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나를 간첩으로 몰았던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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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사건의 윤정헌씨 고문경찰 재판 보러 한국 찾아

부모님의 땅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싶었던 한 청년은 1984년 10월, 보안사 수사관에게 끌려가 43일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고 간첩이 됐다.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약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지만 그를 맞아주는 곳은 한국 땅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다니던 대학에 복학 문의를 했지만 문교부(현 교육부)와의 눈치싸움만 하며 복학 가능 여부를 차일피일 미뤘다. 이미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는 쫓겨나듯 일본 땅으로 돌아갔다. ‘재일동포 유학생 윤정헌 간첩조작사건’은 윤정헌씨(65)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는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물고문에 엘리베이터 고문까지 갖가지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그를 고문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히 얼굴을 기억하고, 이름까지 알고 있는 보안사(현 기무사) 수사관은 그의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고문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 민중의 소리 제공

/ 민중의 소리 제공

검찰 캐비닛에 잠자던 윤씨의 고소장

그에게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 판사 중 누구도 당시 선고를 두고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1심 배석판사였던 강일원 헌법재판관은 2년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판사 임관한 지 한 달여 만에 난 사건이라 주심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를 기소한 공안부 검사 최연희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6년 신문사 여기자 성추행 사건으로 당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선고유예를 받고 현재 동부그룹 건설 디벨로퍼부문·농업 바이오부문 회장을 맡고 있다.

윤씨는 “불법구금된 이후 3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고려대 의대 3학년이었던, 어쩌면 평범한 대한민국의 의사로 살았을 수도 있는 윤씨의 한국에서의 인생은 망가졌지만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불법구금당할 당시의 윤정헌씨 모습. / 민중의 소리 제공

불법구금당할 당시의 윤정헌씨 모습. / 민중의 소리 제공

윤씨는 2011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뒤 자신을 고문한 보안사 수사관 고모씨(81)를 2012년 검찰에 모해위증죄로 고소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직권조사에 따라 재심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고씨는 재판부에 고문을 한 사실이 없다고 허위진술을 했다. 검찰은 2013년 6월 윤씨를 참고인으로 불러 고씨에 대한 피고소인 조사를 했다. 그 뒤로 4년이 흐를 때까지 검찰은 고씨를 기소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고씨에 대한 고소장은 캐비닛에 잠들어 있었다. 그 사이 정권이 바뀌었다. 신임 문무일 검찰총장은 과거사 사건을 재검토해 검찰이 직접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위증죄 공소시효를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13일 위증혐의만 인정해 고씨를 재판에 넘겼다.

재판 연기로 목적 못이루고 일본으로

윤씨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을 찾았다. 35살 젊은 나이에 한국을 쫓기듯 떠난 그는 이제 60대가 됐다. 그는 그러나 지난 22일 열릴 예정이었던 고씨의 재판을 보지 못했다. 고씨 측 변호인이 기일변경 신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윤씨는 23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주간경향>은 짧게나마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 재판에는 한국에 오기 힘들겠지만 검찰이 제대로 수사했는지, 재판부가 어떻게 결론을 내리는지 계속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일본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한국말은 유창했다. 대화 도중 그는 한국어를 ‘우리말’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계속 일본에서 사셨습니까.

“한국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출소 후 복학하고 싶어 학교에 문의하니 ‘그건 문교부(현 교육부) 관할이다. 거기로 가라’고 해서 문교부에 문의했더니 ‘그건 대학의 관할’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는 나이도 많고, 가족이 있으니까 일본으로 돌아가 취직해서 살자’고 권유하셨습니다. 석방된 해 88년 12월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차피 한국에서 살아가기는 어려웠습니다. 나는 이미 전과자라서 취직을 하려 해도 할 수 없고, 당장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했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출소 후 무죄 주장을 할 수 없었습니까.

“당시는 노태우 정권이었고, 내가 억울함을 표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회사에 취직해서 내가 우리말(한국어)을 좀 할 줄 아니까 회사에서 나에게 한국영업담당을 맡겼습니다. 한 번은 한국으로 출장을 가게 됐는데 도착하기 직전까지 얼마나 심장이 벌렁거렸는지 모릅니다. 공항에서 붙잡아 갈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공항을 나올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재일동포 한국 유학생이 전두환 정권의 표적이 됐을까요.

“그거야 조작한 본인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알 수 없지요. 다만 제 생각으로는 재일동포 학생이 간첩으로 만들기 아주 쉬운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왔고, 직장인보다는 학생이 간첩 만들기 쉽고, 우리말도 잘 못하는 데다, 재일동포들은 아는 사람이든 친척이든간에 한 명쯤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소속이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거기다 가족들이 다 일본에 있으니 여기서 잡아가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재일동포는 간첩으로 만들기에는 제일 좋은 존재였을 겁니다.”

‘재일동포 간첩 사건’을 보도한 당시 경향신문. / 경향DB

‘재일동포 간첩 사건’을 보도한 당시 경향신문. / 경향DB

-출소 후 심적 고통은 없었습니까.

“출소 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거의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라고 할까요. 그런데 재심재판이 시작된다고 하면서부터 밤에 잠을 자기 힘들고, 고문당했던 일들이 꿈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재판을 받으려면 잊고 지냈던 옛날의 고문당했던 기억을 자세히 생각해야 했고, 그 일들을 말로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정신적 고통이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 보면 정신이 아예 나가버리거나, 아직도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당시 그 일들을 겪었던 사람 중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 기쁘셨나요.

“무죄를 받은 사실은 기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를 고문하고 간첩으로 몰았던 사람들로부터 사과를 받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출소 후 30년이 지났습니다. 사과를 한 사람이 있습니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나에게 사과한 사람은 없어요. 아무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하다’라고조차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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