에 따르면 NRA로부터 한 번이라도 선거자금을 후원 받은 적이 있는 연방의원은 307명으로, 전체 의원 수 535명의 절반을 넘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문화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최근 ‘왜 NRA는 늘 승리하는가’라는 분석기사에서 “돈 때문이 아니라 NRA가 추종자들에게 총기 소유는 생활의 방식이고, 자유와 안전을 위한 핵심이며, 지켜져야 하는 권리라고 확신하도록 일종의 운동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보스턴글로브>는 더글러스고 총기사건 이틀 후 1면에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당장 총기 규제론이 제기되겠지만 결국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비극은 반복될 것이란 비관적 예측이다. “부끄러운 줄 알라”는 10대 학생들의 비판에 정치권이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볼 일이다. 총기규제 여론과 여야 의원들의 대응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영환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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