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자와 히로후미와 만해 한용운- 너와 나, 우리가 같이 살기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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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가 열린 지 한 해가 넘었다. 잘못된 길에 섰던 세상은 찬찬히 바뀌고 있다. 아주 작은 변화조차도 크게 보이는 것은 사회가 그간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촛불은 세상과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시인과 경제학자]우자와 히로후미와 만해 한용운- 너와 나, 우리가 같이 살기 위해서라면

현대경제학의 성장이론과 수리경제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제학자로 우자와 히로후미(1928∼2014)를 꼽는다. 경제 안에서 기술이 변화하는 이유를 찾았던 케네스 애로가 그와 연구했다. 시카고학파 로버트 루카스의 성장이론은 그가 없었으면 발전할 수 없었다. 갖고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서로 다를 때 (물물)교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연구한 조지 애컬로프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그의 조교였다. 스티글리츠는 근래 ‘불평등’에 투신해 여러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인 재닛 옐런은 애컬로프의 배우자다. 애로, 루카스, 애컬로프, 스티글리츠 모두 노벨상을 받았다. 시카고 시절 그가 맹비판했던 학자도 당연히(?) 노벨상을 받았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밀턴 프리드먼 말이다.

본래 수학자로서 현대경제학의 기초가 되는 수리경제학과 균형성장이론의 바탕을 닦은 우자와 히로후미는 누구보다 자주 노벨상 후보로 거론됐지만 받지 못했다. 그의 ‘변절’을 이유로 드는 사람들이 많다. 프리드먼의 득세(?)와 베트남 반전운동을 기점으로 그는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현대경제학에 기여한 수학적인 ‘렌즈’가 사회를 곡해하는 데 쓰이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는 ‘변절’한 게 아니다. 청년시절 경제학으로 들어설 때 그를 움직였던 러스킨의 문장, ‘(경제는) 부가 아니다. 삶이다’를 결코 놓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경제학이 변절했다. 이후 시장 만능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교육과 환경을 위시한 사회의 ‘공통자본’을 (수리적으로!) 연구했다. 나만 혼자 사는 게 아닌 너와 내가 함께인 경제를 이해코자 했다. 우리가 세상의 주인임을 보인 그가 타계했을 때 일본의 <현대사상>은 전체를 할애해 그의 생각을 다뤘다.

우자와 히로후미가 우리가 곧 세상이며 같이 사는 것이 진짜 자유임을 깨달은 것처럼,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인류의 근원적 양심과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진정 우리 근대사 최대의 인물이다. 주권이 없던 시절, 그 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민족의 주체성과 자존감을 높이려 애썼다. “복종하는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하다”며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를 말했다.

만해의 시는 종교의 뜻을 묘파하면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과 인간에 대한 사랑도 담아, 이들이 불교식 표현으로 ‘일체원융’을 이룬다. <님의 침묵>을 읽으면 ‘님’이 ‘나’가 되고, ‘우리’가 ‘님’과 ‘나’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남과 내가 곧 우리이며 나아가 ‘님’인 것이 느껴진다. 우리를 어우러져 살 수 없게 하는 것은 자유 없는 속박이자 일제이며, 남의 것에 대한 욕심이다. 그래서 ‘님’은 사랑하는 사람, 민중과 역사가 되고, 생명과 불타가 된다. 다시 돌아 나 자신이 되는데, ‘인간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경제학’이라는 설명을 가진 우자와 히로후미의 사회적 공통자본과 연결된다.

우리가 곧 세상이며, 같이 사는 것이 곧 자유임을 깨달았던 사람들. 그 믿음을 자신들의 가장 순수한 언어로 표현했던 시인과 경제학자야말로 근·현대의 진정한 등불이었다고 생각된다.

<김연 (시인·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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