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유전’의 원칙은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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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가는 사람이 밭을 가진다는 헌법 조항 유명무실… 개헌론·존치론 대치

경자유전(耕者有田). 밭 가는 사람이 밭을 가진다는 헌법 121조의 원칙이다. 농지 소유권이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농촌을 떠나는 인구가 늘고 농업인구는 줄어들면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예외조항이 법률에 하나둘 더해졌기 때문이다. 개헌 논의가 확대되면서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아예 헌법의 경자유전 원칙을 지워버리자는 조심스러운 의견까지 나오는 한편, 그에 맞서는 존치론도 힘을 모으고 있다.

농업인구 줄고 다양한 예외조항 신설

“요즘은 제발 우리 땅에 농사 좀 지어달라며 찾아도 지을 사람을 못 구해요. 주변 땅값이 있으니까 덩달아 임대료도 올라서 아예 다들 농사를 포기해버렸다니까.” 경기 수원시에 살면서 고향인 평택에 5000㎡가 안 되는 밭을 가지고 있는 최순성씨(69)는 농지를 빌려줄 사람을 찾지 못한 지가 꽤 됐다고 말했다. 농지의 절반가량은 아직 마을에 남아있는 혼자 사는 할머니가 빌려 소일 삼아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을 빌려 농사를 짓던 마을 어르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론 땅을 놀리고 있다. 틈틈이 최씨가 가서 직접 길러 먹을 채소를 심고 거두기는 하지만 비어 있는 기간이 훨씬 길다. 농지 면적이 넓지 않고 접근하는 데 불편하기 때문에 전업농이나 농업법인도 사거나 빌리려 하지 않고, 개인이 빌리기에는 노력과 비용에 비해 소출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강원 춘천시의 농촌 지역에서 한 농민이 단무지용 무를 수확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강원 춘천시의 농촌 지역에서 한 농민이 단무지용 무를 수확하고 있다. / 연합뉴스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농업인 입장에서도 들이는 품만큼 들어오는 소득이 없는 것은 마땅치 않다. “논이라면 한 마지기(약 660㎡)에 한 가마씩 보내주는 걸로 퉁치는데, 밭에다가 돈 되는 농사 지으려면 비닐하우스라도 깔아야 돈이 남지. 할머니 혼자서 할 수가 없거든.” 최씨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김모 할머니(80)의 말로는 농사 지어 조합에 넘겨봐야 손에 쥐는 돈은 병원비와 약값 대기에도 모자라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주수입원은 오히려 자식들이 보내는 용돈이다. “다른 일을 할 게 없으니 남의 땅 빌려서 농사 짓는 양반도 마을에 있긴 하지. 그래봐야 비룟값 농약값 빼고 소작료(임대료) 내고 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남는 게 없지.” 농지를 가졌건 못 가졌건 모두 수익을 극대화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국내 농지 가운데 임차농가가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는 비율은 2016년 기준 57.6%다. 절반이 넘는 농가에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농지 자체의 값어치가 천차만별인 만큼 임대료 부담도 편차가 크지만 임차농가들의 가계는 대부분 열악한 수준이다. 벼농사를 짓는 농가에서는 회복되지 않는 쌀값을 감내해야 한다. 각종 지원을 받기 위해 농협에 조합원으로 가입하려고 해도 본인이 농사를 짓고 있다는 점을 입증할 임대차계약서가 없는 경우도 많다. 지주들이 세금감면과 직불금 수급 등을 위해 서면으로 계약을 맺지 않고 직접 농사를 짓는 것처럼 등록하곤 하기 때문이다.

공식 지원을 받지 못한 농사는 김 할머니의 표현대로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수준에 그친다. 특히 전체 농가의 41.4%(농가경제 조사)를 차지하고 있는 70세 이상 농가의 소득을 보면 자영농과 임차농가를 막론하고 연간 소득은 2261만원, 그 중 농업소득은 전체 소득의 28.6%인 646만원에 그쳤다.

소작농을 착취하는 지주와 마름은 농업사회였던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를 통한 일제의 보다 체계적인 착취까지 더하면 소작의 폐해는 비교적 최근인 해방 후 농지개혁 전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1962년 ‘경자유전’과 ‘소작제도 금지’의 원칙이 헌법에 명시된 이후로 이 폐해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농지만큼은 농사를 짓는 사람만 가질 수 있고, 불가피한 이유가 없으면 소작의 형태로 농지를 빌려주고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없다는 원칙이 선 것이다.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는 비율 57.6%

현행 헌법과 농지법에 따른 농지 임대차는 소작과는 다르다.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임의적인 계약으로 농사를 짓고 생산물을 나누는 것이 소작제인 반면, 임대차는 민법에 규정된 계약을 기반으로 한다. 법대로는 농지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 폐지와 함께 봉건적 소작제도는 반(半)봉건적 소작제로 바뀌었고 현대에 와서 이 제도는 사라졌다. 지주가 소작농을 강제로 동원하고 고율의 소작료를 받는 소작제 대신 현재의 농지 임대차에서는 생산량의 10% 수준으로 임대료 수준이 정착됐다.

이에 따라 헌법의 경자유전 원칙에 의문을 품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개헌론이 사회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경자유전 원칙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자유전 원칙 폐지론은 소작제의 폐해가 사라진 농업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다 효율적으로 농지를 활용하고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비농업인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까지 남아있던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과거의 유산인 조항을 헌법에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농업에서도 세계 수준에서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자유전 원칙은 농업기업 입장에선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규제로 작용하는 셈이다. 현행 농지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 개인 대신 농업법인을 통한 농지 소유가 점차 확대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경자유전 폐지는 농지시장에 더 많은 농업법인이 진입할 수 있게 문턱을 낮추는 방안이 된다. 이미 임대차 계약조차 잘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농지가 농업인의 경작에 쓰이지 못하는 점을 보면, 농업에서도 구조조정을 시행할 수 있게 시장을 열어 규모가 있는 농업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지마저 기업의 경제활동에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허용하면 도시민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농산물 가격이 널뛸 수 있고 농약을 대량 투하하는 농업방식으로 먹을거리의 안전도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근거다.

또 사실상 부동산 투기만 조장할 수도 있다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대기업 일가가 농업용도라고 신고해 농지를 구입한 뒤 자신이 대주주인 골프장 개발 법인에 땅을 넘기는 등의 편법 행태가 드러나기도 했다. 농업인이 아닌 개인이 텃밭이나 주말농장 등의 목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농지는 1000㎡ 미만에 불과하다. 골프장이나 부동산 개발에 필요한 수십만㎡ 단위의 땅 소유는 지자체에 농업경영계획서를 제출하는 등 농지 취득자격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 절차를 감수하고서도 개발이익을 만들어내려 농지를 구매할 정도로 농지를 향한 수요는 잠재돼 있는 것이다.

충남 홍성군 농촌의 한 농민이 논두렁을 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충남 홍성군 농촌의 한 농민이 논두렁을 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이와 같은 편법은 농업법인을 통한 농지 소유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농촌문제 관계자들의 입장이다. 농지법을 제정할 당시에는 엄격한 기준으로 소유를 제한했지만 농업법인의 농지 취득자격 요건은 점차 완화되고 있는 추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농업개혁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임영환 변호사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박완주 의원과 경실련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헤아릴 수 없는 농지법 완화로 업무집행권을 가진 사람들 중 농업인의 비율은 줄어들었고, 대표자가 농업인이어야 하는 제한마저 폐지된 상황”이라며 “결국 비농업인이 농업회사법인을 통해 자유롭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농지 소유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경자유전 존치론이 폐지론보다는 비교적 더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는 농업기반이 약해지는 현실을 개선하고 농업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농지는 농업인의 소유로 남겨둬야 한다는 주장이 뒤따른다. 농촌과 농업에 대한 무관심 탓에 경자유전 존치 이상의 대책을 강구하자는 여론은 그다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오히려 현행 농지법을 개정해 비농업인의 농지 소유를 허용하는 예외적 경우들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움직임에도 사회적 반향은 크지 않다.

때문에 노인인구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농촌의 현실이 그대로 노인 빈곤율과도 이어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농지 거래가 자유로워져 가격이 높아지면 임차농가의 소득은 더 위협받을 수밖에 없고, 이 경우 개별 농가 차원의 소규모 영농까지도 포기하게 만들 소지가 크다. 이에 대해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의 마두환 사무총장은 “농촌인구 감소와 고령화, 그리고 영세농과 임대농의 비중이 큰 현실을 반영해 오히려 농지제도는 지속가능한 가족농 중심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며 “농업인 중심으로 농지를 소유하고 이용하는 제도를 세우는 방향의 법 개정과 별도의 농지임대차보호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농업인 소유 가능케 해 경쟁력 높여야”

영세한 임차농가를 보호하는 방향의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임차농가를 보호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반대로 농지 공급 자체가 줄어들 위험도 있다. 정부가 고민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정부는 일단 경자유전의 원칙 자체는 존치시킨다는 입장이지만 경제논리가 지배적인 현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에 현실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다. 현실과 제도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버린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현실을 반영해 농지를 필요로 하는 수요는 유지해 농지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한편, 농지를 빌리는 농가와 빌려주는 농가 모두를 보호하는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채광석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지 임대차 관리제도를 도입해 농지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당국이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하면 이를 토대로 제도를 개선하고 농지 임대차 현황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수열 농림수산식품부 농지과장도 경자유전의 원칙은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현행 농지법의 문제는 개선해야 하지만 그만큼 난관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농지법의 비농업인 농지 소유 예외조항 중 농지를 취득하자마자 바로 임대가 가능한 조항 등은 문제가 있는 만큼 개정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비농업인이 농지를 상속받을 수 있는 문제는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상속하면 세금을 감면하는 등의 제도 정비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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