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세계는 지금 ‘저령화 사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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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영맨 베이스볼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어린 선수들의 뛰어난 활약이 이어지면서 30세 언저리 베테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11월 30일 KBO리그 보류선수 명단이 발표됐다. ‘보류’라는 용어는 영어 reserved를 번역한 말로 구단이 해당 선수를 데리고 있겠다는 권리 선언을 뜻한다. 보류선수 명단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다음 시즌을 위한 연봉협상을 진행하겠다는 말이다. 보류선수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은 해당 선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얘기다. 좋은 뜻으로 해석하면 진정한 FA 권리를 얻었다는 말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제 필요 없으니 방출시키겠다는 뜻이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이맘때면 많은 선수들이 직장을 잃는다.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나이가 차버린 선수들이 새 팀을 찾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은퇴를 택한다. 올 겨울은 베테랑들에게 더욱 차갑게 느껴지고 있다. 구단들의 ‘젊은 선수 선호현상’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LG는 그 선봉에 섰다.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손주인(34), 이병규(34), 유원상(31) 등이 40인 보호선수 명단에서 빠져 다른 팀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통산 2105안타를 때린 정성훈(37)은 아예 방출선수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수년 전부터 ‘리빌딩’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된 ‘젊은 선수 선호’가 올 겨울 들어 한층 강화됐다.

11월 17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한국과 대만의 경기 중 올 시즌 신인왕을 차지한 이정후(넥센)가 3루타를 친 뒤 환호하고 있다./연합뉴스

11월 17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한국과 대만의 경기 중 올 시즌 신인왕을 차지한 이정후(넥센)가 3루타를 친 뒤 환호하고 있다./연합뉴스

노장의 경험보다는 젊은 선수 선호

다른 팀도 그 대열에 속속 올라탔다. NC 다이노스는 올 겨울 팀의 모토를 ‘영(young)&프레시(fresh)’로 정했다. 외국인 선수 계약에 있어서도 젊고 건강한 선수를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웠다. NC도 방출선수 명단에 조영훈(35), 김종호(33) 등 한때 1군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의 이름을 올렸다.

한화의 내년 시즌 모토 역시 ‘젊은 한화’다. 차일목(36), 정현석(33), 이양기(36) 등이 선수생활을 마치고 코치로 활약하게 됐다. 뒤늦게 타격실력이 부쩍 늘어 1군에서 활약했던 김경언(35)은 방출됐다. 새 팀을 찾아야 한다.

‘젊은 선수 선호현상’은 두산과 넥센에서 시작됐다. 두 팀 모두 25세 언저리 젊은 선수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최근 수년간 강팀 자리를 유지했다. 두 팀 모두 공수 양면에서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성적을 냈다. 두산이 퓨처스리그를 통해 가능성 있는 유망주를 집중적으로 키워 기용하는 방식이라면, 넥센은 보다 일찍 1군에 투입해 성장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넥센이 최근 2년 연속 신재영(투수), 이정후(외야수) 등 신인왕을 배출한 것은 이 같은 팀 운영의 결과다.

KBO리그만의 흐름은 아니다. 메이저리그는 젊은 선수 선호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2015년 캔자스시티, 2016년 시카고 컵스, 2017년 휴스턴 등 최근 3년간 월드시리즈를 우승했던 팀들의 핵심 전력 역시 25세 전후의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의 폭발 덕분이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영맨 베이스볼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어린 선수들의 뛰어난 활약이 이어지면서 30세 언저리 베테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2017시즌 메이저리그 홈런은 6105개로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이었던 2000년의 5693개를 뛰어넘었다. 홈런의 분포에서 차이가 뚜렷했다. SI에 따르면 2000년 대비 2017년 홈런 기록에서 25세 이하 선수들의 홈런 숫자가 55%나 급증했다. 어린 선수들의 홈런 숫자가 크게 늘었다.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분석과 기대치 역시 30세 이상 선수들보다는 어린 선수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메이저리그 ‘저비용’은 또 다른 매력

어린 선수들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근력과 스피드 모두 어린 선수들이 30세 넘는 베테랑보다 앞선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구속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점점 빨라지는 투수들의 속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린 선수들의 빠른 반응 속도와 순발력이 필요하다. 베테랑 타자들이 일반적으로 ‘변화구에 유리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만큼 빠른 속구에 약점이 있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상 위험성이 적다는 것도 젊은 선수를 선호하는 이유다. 투수의 어깨와 비슷하게 선수의 근육 역시 많이 쓰면 다칠 가능성이 높다. 근력이 약해지면 인대와 뼈 등 다른 부위의 부상 가능성도 높아진다. 햄스트링 부상은 대표적인 과다 사용에 따른 부상이다.

KBO리그와 달리 예산 운영에 민감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에게 젊은 선수의 ‘저비용’은 또 다른 매력이다. 경험이 쌓여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의 몸값은 젊은 선수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 검증된 선수라는 타이틀이 붙지만 기왕이면 싼 선수가 구단 예산 운영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젊은 선수에게도 약점은 있다. 야구라는 종목은 수많은 변수로 둘러싸여 있다. 시속 150㎞가 넘는 공을 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야구경기의 흐름은 1년에 한 팀이 162경기씩 치러도 같은 경기가 있을 수 없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일이 쉽지 않다. 베테랑 야구선수가 가진 가장 큰 덕목은 오랜 ‘실패’를 통해 배운 경험이다. 좋지 않은 흐름 속에서 이를 벗어날 수 있었던 과거 많은 경기의 경험들이 베테랑을 베테랑답게 만드는 요소다.

그 ‘경험’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야구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야구는 측정의 단위가 바뀌었다. 투수가 던지는 구종과 구속 정보를 눈과 스피드건으로 따지던 시대가 지났다. 야구장에 설치된 레이더 기술을 바탕으로 나노 단위의 데이터가 쌓였다. 숫자는 물론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한때 ‘감’이라 불렸던 야구의 요소들이 이제 세밀한 숫자 데이터로 처리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뉴얼이 ‘빅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는 중이다. 베테랑 선수들의 최대 자산이었던 ‘경험’이 이제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돼버렸다.

‘빅 데이터’는 경험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다. 오랜 실패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노하우가 숫자와 데이터로 뚜렷해지면서 젊은 선수들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야구의 세상은 지금, ‘저령화 사회’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빅 데이터’ 시대가 가져다주는 신호다. 그 신호등이 빨간색인지 초록색인지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지만 분명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용균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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