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와 실비오 게젤-죽을수록 태어나는 순환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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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이 손짓한다/ 오르막이 그랬듯이.’ 시 <내리막>의 첫 소절이다. 광풍인 가상화폐 거래소의 거품에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변하는 돈의 가치 속에서 열심히 하루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단 석 줄인 고은의 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처럼 인생을 함축한다.

이 시는 영화 <패터슨>으로 알려진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1883∼1963)의 작품이다. 윌리엄스는 미국 뉴저지 패터슨에서 활동했다. 순간을 포착해서 영원의 진리를 찾고자 했다. “시는 연설이나 설명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보았던 그는 ‘객관주의 시인’으로 불렸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왼쪽), 실비오 게젤(오른쪽) / 위키백과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왼쪽), 실비오 게젤(오른쪽) / 위키백과

윌리엄스는 삶이 파괴되는 순간에 그 생명력이 다시 살아난다고 읊었다. ‘마른 잡초로 누르스름한/ 넓고 황량한 진흙투성이 들판’에서 ‘잎이 다 떨어진 덩굴들’을 보고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채. 주위엔 온통 차가운’, 그러나 ‘친근한 바람’을 느낀다. 거기서 새날을 직감한다.

전후 미국문학의 중심으로 그가 많은 추종자를 가진 이유는 삶의 역설과 순환이라는 의식에 있었다. 도시노동자와 아이들, 그리고 일상적인 사건을 가지고 신문기사와 편지글의 형식을 활용해 시를 썼다. 급변하는 도시 속 고단한 삶의 편린에서 순환의 생명력을 포착했다.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1862∼1930)은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꼽은 사람이다. 재야의 경제학자로 평가되지만, 경제위기가 터질 때마다 불려나온다. 게젤은 <자연스런 경제질서>를 쓰며, 화폐가 갖는 ‘저장 기능’에 신랄한 칼날을 들이댔다. “모든 것은 다 썩지만 왜 돈은 썩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동물은 음식을 자식에게 가져다주고 자신도 배불리 먹고 나면 그 이상으로 음식을 쌓아두지 않는다. 썩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순환원리 안에서 ‘지금·여기(今次)’의 삶을 산다. 냉장고의 저장기능에 화폐를 비유하지만, 기실 냉장고도 음식을 완전히 보존할 순 없다(다만 썩는 속도를 늦출 뿐). 게젤의 이러한 생각과 사회신용운동(주간경향 1191호)을 삶과 도시의 변화를 관찰하던 윌리엄스는 자신의 시에 담았다. 자발적인 ‘자연스러움’과 ‘순환’이라는 깨달음을 읊었다. 시의 형식에도 이런 생각을 빌려 순간의 변화를 보이는 즉흥시를 시도했다.

게젤은 일정 비율로 돈의 가치를 깎자고 주장했다. 마이너스 이자로 교환기능을 극대화하자는 소리다. 즉 발행된 돈은 점점 늙는다. 시간이 흘러 결국 돈은 ‘죽는다’. 그래서 돈을 쌓아두고 물려줄 수 없다. 써야만 한다. 죽어가는 돈이 실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화폐를 만들어 실험한 도시들이 있었고, 그 도시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졌다.

게젤의 이런 생각은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를 몸소 겪은 덕이다. ‘절망으로 가득하고/ 이룬 것 없는/ 내리막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온다/ 그것은 절망의/ 역전/ 이룰 수 없는 것/ 사랑받지 못한 것/ 기대 속에 놓쳤던 것을 위해-/ 내리막이 뛰따른다/ 끝도 없이 멈출 수도 없이’는 <내리막>의 마무리다. 그렇다, 끝도 없이 뒤따르는 그 내리막에서 바로 깨달음이 온다. 근래 가상화폐 ‘거래소’의 투기광풍을 교훈 삼아 그 장점만을 취해 서울의 지역화폐를 발행하자는 목소리도 정확히 그런 예로 꼽을 수 있겠다. 노원구는 이미 지역화폐를 발행했다고 한다. 물론 그 지역화폐도 자신을 낳은 게젤과 윌리엄스의 ‘죽을수록 태어나는 순환의 역설’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시인과 경제학자>는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합니다.

<김연 (시인·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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