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상압력, 속타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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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나쁜 무역협정 고칠 것”… 보호무역주의 공세 펴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선포한 보호무역주의가 ‘말폭탄’에 그치지 않고 각국을 상대로 한 수입규제조치로 이행되고 있다. 오는 7일부터 외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가 발효되면서 해당 품목에는 고율의 관세가 부과된다. 미국의 세이프가드는 2002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철강제품에 대해 발동한 이래 16년 만에 실시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 저하로 이어져 최대 시장인 미국 내 판매 부진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는 국내산업이 직격탄을 맞게 되자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통해 구제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세이프가드를 발동하려면 ‘급격한 수입 증가’와 ‘심각한 산업 피해’ 그리고 ‘둘 사이의 인과관계’가 입증돼야 하는데, 미국의 이번 조치는 나열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1월 31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서도 미국의 세이프가드가 핵심 의제로 다뤄졌지만 양국 간 입장 차만 확인하고 종료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30일(현지시간) 취임 1주년을 맞아 가진 첫 국정연설에서 “미국은 우리의 번영을 희생시키고 우리의 기업과 일자리, 국부를 해외로 내몬,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불공정한 무역협상의 한 페이지를 넘기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나쁜 무역협정을 고치고 새로운 협정들을 협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면서 “우리 무역규정의 강력한 이행을 통해 미국의 노동자들과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미 FTA 개정 협상 중인 한국을 향해 ‘미국 우선주의’ 원칙을 재차 확인해주면서 대(對)한 무역수지 적자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지난 1월 31일 서울 롯데호텔 입구에서 한·미 FTA 개정협상 중단을 주장하고 있다. / 이상훈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지난 1월 31일 서울 롯데호텔 입구에서 한·미 FTA 개정협상 중단을 주장하고 있다. / 이상훈 기자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 세이프가드 발효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에 적용된 전 세계 수입규제 191건 가운데 미국이 취한 규제조치가 31건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은 한국을 대상으로 신규 규제를 8건 개시하는 등 중국과 함께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다. 그간 주로 철강·금속분야에 집중됐던 미국의 수입규제조치는 최근 들어 화학·섬유·기계 등 다방면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산 세탁기·태양광 제품을 상대로 시작된 미국의 세이프가드가 반도체 등 다른 분야로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흐름 때문이다.

미국 기업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호 속에 한국 기업의 불공정무역을 거론하며 자국 정부에 잇달아 제소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반덤핑·상계관세 부과조치는 주로 민간기업 제소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과정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을 상대로 불리한 판정을 계속해서 내리고 있으며, 특히 미국법 상에 규정된 ‘불리한 이용 가능한 자료(AFA)’나 ‘특별시장상황(PMS)’ 등을 판정에 반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국 반덤핑·상계관세 규정에서 AFA란 수출기업이 미국의 정보제공 요구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경우 제소 기업이 제공한 불리한 정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PMS는 조사당국이 수출국가의 시장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판단을 근거로 해당 국가의 기업이 제출한 제조원가를 인정하지 않고 조사당국 재량으로 가격을 산정할 수 있는 규정이다. 한·미 FTA 2차 협상에서 한국 대표단은 AFA나 PMS의 자의적 적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지만 미국 측 동의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미국의 세탁기 세이프가드로 직격탄을 맞은 LG전자는 미국 테네시주에 짓고 있는 세탁기 공장 완공 시기를 앞당기기로 했다. LG전자는 지난달 25일 열린 2017년도 연간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테네시 공장의 가동시기에 대해 “당초 2019년 초에 가동하는 것이었는데 공기를 앞당겨 올해 3분기 말 내지 4분기 초에 가동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보다 앞서 삼성전자는 세이프가드 조치가 예상되자 올해 초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공장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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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현지투자 강요에 전전긍긍

태양광업계는 대미 수출액이 최대 30%까지 축소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2016년 기준 한국산 태양광 제품의 대미 수출규모는 13억200만 달러로 2014년(1억4100만 달러)·2015년(3억9400만 달러)에 비해 급성장했다. 한화큐셀과 LG전자, 현대중공업그린에너지 등에서 미국에 태양광 셀과 모듈을 수출하는 한국은 미국 시장의 14.9%를 차지해 말레이시아(28.2%), 중국(17.4%)에 이어 세 번째다. 그러나 주요 수출창구인 미국 수출길이 막히면서 생산물량을 소비할 곳이 마땅치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의 수입규제조치에 대해 다른 나라와의 공조방안을 모색 중이다.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달 26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비공식 통상장관회의에서 캐나다 정부 당국자와 만나 미국의 세이프가드를 WTO에 제소할 때 함께 대응하기로 했다. 이미 캐나다는 미국의 반덤핑·상계관세 부과와 관련된 6개 관행에 대해 WTO에 제소절차를 진행 중이다.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7차 한·유럽연합(EU) 무역위원회’에서도 미국의 태양광 제품 세이프가드 등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함께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WTO 제소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단순히 제소만으로 ‘슈퍼 파워’인 미국을 위협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현재 미국의 반대로 WTO 상소기구 신규위원 선임절차가 지연돼 위원 7명 중 3명이 공석인 상태다. 승소한다고 해도 미국 측이 판정을 이행하지 않고 버티면 WTO 승인을 받아 무역보복을 가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대안도 없다.

이 때문에 미국 국제무역법원(CIT) 제소를 별도로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법부 역할이 중요한 미국 헌법구조상 대통령이 사법부 판정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난 1월 10일 현대제철에 대한 반덤핑조치 재계산 판정 등 한국 기업의 승소 사례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미국 세이프가드 발동과 대응방안’ 긴급좌담회에서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WTO 분쟁 해결절차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면서 “우리 기업들이 미국 국제무역법원에도 제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구교형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wassup0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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