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빌더 유병탁씨 “장난감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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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와 같은 어른들이 레고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순했다. 단순한 블록조각이지만 조합에 따라 복잡한 형상을 만들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작동이 가능한 기계로까지 태어날 수 있는 것이 레고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장난감이 아이들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끝났다. 장난감을 갖고 노는 어른들이 늘었고, 그들을 일컬어 ‘키덜트’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조립식 장난감의 대표격인 레고에 매료된 어른들의 동호회 ‘브릭마스터’를 이끄는 유병탁씨도 키덜트이다. 유씨에게 레고는 영원한 젊음을 약속하는 마법의 주문이 됐다.

유씨가 처음 레고를 조립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0여년 전. 유씨는 “처음에는 아이들 장난감을 사주기 위해 레고에 관심을 가졌다. 그전에는 취미나 잡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레고를 통해 나 스스로를 위해 즐길 수 있는 취미를 발견해서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그가 속한 레고 동호회 브릭마스터에는 700여명의 동호회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어른들이다.

대형 작품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레고의 장점이다.

대형 작품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레고의 장점이다.

옛 서울역사에 7m 대작 전시 기획

유씨와 같은 어른들이 레고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순했다. “레고는 집중력을 요구한다. 한 번 시작하면 빠져들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잊어버린다. 무엇인가에 전적으로 몰두할 수 있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단순한 블록조각이지만 조합에 따라 복잡한 형상을 만들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작동이 가능한 기계로까지 태어날 수 있는 것이 레고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유씨의 직업은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프로듀서이다. 그 직업의 특성이 레고 작품을 만드는 데에도 적용돼 장면을 연출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점에서 큰 장점이 됐다고 한다. 그는 “레고를 만드는 사람들은 일정 부분 과시욕이 있다. 남들에게 없는 귀한 것을 구해서 소유한다는 자부심도 있다. 자신의 작품을 남에게 보이고 함께 하자는 것이 큰 원동력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시공간이 필요한데 그런 기회가 여의치 않다”고 말한다. 유씨의 동호회에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왔다. 옛 서울역사에 문화공간이 들어서면서 레고 전시 의뢰를 받은 것이다. 당시 유씨가 기획한 레고 작품은 7m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역사적 상황이나 영화 속의 장면을 재현하는 디오라마 작품을 레고로 기획한 것이다.

유씨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개인이 만든 작은 작품보다 이야기가 있는 대형 작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시공간에 맞춰서 서울역과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들을 레고로 표현했다. 선로에 기차가 달리고 사람들의 생활이 담긴 이야기를 보여줬는데 평이 좋았다”고 말한다. 처음 서브컬처의 일부로 전시됐던 레고 작품들이 단박에 주연이 됐다. 유씨의 레고 동호회는 이때부터 다양한 전시 기회를 얻게 된다.

레고를 통해 취미를 즐기는 키덜트 유병탁씨.

레고를 통해 취미를 즐기는 키덜트 유병탁씨.

유씨가 레고로 만든 대표적인 창작품은 숭례문. 개화기 전차가 지나다니는 남대문의 모습을 재현한 대작이다. “레고 인형과 사람의 비율은 1대 35 정도이다. 숭례문도 그에 맞춰서 제작했다. 상투에 갓을 씌우고 개화기 복식을 재현하기 위해 플라스틱을 레이저로 깎아 당시의 모습대로 만들었다. 단순히 숭례문뿐 아니라 주변의 역사적인 정경도 제대로 재현했다”고 밝힌다. 박물관의 의뢰로 제작한 이 작품을 통해 유씨는 단순한 레고 애호가와 기획자에서 창작자로 거듭나게 된다. 처음 유씨는 작품을 의뢰 받아 기획과 장면 연출만을 맡으려 했으나 적절한 제작자를 찾지 못해 직접 제작에 나섰다고 한다.

유씨의 숭례문 작품은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치부되던 레고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레고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전기가 됐다. 당시까지 레고 작품에 대해 부정적이던 박물관에서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하는 디오라마 작품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서울 성곽박물관에서 동대문인 흥인지문을 통해 고종 임금이 동구릉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재현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유씨는 “일단 작품 의뢰를 받으면 자료를 섭렵한다. 사진을 보면서 표현방식을 결정하고 담을 이야기를 구상한다. 숭례문은 지적도와 일제가 기록한 주변 건물들까지 재현했다. 흥인문은 주변의 낙산을 등고선대로 고스란히 표현했다. 학예사들도 그런 세세한 부분의 재현에 감탄했다”고 설명했다. 관람객들에게도 레고 작품은 최고 인기 전시물이 됐다.

취미를 위한 작업공간을 마련했다.

취미를 위한 작업공간을 마련했다.

일산에 작업실 ‘브릭팜’ 열어

유씨는 레고는 자유로운 조립이 가능하므로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면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없다는 점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강조한다. 게다가 레고를 통해 보여주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이해를 높이는 데 유용했다. 딱딱한 역사적 사실도 즐겁고 친근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장면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레고로 만든 대형 제작물은 주요 행사의 단골 전시품이 됐다. 기업체에서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레고 작품을 의뢰했다.

유씨는 레고가 자유로운 조립으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단점도 있다고 설명한다. “레고 블록은 대부분 직선의 형태이기 때문에 일정한 제약이 있다. 한옥의 곡선 처마를 재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고려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 비율과 크기를 미리 정해 만들어달라고 하면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상상이 가능한 내용은 대부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레고의 매력이라고 강조한다.

기존의 레고 제품 중에 희귀품과 한정판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격이 올라가는 현상도 있다. 때문에 레고로 재테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생겼다. “국내 가격이 외국보다 높고 한정판은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일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대체품들이 나오면서 레고로 재테크하는 일은 지나갔다고 본다. 무엇보다 즐겁게 가지고 놀아야 하는데 가격 오를 것을 대비해 포장도 못 뜯는다면 슬픈 일이 아니겠나”라는 것이 유씨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도 한정판이 나오면 소장을 목적으로 사들이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를 레고 창작자로 이끈 숭례문 모형 작품. 개화기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를 레고 창작자로 이끈 숭례문 모형 작품. 개화기의 모습을 재현했다.

유씨에게 처음으로 여가생활의 즐거움을 알려줬던 레고는 이런 저런 의뢰를 받으면서 돈이 되는 취미가 됐다. 유씨는 “대형 작품들은 규모와 제작에 걸리는 시간, 재료비를 포함하면 수천만 원의 경비가 소요되는 경우도 있다. 작품마다 다르지만 취미를 계속할 자금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유씨는 동호인들이 모여서 레고를 만들 공간을 마련했다. 1년 전부터 경기도 일산 장항동에 문을 연 그의 작업실은 “우주적인 생각을 키우는 토양이 되겠다”는 취지에서 ‘브릭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씨는 레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를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유씨는 작업실에 대해 “공간을 만들었지만 퇴근 후에나 들르기 때문에 활용도가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레고를 즐기는 이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집안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많은데, 작품을 보관하거나 자유롭게 조립할 공간이 필요한 동호인들에게 문이 열려 있고, 보관함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브릭팜에서는 수요일 저녁에는 함께 모여 조립하는 수요조립회도 갖는다.

최근 그의 작업실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지인의 자녀들이 모여 레고를 만든다. 유씨는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정리하는 법이다. 집에서 레고를 갖고 놀고 싶으면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가르친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제약이 없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조립한다.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다”고 말한다. 유씨의 지루한 설명을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취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도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설명한다.

베컴에게 선물했던 축구장 모형 작품.

베컴에게 선물했던 축구장 모형 작품.

베컴에게 축구경기장 작품 선물

부모들이 레고 조립을 통해 무엇인가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는데 그 점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유병탁씨의 지론이다. 놀이는 즐거워야 하고 온전히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우선은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씨에게도 두 명의 자녀가 있다. 레고를 가지고 놀 만한 나이인데도 별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이들은 아빠를 레고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토요일에는 작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그때는 좋아한다. 엄마가 싫어하는 오락을 여기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웃었다.

유씨는 잡념이 많거나 집중력이 필요한 이들에게 레고를 권한다. “유명인 중에 레고를 즐기는 운동선수들이 많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수뿐 아니라 성인에게 적합한 취미라고 생각한다. 레고를 조립하다 보면 복잡한 상념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또 자신만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기쁨도 크다”는 것이다. 그는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잊고 한 발 물러나 쉴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으니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취미라고 강조한다.

유씨는 최근 세계 축구계의 슈퍼스타 베컴에게 작품을 선물했다. 베컴이 한국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축구경기장을 만들어서 전했다. “베컴이 평소 레고를 조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베컴이 뛰었던 5개 구단의 주경기장 모형을 만들어서 건넸다. 그가 굉장히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같은 취미는 국경을 넘어 함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씨는 레고를 조립하면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좀 더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이 있다.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다. 레고는 그 본능을 건강하게 잘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면을 통해서 생활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유씨는 레고를 즐기기 위한 방법으로, 일단 아무 제품이나 사서 만들어보라고 권한다. 조립설명서대로 만든 다음에 해체하고 쌓는 방식을 달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들려줬다. 설명서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식으로 조립하다 보면 같은 제품을 조립해도 사람마다 다른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저렴한 가격의 할인제품을 찾아 시작해 과감히 취미의 세계에 한 발 내디디라고 말한다.

인간은 일만으로 살 수 없고 부와 명예만으로는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사람은 때때로 꿈을 꾸며 엉뚱한 짓을 저질러 제약과 굴레를 넘는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취미는 특별한 쓰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만족을 위한 보상이다. 어른일수록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을 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유씨는 자신의 취미에 대해 “혼자하면 취미. 함께하면 문화”라고 말한다. 저마다 갖고 있는 직책과 권위를 내려놓고 즐거운 취미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만들며 새롭게 자신의 본성을 찾아낸 유씨의 권유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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