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사상 최대 공동소송 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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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애플스토어 개장날 ‘배터리 게이트’에 항의하는 1인 피켓시위

지난 1월 27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연 애플의 애플스토어 개장날. 애플코리아가 딱히 최초 고객에게 상품이나 혜택을 걸지 않았음에도 개장 전부터 300명가량의 인파가 줄을 섰다. “역사적인 한국의 1호 애플스토어에 빨리 가보고 싶어 왔다”는 ‘애플 마니아’들의 기대감 속에 조용히 피켓을 들고 1인시위에 나선 한 시민이 눈길을 끌었다.

‘뉴턴이 사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당연한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알아냈듯이 휴대폰도 당연히 오랫동안 처음 산 그날과도 같은 물건이 좋습니다.’ 시위자가 든 피켓에 적힌 문구는 단순하지만 강렬했다. 애플이 소프트웨어를 통해 구형 아이폰들의 성능을 제한한 것으로 드러난 일명 ‘애플 배터리 게이트’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애플을 향한 소비자들의 현재 ‘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성능 저하 파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니아를 자칭하는 팬층이 있는 반면, 애플의 잔칫날에도 항의를 해야 할 만큼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는 소비자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배신감과 분노는 애플을 상대로 한 국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동소송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의 배터리 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소비자들의 집단피해를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에서 수년째 논의만 되고 있는 집단소송제를 이참에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1월 27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국내 첫 애플스토어 개장을 기다리는 소비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 연합뉴스

1월 27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국내 첫 애플스토어 개장을 기다리는 소비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 연합뉴스

“고의성 없다” 해명에도 논란 지속

애플이 2017년 1월 24일 공개한 아이폰의 운영체제인 ‘iOS 10.2.1’ 버전을 업데이트하면서 구형 아이폰의 성능을 제한한 것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다. 온라인을 통해 논란이 확산되자 애플은 성명을 내고 “배터리 효율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며 성능제한 사실을 시인했다. 소비자들을 위한 조치였지 성능 저하 자체를 목표로 하고 고의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애플이 이 같은 사실을 소비자들한테 알리지 않고 업데이트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애플이 사실을 인정하자 논란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애플의 이 같은 조치로 영향을 받는 아이폰 모델은 ‘아이폰5’부터 ‘아이폰7 플러스’까지 10종에 달한다. 애플은 매년 글로벌 시장에서 7000만~8000만대에 달하는 단말기를 파는 세계 2위 단말기 제조사다. 성능제한 영향을 받은 단말기 숫자를 세자면 수억 대가 넘는다.

애플은 뒤늦게 “다음번 업데이트 때 성능 저하 여부를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지만 해당 단말기를 보유 중인 전세계 소비자들은 하나같이 애플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중이다. 당장 단말기의 성능을 제한해 아이폰 이용과정에서 여러 피해를 봤다는 주장부터, 단말기 성능 저하 탓에 새 아이폰을 구매해 금전적 손해를 봤다는 주장까지 피해를 호소하는 소비자들이 잇따랐다. 이미 미국에서는 소비자들이 1000조원대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러시아·이스라엘·한국 등지에서 유사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소비자들이 분노한 건 단지 성능 저하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때문만은 아니다. 대다수의 단말기 제조사들이 단말기 출시 후 2~3년을 전후해 각종 소프트웨어 지원 등을 중단하는 반면, 애플은 꾸준한 iOS 업데이트로 구형 단말기도 새로운 성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왔고, 이는 소비자들이 아이폰을 구매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7년째 아이폰을 사용해온 직장인 ㄱ씨는 “그렇게 높게 평가 받던 iOS가 실제로는 단말기의 성능을 제한해 소비자들의 뒤통수를 쳤다는 생각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애플이 성능제한을 한 배경을 놓고 여러 관측이 나오지만 전자업계에서는 “애플이 실제 새 단말기 구매 유도를 위해 제한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스마트폰 배터리의 경우 통상 ‘500회 충전’을 배터리 성능 저하의 기준점으로 본다. 매일 1회 충전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16개월 전후로 배터리 성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셈이다. 아이폰의 경우 iOS 업데이트 등으로 타 단말기에 비해 사용기간이 긴 만큼 배터리 성능 저하 문제가 발생하는 건 현실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해석이다. 한 전자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구형 단말기에도 새 iOS를 적용해 전보다 개선된 기능을 제공하는 정책을 펼쳐 왔다”며 “이 경우 추가된 새 기능에 소요되는 전력수요가 문제인데, 기존 배터리의 성능이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기기가 갑자기 꺼지거나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성능제한이 필요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1월 27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애플스토어 앞에서 한 소비자가 '배터리 게이트' 관련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월 27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애플스토어 앞에서 한 소비자가 '배터리 게이트' 관련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내 최대 규모 ‘공동소송’ 전망

그럼에도 성능제한으로 많은 소비자들이 피해를 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애플코리아는 국내 아이폰 판매대수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성능제한 적용 모델이 많음을 감안할 때 국내에서만 수백만 대가 피해를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음에도 정부는 섣불리 사태 개입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아이폰은 방송통신기기에 해당하고 기본적으로 제조물에 해당하기 때문에 유관부처를 따지자면 수도 없이 많다. 산업통상자원부부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등이 있고, 소비자 피해문제로 넘어가면 공정거래위원회, 한국소비자원 등 소비자 피해구제기관들도 있다.

하지만 사건에서 애플의 ‘고의성’이 잘 확인되지 않는 데다 부처별로 업무영역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전담부처’라고 할 만한 곳이 없는 상태다. 방통위의 경우 논란이 커지자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조사권한이 있는지 검토해봤지만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방통위는 기본적으로 방송통신사업자를 대상으로 조사하고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며 “애플의 경우 방송통신사업자로 보기엔 무리가 따르고, 문제 역시 소프트웨어인 iOS로 생긴 문제라 방통위의 영역이 아니라고 봤다”고 밝혔다.

성능 저하 문제의 경우 아이폰 자체의 문제라서 이동통신사와의 계약관계 문제로 보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과거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7’ 사태처럼 과기부가 나서기도 애매하다. 성능 저하가 제품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도 아니므로 산자부가 관할하는 것도 불분명하다. 공정위의 경우 사태를 지켜보고는 있지만 당장 조사에 나설 분위기는 아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국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질의를 받자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아직까지 주로 민사적인 차원에서 손해배상이 제기된 것으로 알고 있고, 행정제재에 나서는 것은 아직까지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국소비자원에도 정식 접수된 민원은 없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여러 차례 성능 저하건에 대한 문의는 있었지만 실제로 담당팀에 접수된 피해구제 민원은 없다”며 “아무래도 소비자원의 중재나 조정에는 법적 한계가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시민단체인 소비자주권시민회의의 경우 1월 18일 서울중앙지검에 미국 애플 본사의 팀 쿡 대표와 애플코리아 다니엘 디시코 대표를 업무방해, 사기,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사건을 서울강남경찰서로 내려보냈고, 현재 강남서 경제범죄수사과에서 사안을 수사 중이라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이렇다 보니 피해당사자인 소비자들도 정부 민원보다는 민사소송을 통한 피해보상을 선택하고 있다. 이미 소비자주권시민회의가 122명의 소비자를 원고로 해 애플 상대로 1인당 22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법무법인 휘명도 1월 26일 애플과 애플코리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403명의 소비자가 참여했고, 1인당 청구금액은 30만원이다.

지난달 19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와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의원이 ‘소비자집단소송법’ 제정안 발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달 19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와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의원이 ‘소비자집단소송법’ 제정안 발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법무법인 한누리도 2월 중 공동소송 제기를 목표로 청구인단을 모집 중이다. 한누리가 공동소송 계획을 밝혔을 당시 참여의사를 밝힌 소비자는 40만명에 달했다. 공동소송 접수 이틀 만에 접수된 실제 소송 참여 소비자는 현재 2만명 수준이다. 한누리 측은 접수마감까지 10만명가량의 소비자가 소송에 참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을 대상으로 한 단일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는 최대 규모가 된다. 2014년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건 당시 전체 19만명, 단일 소송으로는 5만5000명가량이 최대 규모였다. 한누리가 산정한 1인당 손해배상 청구금액은 20만원이다.

소송을 담당하는 한누리 조계창 변호사는 “청구금액의 경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증액할 여지가 남아있다”며 “사태에 대한 애플의 대응추이, 미국 내 동일 소송의 판결 결과 등을 지켜보면서 추가로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엔 ‘집단소송제’ 왜 없나

일부 언론 등에서는 애플의 성능 저하 관련 소송을 ‘집단소송’으로 표현하지만 엄밀히 말해 현재 대한민국에는 2004년 도입된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을 제외하고는 집단소송제가 아예 없다. 집단소송제는 다수의 소비자에게 발생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법으로, 대표성을 가진 소수의 재판 결과를 동일한 피해를 본 다수에게도 적용하는 제도다. 미국에서 애플에 대한 1000조원대 소송 제기가 가능했던 이유도 미국은 소비자 피해와 관련된 집단소송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집단소송제를 인정하지 않다보니 소비자가 피해를 입증하고 구제 받기까지는 현실적으로 따르는 어려움이 많다. 이번 사례처럼 공동소송을 택할 수는 있지만 공동소송의 경우 청구인인 원고 개인이 일일이 피해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그에 따라 소송규모가 커질수록 비용도 증가하고 재판기간도 길어진다. 공동소송에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공동소송을 준비 중인 법무법인 한누리만 해도 집단소송제가 있는 미국에서 소를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미국인이 아닌 한국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을 미국 법원이 받아줄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 아래 일단은 계획을 보류한 상태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 수년째 논의만 되고 있는 집단소송법을 확대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의원은 1월 31일 다수의 소비자 피해를 구제하는 ‘소비자집단소송법안’을 대표발의한 상태다. 법에서 정하는 일정 기준 이상을 충족하는 대표성을 띤 시민단체 등이 대표소송을 통해 승소할 경우 그 판결의 효력이 모든 피해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법안의 골자다. 소비자 개인이 특정 사안에 대한 소송에서 패소했더라도 다른 피해 소비자들이 동일한 건으로 재차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것이 특징이다.

이학영 의원은 “방대한 규모의 피해가 발생해도 소비자 개인이 이를 입증하기 곤란하고, 거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 역시 어려워 수많은 피해자들이 침묵하고 있다”며 “소비자집단소송법 제정을 통해 소비자가 피해자가 되는 집단사고에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강정화 회장은 “최근 애플의 배터리 사건만 봐도 외국 소비자와 우리가 차별 받는 이유가 법·제도의 미비 때문”이라며 “소비자가 피해를 봐도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을 시급히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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