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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우리들의 양지

혹한이 덮쳤다. 날씨가 추워지면 유독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장소가 있다. 햇볕이 유난히 따사롭게 쬐는 담벼락 밑이다. 길거리를 호령하던 북풍도 이 담벼락에는 손을 뻗지 못했다. 아침이 되고 아랫목이 서서히 지겨워지면 꼬마들은 슬슬 이 담벼락으로 모여들었다. 담벼락 밑 양지는 따스한 온기를 보듬고 쉬던 곳이었다.

겨울이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두꺼운 점퍼는 입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집에서 짠 털 스웨터와 목도리가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품이었다. 담벼락 밑에서 손을 주머니춤에 끼워 넣고 이야기를 했다. TV가 있는 집이 거의 없어서 대화는 라디오 드라마 또는 아침 신문의 내용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영일만에서 석유가 펑펑 나온다는 뉴스였다. 곧 우리나라도 중동처럼 부자가 될 것이고, 나무 대신 기름을 펑펑 때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난히 따뜻한 곳이라 동네에 있는 개들도 담벼락으로 몰려와 졸음을 청했다. 어떤 때는 개들에게 텃세를 부린다고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하지만 개들은 잠시 자리를 뜨는 듯하다가 이내 꼬마들 틈 사이에 앉았다.

친구들이 여럿 몰려오면 함께 개울에 얼음을 지치러 가거나, 산으로 칡을 캐러 갔다. 그마저도 안 되거나 날씨가 많이 추우면 담벼락의 이야기는 점심 때까지 계속됐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따뜻해진 햇볕 탓에 졸음으로 눈을 껌벅이기도 했다. 그곳은 가장 추운 겨울 속에서도 봄을 꿈꾸던 장소였다.

올해가 시작되면서 혹한이 시작됐는데, 일반인보다 유난히 더욱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있다. 구조조정 대상이 된 노동자들이다. 최저임금 인상을 빌미로 한 구조조정이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는 경비원들을 모두 해고했다.

하지만 이렇게 추운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기도 고양시 마두1동 삼성아파트에서는 주민들이 투표를 해서 경비원 인원 구조조정에 반대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렵지만 함께 이겨나가자는 것이다.

1000원의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최고임금 수준의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재계 기업 관련자들이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자영업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보면 적반하장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자영업자들을 정작 힘들게 하는 것은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라 중소자영업의 상권을 야금야금 빼앗고, 이들에게서 임대료나 로열티를 과도하게 받아가는 부류다.

추울수록 양지가 그리워진다. 어려운 사람들을 음지로 내몰지 말아야 한다. 다 같이 담벼락 밑 양지에서 따스함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누리는 경제적 효과는 더디지만 언젠가는 찾아오게 된다. 봄은 멀지만 언젠가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지금은 모두가 춥다고 한다. 하지만 햇볕은 언제나 풍성하게 내리쬐고, 담벼락 밑의 양지는 충분히 넓다. 그곳에서 이 추위를 거뜬히 넘길 수 있다. 춥다고 끙끙 앓을 게 아니라, 다만 우리들의 마음만 추워진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윤호우 편집장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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